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는 많은 행동, 그리고 내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 수많은
억압된 기억이 우리 삶의 그림자(shadow)를 이루고 있다.
저자는 삶을 그림자와의 치열한 전투라고 표현한다. 자신 안에 슬픔과 상처와 결핍이 빼곡하게
모여 있는 바로 그 '그림자'라는 존재는 우리가 일생을 두고 싸워야 할 최고의 적이다. 그러면서
트라우마나 콤플렉스 따위는 우리의 인생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척하는 것은 페르소나의 뛰어난
연기력일 뿐이라고 말하며 내 상처와 콤플렉스가 모여 있는 마음의 자리 즉, 그림자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끝없이 피하는 것보다는 용감하게 대면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일이다. 이 책은 '그림자를
방치하는 삶' 보다 '그림자를 소중하게 보살피는 삶'이 더욱 마음 챙김의 비법임을 알려준다.
이미 일어난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고 그 상처를 치유할 힘을 기르는 것은 오직 '그림자를 돌보는
삶'을 통해 가능하다. 그곳에 내 모든 희노애락의 원천이 꿈틀거리고 있다.
중년에 가까워질수록, 그리고 개인의 태도와 사회적 지위가 견고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올바른 길과
올바른 이상과 올바른 행위원칙을 발견했다눈 믿음이 강해진다고 융은 말한다. 맞는 말인것 같다.
사람은 자신의 확고한 의지와 신념으로 똘똘 뭉쳐 있고 나름의 성공을 거둔 사람일수록 이러한
욕구는 더욱 강렬하다. 그런 까닭에 그것들이 영원히 유효할것이라 생각하고 그것들에 변함없이
집착한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자신이 예전과 '다름'을 느낀다. 이제 서서히 '출생 이후의 시간'에서
'죽음을 앞둔 시간'으로 정신적 육체적 이동을 한다. 융은 이러한 중년의 여행을 고대 그리스어
'에난티오드로미아(enantiodromie)'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이 단어를 풀면 '반대로(enantio)'
'달린다(dromia)'라는 뜻이다. 결국 모든 것은 반대가 되어 간다는 의미다.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삶으로 이어지고 젊음은 늙음으로 바뀌고 늙음은 젊음을 낳고, 깸에서 잠이 오고 잠에서 깸이 오듯
창조와 소멸의 흐름이고 반복이다. 이에 대해 니체(Fridrich Nietzsche)는 '짜라투스트라는 젊은 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무덤으로 간다'고 말했다.
콤플렉스는 우리의 현실을 훤히 드러내고 기분에 영향을 미치며 우리를 불안하게, 우울하게, 후회하게,
심지어 아프게도 하는데 융은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과정을 이미 백여년 전에 확인하여
'콤플렉스'라고 지칭했다. 융은 콤플렉스를 '강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긍정적일수도 부정적일수도
있는 심리 유형의 집합체'라고 정의한다. 반복적인 생각과 감정의 핵심을 이루는 관념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온다. 우리에게 역사가 있기에 콤플렉스가 있는 것이다.
융은 모든 인간이 저마다의 죽음을 성취해야만 한다고 했다. 목적과 의미를 향한 삶이 막연한 삶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풍요롭다. 죽음은 모든 존재가 자연히 가 닿게 되는 목적지다. 죽음이라는 목적을
피하면 인생 후반기의 의미를 잃는다. 이젠 '죽음을 앞둔 시간'이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몇 년 후 일지
몰라도 우리 각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죽는다. 그리고 죽지 않는다.
죽음은 '무아지경(ecstasy)'의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신의 밖에 서는 것'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무아지경'은 의식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 의식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해 우리는 인도의 한 구루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할 것 같다. '이슬방울이 바다로 내려 앉아
침잠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가?' 우리에게 죽음은 이런 것이다.
융의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이 책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만나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반쪽짜리 삶이 아닌 온전한 자신으로 서라'. 이것이 내 안에
존재하는 거대한 '그림자'와 맞서는 방법이고 길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30분 후에 죽는다고 해도 지금 시작해야 한다. 지금 당신이 있는 그곳에서, 온전한 존재로 향하는
첫 발을 내디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