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로 보내진 에곤 실레의 '포옹'(1917)이라는 강렬한 그림 뒷면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영화
<메멘토>처럼 기억해야 할 것을 문신으로 새길 필요도 없이 삶이 내 몸에 흔적을 남겨 놓은 것이다'.
그렇다. 삶은 우리의 몸 구석구석에 생채기와 흔적을 남긴다.
사람은 몸을 가진 존재이고 우리는 몸으로 살아가며 가끔 영혼의 해방이나 일탈을 꿈꾸지만 영혼은
몸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 몸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 신호를 받아 표시하는 '신호등'이며, 시간을
들여 죽기까지 몸은 절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체이자 한 부분으로서, 한 종류의 일원이자
하나의 종류다. 그리고 부분은 전체의 본질에 관해 어느정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책은 열다섯 명의
작가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몸을 구성하는 부분들을 고찰하고 써 내려간
열다섯 편의 글을 모아 엮은 것이다.
작가이자 방송인인 크리스티나 패터슨(Christina Patterson)은 피부에 대해서 나이가 들수록 피부는
복숭아와는 거리가 멀어지며, 더 오래 살아갈수록 이 세상과 나를 가르는 이 탄력적인 장벽은 내가
싸우고 결국 이겨낸(혹은 져버린) 전투의 흔적을 보여주고 우리는 그런 상흔들 속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피부에 남겨진 흔적들은 살아온 삶의 모습이다. 살며 겪으며 마주한
수없이 많은 순간들이 고스란히 피부에 남아 있다. 그 순간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
인체의 신진대사 기능을 조절해 성장과 발달 속도를 결정(지능이 어느정도까지 발달할지, 생리는
언제시작할지, 키가 얼마나 되며 가슴 크기는 어떨지...)하는 티톡신이라는 호르몬을 만들어 내는
갑상샘은 몹시 중요하며 너무 뜨거워도 안되고 너무 차가워도 안되는 완벽하게 딱 적당한 '골드락스
(Goldlocks)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소설가 키분두 오누조(Chibundo Onuzo)는
갑상샘에 대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가 되도록 애쓰는 나비 넥타이 모양의
용광로'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시계의 초침이 갑상샘 기능 항진증이 있는 자신의 환자들의 빠른
심장 박동을 추적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는 사실 하나도 알게 되었다.
우주가 인류의 마지막 개척지라면 자궁은 첫번째 개척지다. 그래서 미국 시인 윌리스 스티븐스는
자궁에 대해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이 그 어떤 것 자체가 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모든 요람은 우리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묻고 모든 관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는지 묻는다. 자궁은 우리 존재가 시작되는
원천이며 수원이며 본거지다. 삽입, 배란, 자궁수축, 수정, 임신은 모두 번식이라는 본질적 신비에서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과정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저자는 사람의 언어 가운데
가장 운율을 맞추고 있는 단어는 '자궁'(womb)과 '무덤'(Tomb)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쓴 토마스
린치(Thomas Lynch)는 시인이며 작가이며 장의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는 여성은
약해빠진 제 2의 성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제 1의 성, 가장 맹렬한
성이라고 말한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폐, 맹장, 귀, 피, 담낭, 간, 창자, 코, 콩팥, 대장, 뇌등 15가지의 신체 부위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추천의 글을 쓴 시인 박연준의 말처럼 책의 차례 만으로 이미 전율을 느끼게 하고
그 전율은 이내 작가적 상상력과 만나 사실 보다는 진실 편에서 이야기를 풀어 간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어린 시절 장이 꼬여 며칠을 굶던 중 몰래 빵 한조각을 먹었다 죽을 만큼 혼났던 기억이 떠올라
쓴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