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불평등 시점
명로진 지음 / 더퀘스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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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태생적으로 불평등하다. '소유'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래로 한번도 인류는 평등했던

적이 없다. 수없이 많은 제도와 이상들이 나왔지만 나름의 모순을 가지고 있어 결코 평등하지

않았고 이름만 바뀐 불평등은 지금도 계속 된다. 그런 현실 앞에 저자는 시선 자체를 갑이

아닌 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불평등한 갑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지랄맞은 갑들아,

눈치 챙겨'. 이런 저자를 인문학자인 김경집은 뭉툭한 칼과 예리한 펜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는 시니컬하지만 조롱기가 없고 진지하지만 유쾌한 사람이다. 


'꼬붕의 시다바리'

꼬붕도 억울한데 시다바리다. 좋은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20 정도 초고속

승진을 해야 그것도 운이 좋아야 '꼬붕' 되고 창업주 2.3세대의 뒤치다꺼리를 한다. 그러니

이제 졸업한 이들은 꼬붕의 시다바리일수밖에. 젊은이가 불편하면 사회가 불편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시작부터 불편하다. 뭔가 대책이 필요한데 다들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다. 이러다보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디스토피아(Dystopia). 


우리는 ''인가. 아닐수도 아니 아니다. 최소 우리가 중견기업 정도를 가지고 있지 않는

우리는 을이 아니라 을에게 일감을 받아야 하는 ''이거나 혹은 병에게 일감을 받아야 하는 ''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어차피 병과 정이라면 우리의 발버둥은 무의미해진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은 '부자가 되려면 부자를 만나라' 어이없는 말마저 만들어 냈다. 그러나 저자는

부자를 이야기하며 부자를 그냥 만나거나, 만나지 말거나, 부자가 되고 나서 만나라고 말한다.

결코 그들만의 리그에 끼어들수 없으며 끼어든다 하더라도 가끔 먹는 신기한 별식 수준이거나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대다수는 이러한 상황에 분노한다. 그냥 분노만 한다.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 '분노하라' 나오는 이들처럼 행동하지 못하고 마음 분노에

그친다. 굳이 ''라고 묻는다면 '밥그릇'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병과 정들은 여전히 고달프다. 


문제는 중요하다.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피와 같다. 피가 돌지 않으면 사람이

죽듯이 돈이 돌지 않으면 사회가 죽는다. 돈이 없으면 있는 것이 없다. 누굴 만날수도 없고, 마음껏 먹을 수도 없고, 곳도 없어지고, 입을 옷도 없어진다. 이것이 죽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에 이미 2600년전 현자인 관중은

'기본적인 재산이 있어야 문화도 있다'라고 말한다. 


세상엔 '리더'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리더가 세상을 움직이고, 리더가 역사를 만들고....'. 물론 리더는 중요하고 누구나 리더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세상엔 '리더' 없다.

모두가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데 정작 리더가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 앞에 저자는 초나라의

장왕(초장왕) 소개한다. 왕위에 오르고 처음 3년간 주색잡기만 하다 정신차리고 초나라를

다스리다 '손숙오'라는 멋진 참모를 만나 부국강병을 이룬 인물이다. 그의 일화 '당교'

관한 이야기는 리더란 어떤 사람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난을 진압하고 베푼 연회에서

젊은 장수가 술이 취해 후궁의 허리를 껴안자 후궁이 재치를 부려 장수의 관끈 하나를 잡아

끊은 초장왕에게 사실을 고하며 벌해 달라고 하자 초장왕이 모두에게 관을 벗고 끈을

끊으라고 명한 이야기다. 이후 초장왕은 장수에게 벌을 주지 않은 것을 따져 묻는 후궁 여희에게 '해가 지면 왕과 신하는 술자리를 그쳐야 하는데 마시자고 잘못이다'라며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 리고 그때 후궁의 허리를 껴안은 장수가 훗날 정나라와의 전쟁에서 결사대500명을 이끌고 적진 안에서 맹렬히 싸워 승리를 견인한 '당교'이다. 저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다 못해 아랫 사람의 공까지 가로채는데 혈안이된 우리에게 리더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일화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중산층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준은 재산이 얼마이며, 평짜리 집에 살고, 차는 무엇인지 경제적 관점에 따른 구분이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엔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 있으며 영국 옥스퍼드대학이 정한 기준엔 '페어 플레이를 하는 사람' 들어 있고 미국 영국

프랑스의 공통된 기준엔 '사회의 약자를 돕는 사람' 들어있다. 과연 기준대로 하면 우리는 과연 중산층일까? 물론 'What you eat is what you are'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 아니 아니라고 믿고 싶다. 역사가 반복 되듯이 '식사(食史)' 반복 된다. 


인생은 불공정한 게임이다. 게임 자체의 출발선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에 알면 알수록 절망하게 된다. '노력하면 누구나 부자가 있다' 환상이다. 그냥 환상 정도가 아니라 개꿈이다.

세상은 공평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죽음 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는 누구나 죽음을 피할 없기에 살면서 주어진 환경에서

스스로의 길을 선택할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하며 지금을 치열하게 살것을 말한다. 치열하게

살며 자기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있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있는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점에서 삶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저자가 스무살 아들에게 하는 마지막 말에 가슴이 뜨끔해진다.

'투표를 잘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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