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씨돌, 용현 -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SBS 스페셜 제작팀 외 지음 / 가나출판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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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이름으로 가지 인생을 살았지만 그려진 삶은 오직 하나다.

불을 피워 소식을 알리던 봉수대가 있던 곳을 일컫는 말인 봉화치라는 지명을 쓰는 강원도 정선의

봉화치 마을에서 삼십여년간 '씨돌'이라는 이름으로 살았고 이전엔 치열한 민주화의 현장에서

세례명인 '요한'으로 살았으며 이전엔 말수적은 학생 '용현'으로 살았던 그는 지금 병원의료진의

도움을 받는 조차 호강으로 여기지만 어쩔 없이 병상에 있다. 


'남을 위해 아무 대가 없이 자기 몸을 다쳐가면서까지 저렇게 일하는 사람은 제가 가까이 사람 중에

요한씨 밖에 없어요'라는 윤순녀(노동 운동가) 말처럼 참혹한 현장 속에 그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우리와 함께 했다. 연좌를 할라치면 항상 제일 앞자리에 있던 터라 백골단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어 수도 없이 맞고 밟히지만 그는 여전히 자리에 있었다. 1987 6월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고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갔다. 아픔의 결과가 지금이라면 '무얼 위해 그랬을까'하는

의문이 정도지만 여튼 그랬다. 


역시도 홍제동 성당에서 김승훈 신부님과 함께 자리에서 처음 요한을 만났고 그후 연대 앞과

명동성당, 대학로, 독립문 등에서 그를 만날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항상 앞줄에 다부진 모습으로

있었고 학보사 기자로 카메라를 들고 맞은편에 있었다.(당시 학보사 기자들은 체포 대상이었기에

당시 신문사 기자들 속에 분들 기자 완장을 차고 있었다) 그때도 그는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

위해 뛰어 다녔고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데 앞장섰었다. '' '우리' 중요한 세상에서 '' 위해

살았던 그의 모습은 역사의 현장 곳곳에 남아 있다. 봉화치 마을 어른들이 기억하는 씨돌은 80년대

후반에 내가 만난 요한이었다. 


의외의 장소에서 씨돌을 만난다. 1995 6 29, 502명의 사망자와 937명의 부상자 그리고 6명의 실종자를

최악의 인재인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이다. '국민 여러분 구조 장비가 있으면 서울 삼풍백화점으로

와주십시오'라는 자막을 보고 출발했지만 강원도에서 오느라 늦었다며 배낭에 각종 농기구를 넣고 나타난

씨돌씨를 함께했던 구조자들은 유독 눈물이 많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임산부의 시신을

온전히 수습해야 한다며 혼자서 잔해를 치우는 모습은 겨울잠을 자는 뱀을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며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지내는 고집과 너무도 닮았고, 사고 발생 나흘째 극적으로 구조된 여성이 병원으로

이송된지 불과 시간 만에 사망했을때 슬퍼하는 모습은 한울삶 어머니들을 보호하며 눈물을 흘리며

행진하던 모습과 닮았다. 그는 요한일때도 씨돌일때도 그렇게 '' 먼저 생각했다. 그리고 현장의

씨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그는 '요한'이었다. 


신현봉 신부를 따라 정신으로 왔다 홀로 남은 '씨돌' 그는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뱉어내느라

투박하지만 위선이나 꾸밈이 없는 ' 쏟아내는 ' 쓰는 시인이었다. 독자의 생각과 눈을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움과 자신을 치유해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용현의 시는 처음엔 낯설지만

보고 보고 되뇌이기를 여러차례 하다보면 그가 보는 자연이 느껴지는 그런 시다.


그의 지나온 삶을 이야기하며 ' 그런 희생적인 삶을 사셨어요?'라는 질문에 담담하게 그리고 주저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으로써 당연한 '. 그렇게 당연한 일을 남의 일인양 모른척하고, 한눈 질끈 감고

본척하고,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는 그가 움직일 있는 왼손으로 이렇게

쓴다.

혁명가 게바라(Che Guevara) '가질 없는 것을 꿈꾸되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씨돌은 '자연인이지만 그것에만 매몰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매력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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