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자리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 지금 느헤미야를 묵상하다
황성은 지음 / 두란노 / 2020년 6월
평점 :
품절


땅에서 주의 일에 참여 ,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한 손을 의지하며 거룩한 주의

일에 기쁨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P60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P 144



코로나 19 사태는 우리에게 교회당의 크기와 모이는 사람의 숫자와 같은 천박한 과시가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을 알게 하고, 마스크로 입을 막고 생활하다 보니 그동안 무책임하게 내뱉었던

말들이 생각나 억지로 틀어 막고 있는 마스크가 감사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 무너진

성전을 수축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느헤미야의 모습은 잃어 버렸던 혹은 잊고 있었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되찾기 위한 최고의 기회임을 깨닫게 해준다. 


느헤미야를 공부해 사람이면 것이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교포 3세다. 할아버지가 바벨론으로

끌려 땅에서 아버지 하가랴가 태어났고 대를 이어 느헤미야가 태어 났다. 고대 엘람 왕국의

수도인 수산궁에 거할 정도로 출세한 그는 '왕의 술관원'(1:11) 된다. 고대 근동 지방의 왕의

술관원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을 겸하는 막강한 실세이다. 포로로 끌려온 3세가

정도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은 느헤미야의 능력이 출중했음과 그가 완벽한 바사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 느헤미야에게 포로로 잡혀 오지 않고 유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무너진 성벽을

세우지도 못하고 노략질 당하며 환난과 능욕에 시달리고 있는 예루살렘의 상황이 전해지자 그는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1:4)했다. B.C 597년과 B.C 538

두차례에 걸쳐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은 스룹바벨과 에스라에 이어 느헤미야

3 귀환을 하게 되는데 성전을 보호하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느헤미야를 공부하며 만났던 단어 하나 때문에 참을 씨름한 기억이 난다. '그때에'라는 단어이다.

'그때에 내가 왕의 술관원이 되었느니라'(1:11) 나오는 단어이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의 지경을 넓혀 민족의 죄를 자기 죄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기도를 바로 '그때에'

응답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때란, 시기 상으로 가장 적절한 ,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수도 있지만 그때가 바로 가장 정확한 '하나님의 ' 것이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항상

적절하다. 우리가 원하는 그때가 아닌 당신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타이밍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때를 바라 있는 영적인 눈이다. 


느헤미야의 기도의 다른 특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 위해 기도했다는 것이다.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술관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출세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그곳으로 유대 백성들이

들어오게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그때에' 일을 있는 적절한 자리로 가는 은혜를

더하셨다. 자리는 도구일 뿐이다. 자리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면, 도구가 목적이 된다. 자리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수단을 간구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우리에게 벌어진다.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한다.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 온다. 그리고 문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들이 닥친다. 세상은 영적

전쟁터이기 때문에 선한 일을 위기가 오기도 한다. 이것은 어쩌면 사탄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공격일것이다. 우리 밝게 깨어 있고 선한 일을 하면 자신의 영역이 축소되고 힘을 잃게

되므로 격렬하게 저항하고 방해할 밖에 없다. 느헤미야의 성전수축 과정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진다. 산발랏과 도비야라는 인물들이 자기의 영역이 침해 당하고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유대 백성들을 공격한다. 온갖 거짓말로 이간질을 획책하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술책에도 성전수축이 진행되자 이제는 유다 백성들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그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불어 넣는 심리전을 펼친다. 힘도 없고 돈도 없어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무슨 수로 자신을

지키겠느냐며, 하나님께 버림받아 이미 황폐해진 성에서 예배를 드려봤자 하나님이 받으시겠냐며,

하루만에 지을 듯이 덤벼 들지만 결국 부실 공사에 불과할 것이라고 비아냥거린다.(4:2).  우리의

삶과 흡사하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중요한 결단, 믿음의 결단을 내리려 마다 자주 듣던 소리다.

이때 느헤미야의 대처가 멋지다. 산발랏의 조롱과 비아냥거리는 말도 안되는 이간질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 만을 바라보며 몸부림치며 기도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문제는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점점 커져서 결국은 하나님을 보게 가려버린다. 느헤미야는 문제와

씨름하는 대신에 하나님과 씨름했다. 문제 해결의 키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한다. 



느헤미야에는 감격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우는 장면이다. 성벽을

재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사 에스라를 청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청한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청하매'. '같은'이라는 의미의 '일제히' 많은 백성이 사람인것 처럼, 모든 백성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열망했다는 것이다. 같은 목적, 같은 ,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것이다. 그때

모인 사람이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8:2) 이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새벽부터

정오까지' 대략 6시간 동안 말씀을 들은 것이다. 설교 시간이 25분이 넘어가거나 예배 시간이 한시간이

넘어가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호들갑을 떠는 우리의 상황과 너무도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렇게

6시간을 말씀을 듣는 이들의 태도는 '귀를 기울였다' 표현된다. '귀를 기울였다' 단어와 '마음에

새기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말은 지금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새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책을 폈을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는 말씀을 통해

그들의 마음과 자세가 어떠했는지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이 9절에 나온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우는지라'(8:9) 조상들이 죄를 지어서 죄로 인하여 포로로 끌려갔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 돌아온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무너진 성전과 성벽이 모두 재건된 예루살렘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감격의 눈물이, 끝까지 놓지 않으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의 눈물이 말씀을 통해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감격이 있어야 한다. 주일이

되었으니 어쩔 없이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대한 벅찬 감격과 기대감으로 가야하며

무거워진 눈꺼플과의 싸움에서 져서 낮잠 보충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늘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내게 주시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눈물로써 말씀을 대하는 그런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의 회복은

이런 것이다. 숫자와 크기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고 예배의 대상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자신들의 만족을 위한 쇼를 그치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예배를 드려야 것이다. 


책은 우리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다. 예배의 본질과 자세에 대한 좋은 지침이 될것 같다. 젊은 나이에

예배에 대해 바로 알고 드린다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예배의 회복이 조금은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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