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이름은 없다.'
나태주 시인이 윤동주를 생각하며 쓴 글이다. 누군가를 칭찬하기도 어렵지만 진심과 존경을 담아
칭찬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런데 이 문장을 보면 윤동주를 생각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나태주의
진심이 담겨 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적이 언제였을까 하고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그만큼 강팍해져 버렸다. 아름다움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할 여유 마저도
갖지 못한 채 삶을 살아내기 급급한 지금의 우리에게 윤동주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되지'
윤동주. 우리 대부분은 이 이름을 기억한다. 저항 시인이며 독립 운동가며 우리의 것이 탄압 받던
시기에 우리말로 시를 쓰고 글을 썼던 인물로 기억은 하는데 정작 그의 시는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고향집 정도가 알려졌을 뿐 대부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 역시도 숭실고등학교(윤동주의 모교 중
하나)를 나왔기에 교정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외의 시들(팔복, 참회록, 십자가등)을 기억하지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한 시가 대부분이다. 28세 라는 젊디 젊은 나이에 불과 6개월 뒤 이루어진 그토록 고대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채 낯선 일본의 형무소에서 타계한 그의 삶은 조국의 아픈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고뇌하는 삶이었고 그 아픔과 고뇌는 그대로 시 속에 녹아 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복도에 걸려 있던 그의 시 '팔복'은 당시 혈기왕성했던 나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희망이 없다. 앞이 안 보인다. 그래서
더 이상 기댈 기운 마저도 없어 그냥 슬퍼해야 하는 조국의 현실을 노래하는 그의 팔복은 충격이었다.
여덟번을 반복하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읽으며 슬퍼함의 복은 도대체 무엇인지 고민하게
했고 그 슬퍼하는 복을 누린다 한들 그게 정말 복일까라는 의구심 마저 들었다. 이 건 마치 이상이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러오.....'와 열심히 도로를 질주 시킨 13인의 아해를 이야기하고는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라고 허무하게 마무리 하는 오감도의 그것과 흡사하다.
두 시인 모두 조국의 아픔과 현실을 허무를 소재로 사용하여 글을 썼다.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를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시인의 간절함과 절박함은 독자들의 마음을 더욱 더 깊이 흔들어 놓는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윤동주의 십자가의 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자신의 삶을 예수에 투영시킨다. 조국의 상황과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아파하는 자신과 죽기 위해 와서 죽음을 받아 들여야하는 예수를 '괴로웠던 사나이'라
묘사한다. 그 아픔을 알기에 그 고통과 괴로움을 알기에 현실 속 자신과 조국의 암담한 현실 앞에서
시인은 예수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죽음 뒤에 올 것을 알기에 행복한 예수와, 조국의 현실이 지금 비록
암담하지만 마침내 갖게 될 조국의 해방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행복한 예수를 부른다. 죽음 앞에서 조차
초연했고 마침내 죽음을 이긴 예수의 모습 속에 자신을 대비시킨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처럼
자신에게도 그 십자가가 허락 된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그 길을
걷겠다고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리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예수는 죽음을
맞이했고 시인도 죽음을 맞이한다.
몇 번이고 읽었다. 읽는 내내 절절함이 묻어난다. 시어 하나하나가 시인의 염원과 열망이 담겨있다.
그 간절함이 뿌려진 피 마냥 시 속에 녹아 있다. 어떤 시에서는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책 장을 덮으며
그토록 열망하던 해방을 보지 못하게 데려간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태주 시인은 글씨를 참 못 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