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진심이냐 거짓이냐는 상관없다. 어느쪽이든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은 어떤
사람이지에 대해 잘 보여만 준다면, 우리는 때때로 진실을 말하는 자보다 거짓을 말하는 자를 통해
더 분명히 볼 수 있으니까.'
피니스테르에 있는 보리바주(Beau rivage)호텔 128호실의 포근한 더블침대 오른쪽 협탁 서랍에서
오래된 원고를 발견한 안느 리즈 브리아르가 원고의 주인인 실베스트르 파메에게 보내는 편지로 부터
시작되는 이 소설은 시작부터 신선하다. 이야기는 33년전 몬트리올에서 잃어 버린 원고, 그런데
자신이 쓴 156쪽 이후를 누군가 이어서 썼고 잃어버린 장소가 아닌 프랑스의 어느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미스테리를 가지면서 157쪽 이후의 작가가 누군지에 대한 호기심이 발단이 되어 전개된다.
안느는 이 원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앞부분은 저를 전율하게 하는 순수함과 감수성을 넣었다면,
뒷부분은 프랑스어 교사에게 기쁨을 선사할 언어적 탁월함을 채워 넣었다고 할까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글이 아닌 자신의 글에도 마무리 하라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며 직접
마무리할 권리를 찾으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특이한 점이 몇가지 있다. 첫번째는 발신인의 이름 앞에 붙는 다양한 수식어들이다. '물감으로
뒤덮여서 오늘은 볼뽀뽀를 생략하며, 당신이 이 길의 끝에 다다르기를 바라며, 당신의 편지를 읽어서
기분이 좋은...'과 같은 다양한 수식어들은 편지를 받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고 기분좋게 만들것이다.
생각해보라. 물감으로 뒤덮여 있을 모습과 내가 보낸 편지를 읽고 얼굴에 한껏 기쁨을 가진 모습들을
생각하면 발신인의 이름만 덜렁 있는 것보다 훨씬 정감이 있다. 물론 모든 편지에 수식어가 붙는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작위적 느낌이 강하게 들어 오히려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거의
모든 편지에 추신(PS)이 달려있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장황하게 글을 써 놓고는 뭔가 부족하고
아쉬워 PS를 붙였던 그 때가. 그럴거면 편지에 다 쓰지 말이다. 아무튼 종이 글씨도 편지도 점차
사라져가는 이 즈음에 편지글로 된 소설을 마주하게 되니 반갑다.
먼 길을 돌아 결국 157쪽 이후를 쓴 사람을 찾게 되나 실베스트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모습이
아닌 오롯이 자신의 글로 나머지 부분을 다시 채우기로 한다. 마치 잃어버린 한조각을 찾아 헤매다
만난 그 조각을 슬며시 내려놓고 다시 길을 떠나는 '이가 빠진 동그라미'처럼.
이 소설을 읽으며 오래전 기억이 떠올라 어릴적 끄적여 놓았던 습작 노트를 꺼내 보았다. 그때의 그 감정,
그 느낌을 그대로 받을 수는 없지만 여전히 나를 미소짓게 만들고 '다시'라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나의 이야기고 나의 삶이기에 그렇다. 실베스트르도 그랬을것 같다. 비록 50이 넘은
아줌마의 주책(?, 안느의 가족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에서 시작된 일이지만 그도 자신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고 싶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된 추억을 끄집어 내는듯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