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1
나태주 엮음 / &(앤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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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에는 신이 주신 문장이 들어 있다.'

그렇다. 좋은 시에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은 문장들이 들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함축적이고 자유로운 시적 표현들은 그 상상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하게 하며

우리를 상상의 나래 속으로 끌어 당긴다. 멋진 시를 쓰는 이들은 정말 언어의 마술사들이다.

이 책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로 시작해서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이라는 싯구로 끝난다. 좀처럼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과 어차피 함께 해야 하는

세상이라는 의미를 담고 그 안에 주옥 같은 글들로 가득 채운 이 책은 그야말로 보물창고다.

얼마전 잘 가는 국수집 벽에서 본 '국수가 먹고 싶다'(이상국)를 이 책에서 다시 만났다. 이 시에는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 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라는 싯구가 나오는데 그 국수집에서 그 글귀를 보며

같이 간 제자들에게 '어머니 같은 여자와 결혼해라'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허름한 국수집이지만

그곳에 가면 어머니가 생각났다. 멸치로 우려낸 국물에 푹 끓여 낸 국수는 우리네 가벼운 주머니의

부담을 덜어 주어 인근 시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는 그런 곳이고 돈을 더 내지 않아도 면을

얼마든지 더 넣어주는 그런 곳이다. 이 시를 보며 그 국수집이 생각 난다.

1980년대의 우울함을 표현하며 자조적으로 많이 사용했던 '왜 사냐면 웃지요'(김상용)는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입에서 회자된다.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는데 별로 변한것 같지는 않고,

세상이 좋아졌다고는 하는데 여전히 먹고 살기는 팍팍한 지금의 우리에게 왜 사냐면 그냥 웃을 수 밖에.

나태주 시인의 표현처험 어느 시를 읽든지 초록빛 물감이 입 속을 통해 전신이 번지는 듯한 묘한 효과는

조용한 흥분을 준다. 또한 나 아닌 나로 바꾸는 최면과도 같은 순간을 제공한다.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을 읽으면 더욱 그러하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늙어 갑니다.'라는 싯구는 표면적으로는 연애시지만 적용 범위가 광범위하고

우리를 무한 상상의 길로 이끈다. 그 지극한 인내와 기다림과 희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마음이 저절로 넓어지는 시다. 그뿐인가. 제목부터 질문이고 내용도 질문으로 구성된 '그 사람을

가졌는가'(함석헌)는 우리의 젊은 시절을 함께 해온 아련함이 들어 있다. 삶의 궤적이 크고 우렁찼던

그분은 시에서도 처음부터 잘 살아야 한다고 호통을 치신다. 그래서 나태주 시인은 '번번이 나를 살리고

내 인생의 길을 고쳐 놓았다'고 말한다.

오랜만에 시의 향연을 느꼈다.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고 늘어진 어깨를 일으켜 주는 시가 사람을

살리는 시다. 이 책에는 그렇게 사람과 동행하는 시들이 가득 들어 있다.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시 한편을 나지막히 읍조리는 사치를 누려 볼만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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