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권 세계의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 학문인 서어서문학 교수인 저자는 양면성과
이중성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을 지닌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을 상실과 희망이라는 두 잣대로
표현하며 소외된 영혼을 위한 해방을 노래한다.
'시가 내게로 왔다'는 싯구로 유명한 파블로 네루다는 가르시아 로르카의 '지성보다는 고통에
더 가깝고 잉크보다는 피에 더 가까운 시인'이라는 표현처럼 책을 읽고 머리로 글을 쓰는 시인이
아니라 펄펄 살아있는 진짜 인간의 고통을 호흡하며 인성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시인이다.
시란 무엇인가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영화 '일 포스티노(The Postman, 마이클 레드포드
감독, 1994)는 네루다를 우리나라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영화이다. '나를 고발한다(Yo
acuso)'라는 연설과 말을 타고 넘는 안데스 산맥, 작고 아기자기한 섬 풍경으로 기억되던 이 영화,
나 역시도 몇 번은 본 것 같다. '시네마 천국'에서 시골 극장 영사기사로 분해 진한 감동을 선사했던
프랑스 배우 필립 느와레가 네루다 역을 맞아 열연했다.
나라마다 언어권마다 독자들과 평단의 사랑과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작가들이 존재한다. 독일에
괴테가 있고, 영국에 세익스피어, 이탈리아에 단테, 러시아에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스페인에
세르반테스가 있듯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보르레스,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더불어 파블로 네루다가
있다.
그의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드러나듯 그는 소외된 시인이었으며 지역에 한계에 갇힌 그의 시 안에는
늘 고통의 비가 내렸고 미국의 지원으로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난 몇일후 그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네루다는 비록 스탈린을 신봉했던 스탈린주의자(우리 말로 하면 빨갱이라고 할수 있는)였지만
단 한순간도 미적 자율성과 창조적 상상력을 포기하지 않은 자유로운 예술혼의 소유자였고 리얼리즘
그너머를 꿈꾼 리얼리스트였다. 네루다의 자유로운 예술혼은 그의 여성 편력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그의 시집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에 실린 구절 하나로 설명이 가능하다. '난 봄이
벚나무와 하는 행위를 너와 하고 싶다'. 얼핏 선정적이나 퇴폐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시를
음미하다보면 그런 느낌은 사라지고 오히려 자연의 신비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해 말하는
네루다의 마음을 만날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때로는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el hombre invisible)'로서 시적 대상 뒤로 모습을 감추고, 그럼으로써 시인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대신 집단성과 익명성이 담보되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성을 지우고 나의 우월성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더불어 시인의 노래는 이제 이름없는 민중들의 침묵의 언어와 결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노래는 모두가 하나 되게 하는 노래
모든 이들이 함께 부르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노래'
이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영혼인 파블로 네루다는 죽음을 앞두고 다시 한번 본연, 본질,
자기자신에게로 돌아간다.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그의 글은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눈에
띄게 짧막해져 함축미와 깊은 여운을 준다. 마치 하이쿠(3구 17자로된 일본의 단시)나 고승의
법어와도 같다.저자는 지면의 70여 페이지를 할애하면서 네루다를 다루지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박 겉핥기'이다. 그만큼 그의 세계는 깊고 넓다.
이 책을 받아들고 단숨에 네루다 부분을 두번 읽었다. 다리오, 비예흐등 다른 유명 시인들이
등장하지만 유독 네루다의 감성과 인식이 좋다. 그래서 몇 번을 더 읽어 봤다. 여전히 좋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그의 시는 어쩌면 절망속에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있는 인간과 호흡하며 꿈과
희망을 빚어내는 라틴 아메리카의 독특함이 들어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파블로 네루다를
만난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