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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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환상을 가진다. 환상은 대부분 그냥 스쳐지나가는 기억의 파편이 된다. 그리고 사람은

파편을 부여잡고 여전히 살아간다. 


자그마치 1932년이라는 아득한 기억의 저편의 언젠가에 출간된 책은 미래 과학 운명이라는 독특한

주제를 가지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이야기하며 당시에 상상할 없었던 미래를 향한 발을 내딛으며

세대에 만연한 풍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예술적 자책감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유혹에 저항하며,차라리 좋은점과 나쁜점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쪽을

선택한다. 물론 선택은 독자들의 몫이다. 


34층짜리 잿빛 건물, 잉태, 탄생. 여기까지는 정상적이다. 그런데 난자가 움트고, 발육하고, 분열한다.

난자 하나에 태아 하나라는 일반적인 공식이 아닌 무더기로 싹이 생겨나고 태아가 되고 어른이 된다.

인간은 모든 인간을 공유한다는 지침과 태어나면서 이미 어떻게 성장하고 교육할지가 정해진 사회.

인간의 존엄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다만 만들어진 물건이며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된 세계. 모든 인간을 공유한다는 개념에 따른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지만 어디에서도 생명에

대한 존엄과 가치 그리고 무게감은 보이지 않는 세계. 스스로 의식과 생각을 제어하지 못하고 '소마'라는

약물에 의지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계. 세계는 태어 부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이라는 계급이 부여되는 아이러니한 세계이다. 어차피 기계적 생산에 의해 태어나는 것인데

여기서 계급이 나뉜다는 것은 무작위 추출인가 아니면 동일생산체계 속에 발생되는 우성과 열성의

차이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계급사회의 신분 구조는 기계화 문명에서도 어쩔 없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 마음이 착잡해졌다. 


여기에 이방인이자 이질적 존재인 그들에 의해 '야만인'이라 불리는 존이 찾아온다. 인간의 본성을

대로 간직한 존은 그들에게 '진기한 구경거리'였고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정작 존은 '야만인'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게 세익스피어와 성경을 읽으며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위험과 죄악을

탐닉하며 인간 본성대로 살며 죽음마저 선택할 있는 자유를 원한다. 어쩌면 존의 등장부터 불행은

시작된것일수도 있다. 


책의 절정에 해당하는 존과 무스타파 몬드와의 대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존에게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라고 대답하는 무스타파 몬드, 여기에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습니다'라고

담담히 그러나 당당하게 말하는 . 이들의 대화에서 물질 만능과 쾌락에 빠진 우리에게 던지는

저자의 메세지를 읽었다. 자유를 위해 안락함을 포기하는 용기와 진정한 행복을 위해 기꺼이 불행을

선택하는 결단력과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찾기위해 스스로를 포기하는 존을 통해 인간의 가치가

무엇이며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고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광기서린 축제의 현장은 인간이길 포기한 이들의 '도살제'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장면 전에 등장하는 '멕베스', '햄릿', '리어왕' 구절들은 도살제의 전주곡인양 절묘했고 군중들의

'채찍질을 보고 싶다' '죽여라' 외침은 예수를 십자가에 받으라고 소리치던 유대인들의 광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광기의 희생양으로 사라지며 또한 여운을 남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은 1932 그때 이미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갈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인간 스스로 자존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경고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명 예전에 비해 많아

달라졌고 훨씬 편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잡을데 없이 완벽하고 너무 멋진 신세계지만 이마저도

정답은 아니다. 현대 문명은 우리가 꿈꾸던 것들을 벌써 이만큼 가까이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문명은

우리에게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준다. 책은 분명 1932년에 2540년을 꿈꾸며 허구적인

소설이지만 풍자와 사실적 묘사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거듭 경고한다. 우리 선조들이 달을 보며

속에 토끼가 살고 있을거야라고 막연히 생각했던것 같이 막연한 미래이지만 영화 이퀄리브리엄

(Equilibrium, 크리스찬 베일 주연, 커트 위머 감독, 2003)처럼 벌써 이만큼 앞에 와있는 가까운 현실이

될것 같다.

 

솔직한 심정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상실된 세상을 맞이할 자신이 없기에 변화의 시기를 보기 전에

생을 마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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