춘추전국지 3 - 풀어쓰는 중국 역사이야기
박세호 지음, 이수웅 감수 / 작가와비평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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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왕 정 26년, 전국 시대의 여섯 나라는 때를 거의 같이 하여 소멸되었고, 진나라는 중원 6개국을

휩쓸고 통일을 이룬다. 연대기 상으로 이 해를 마지막으로 춘추전국시대는 막을 내린다. 서양의

르네상스가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산을 문화부흥의 증거로 했듯이 동양의 중흥에는 춘추전국사대를

들 수 있다. 갈등과 투쟁의 혼란 속에서 오히려 찬란한 문화를 만개시키고 역사의 진보를 이룬

시대의 정신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진왕 정, 이후로는 시황제라 칭하는 이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한다.

조나라 무령왕이 내린 호복령(胡服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호'라는 것은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고,

호복(胡服)은 오랑캐 복장을 말하는데 전통적인 중국의 복장이 원피스 모양이어서 말을 타기가

불편하거나 어려운데 그것을 투피스 식인 호복으로 바꾸어 말을 타기 쉽게 한 것이다. 이는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한 엄격한 선택이었다기보다 무령왕이 내린 단호한 영단(英斷)이었다.

영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전의 고정관념을 깨고 이른 바 상식에 도전하는 '비 중국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의식주 중 의(衣)를 변혁할 것을 강요하는 호복령은 단순한 습속개혁이 아닌 일종의

문화혁명이며 문화형식의 한 부분을 허무는 문화의 재편성을 의미한다. 오랑캐족과 복장을 같게

함으로써 대립 감정을 약화시키고 위화감을 좁혀 정치 효율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그 후 2천년이

지난 20세기 초엽에 문화인류학자들이 '문화는 차이 일뿐 우열이 있을 수 없다'고 했으니 무령왕의

정치적 식견이 얼마나 뛰어 났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천하를 통일한 진왕 정은 국호 뒤에 황제를 붙여 '시황제'라 칭하면서 역사상 진시황제라 부르는 이가

등장하게 된다. 또한 황제를 과인이라 하지 않고 짐(朕)이라 칭하여 짐이라는 자칭이 여기서 비롯되게

된다. 그뿐 아니라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하고 진제국의 영역을 장성으로 둘러쌈으로써, 후대 중국인의

생활영역을 설정하고 문화적 종족적인 통일을 가능해 한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시황제는 중국의

개조(開租)이며, 역사적인 중국인의 시조인 셈이다. 이와 반대로 진시황은 중국사에 등장하는 최악의

'폭군'의 대명사로 사용되어 왔다. 물론 그의 2대 악업으로 불리는 만리장성 축조와 분서갱유가 있긴

하지만 역사상 이 정도의 악업을 저지른 인물을 찾으라면 부지기수가 이에 해당 될것이라는 저자의

사족에 약간은 설득이 되어진다. 또한 시황제의 진제국은 세계사에 출연한 최초의 법치체제와

관료제도를 겸비한 제국이었다. 이는 흔히 관료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Gaius Julius Caesar) 보다 200여년이나 앞서 있다. 그후 마키아벨리

(Machiavelli)가 정치를 종교와 윤리 도덕에서 독립시켜 현대 정치학을 출범시킨 것이 16세기

초엽이었으니 시황제의 정치제도가 얼마나 시대를 앞섰는지를 알 수 있다. 단지 아쉬운 점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중국사의 사상가들은 춘추전국시대에 한꺼번에 나와 버렸고 2천 수백년 동안 독창적인

사상을 지닌 사상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이단적 계보에 속하는 모택동이 있기는 하다. 아무튼

정치사 뿐만 아니라 사상가적으로도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4천년사에서 사상, 학술, 정치의 기본을

구축한 시대이다.

춘추전국시대를 관통하는 춘추전국지 1,2,3권을 모두 읽었다.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역사적 사건 순이

아닌 연대기적으로 기술로 처음인 조금 방황했지만 시대의 흐름 순으로 정리된 역사를 읽으니 '역사

이야기'라는 책의 소개가 잘 맞는것 같다. 시간이 허락 된다면 다시 한 번 이 책들을 탐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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