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 - 개정증보판
배한철 지음 / 생각정거장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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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초상화의 나라'라고 할만큼 많은 초상화가 제작됐다. 중국의 '일호불사 편시타인'( 一毫不似

便是他人,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다면 다른 사람이다) 화풍을 받아들여 초상화를 그리는데

' 사실주의' 추구했던 조선의 사람들은 조상들의 영정을 실제 조상과 동일시 하며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초상화는 텍스트 위주의 우리 역사를 풍성하게 소중한 유산이며 안에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가려진 역사의 뒷면들이 드러내기도 한다. 


지금의 서울 시장 격인 한성 판윤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6 판서와 동등한 2 경관직

(중앙관직) 판윤은 의정부 좌우참찬, 6 판서와 함께 아홉 대신을 뜻하는 9경에 포함되는 중요한

자리이다. 당시 정승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리였기에 당대에 내놓으라는 사람들은

한번씩 거쳐 간것 같다. 명재상인 황희와 맹사성, 명문장가 서거정,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 한음 이덕형,

병자호란때 주화론을 주장한 최명길, 실학자 박세당, 개화 사상의 선구자 박규수, 희대의 간신 유자광,

성리학의 대가 이언적, 암행어사 박문수, 종두법의 지석영 등이 한성 판윤을 거쳐간 인물들이다.

재미 있는 사실은 불과 반나절짜리 판윤도 있었다는 것이다. 김좌근이라는 인물인데 임명 당일 오후에

전격 교체되는 어이 없는 일도 벌어졌고, 정조 때는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임금이 지나는 길에

눈을 치우지 않았다고 당시 판윤인 구익이 파직되기도 했다. 이가우(1783-1852)라는 인물은 13 동안

무려 차례나 판윤을 지내 '판윤 대감'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전체 재임 기간이 1 3개월에 불과했을

만큼 거쳐 가는 자리의 이미지가 강한 자리였다. 


책에서 특별한 인물 명을 만난다. '계섬은 나라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지방에서 소리하는

기생들도 서울에 적을 두고 소리를 배울 모두 계섬에게 몰려 들었다. 학사와 대부들마저 노래와

시로 계섬을 기리는 일도 있었다' 조선 후기 명문가 출신 학자 심노승(1762-1837) 지은 <계섬전>

주인공인 계섬이다. 계섬은 .정조 활약한 조선 최고 여성 가객이었다. 조선의 내노라하는

소리꾼들이 총출동한 평양감사 회갑연에 참석해 대동강 선상에서 부른 노래로 평양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정조 국가적 행사로 치러진 혜경궁 홍씨(정조 어머니) 회갑연에서는 60세의

나이로 기생들을 지휘하여 행사를 치르기도 했을 정도로 당대의 가인이었다. 이런 그녀를 연모하고

따르던 남자들이 많았음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양친을 여윈 문신 원의손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후 당대 명사며 시조 작가였던 이정보의 문하로 들어가 작곡가와 가수, 스승과 제자의 사이를

이어 간다. 스승의 사후 방황하던 관노의 신분이었던 계섬은 세도가 홍국영에게 하사되어 기숙하다

홍국영이 실각하자 풍류객 심영의 그늘로 들어가고 이때 계심전의 저자 심노승을 종종 만나게 된다.

계심의 나이가 예순둘인데도 머리가 세지 않고 말도 유창하게 하며 기운도 정정했다는 계심전의

내용으로 미루어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여기서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너에게는 진정한

만남이 아니겠느냐'라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심노승은 무려 계섬보다 스물여섯살이나

연하였다는 것이다.


책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익히 이름을 아는 이들도 있고, 처음 들어 보는 낯선 이름도 있다.

시대를 풍미 했을 이들임에도 그들의 이름 조차 모른다는 사실에 얼마나 역사에 무지하였는지를

떠올리게 되고 정약용이나 이황, 이순신 같은 위인들의 진본 영정이 이런 저런 정치적 이유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김명국, 장승업과 함께 조선 3 기인 화가로 꼽히는 최북이

권력자의 협박 앞에 분노하며 문갑위 필통에서 송곳을 꺼내 '차라리 자해 망정 남에게 구속 받지

않겠다' 말하며 스스로 눈을 찌르는 장면은 기인으로서의 절개와 그가 '조선의 고흐' 불리게

이유를 설명해 준다. 결국 광기의 예술가는 홑적삼 차림으로 도성 귀퉁이에서 동사했다.

책은 저자의 말대로 영정이나 그림에 대한 전문서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전문 서적 보다 흥미롭고

재미있는 글들이 생생한 영정과 함께 가득 담겨있다. 역사는 대중과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이를 위해 오늘도 새롭고 흥미로운 지식을 찾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저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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