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재는 기재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만난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며 누리는 행운일진데
일국의 왕자로부터, '고구려 천년의 영웅이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을지문덕. 그는
분명 범인은 아니다. 수와 고구려의 대치 형국에서 벌어지는 말갈, 백제, 거란, 신라 등의 외부
세력과의 합종연횡은 지금의 정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갈의 족장 중 하나인 아야진과의 우정은 수심과 번민 속에 머리가 아팠던 아야진이 문덕을
만나는 순간 기쁨을 감추지 못할 만큼 크고 강건하다. 아야진에게 문덕은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고 싶은 친구이다. 아야진에게 던진 청년 문덕의 한 마디는 앞으로 펼쳐질 영웅의 일대기의
전조를 보여준다. '청년이라면 가슴 속에 늘 불가능한 꿈을 품어야 하는 법 아니겠나.' 불가능의
꿈을 품지만 그것을 가능해 만들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그런 사람이 청년이다. 이들의 만남은
양광에게 붙잡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대족장인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마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처음 시작된다. 죽음의 위기에서 구함을 받은 아야진은 이후 문덕을 마치 여인네의
마음처럼 사모하며 존경한다. 그리고 이제 다시 만나 미래를 준비한다.
어느 왕조든 왕좌를 위한 목숨을 건 암투는 발생하고 모략과 술수가 벌어진다. 수나라도 그랬다.
세자 양용과 둘째 양광의 대립과 충돌은 마치 우리의 궁궐 역사를 들여다 보는 듯하다. 여기에 우
리의 역사 시간에 등장하는 '여수장우중문'의 주인공 우중문도 등장한다.
을지문덕과 건무, 아야진, 강이식, 갑정 이들은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에게 진실인 진짜 사내들이다. 어쩌면 이 조합만으로 이미 이 전쟁은 끝난것이나
다름없으나 수의 양광과 우중문, 석환 역시 만만치 않은 이들이라 서로 얽히고 설킨 용호상박의
대결이 사뭇 흥미롭다. 을지문덕. 그의 말은 진중하고 깊이가 있다. 한번 던져진 말은 천금과 같고
득도한 고승의 법어와 같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묘하게 말려들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
이 책에는 백성은 모르고, 군사도 모르며, 감정이 메말라 화를 잘 내고 부합하는 세력의 농간에 휘둘려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인물하나가 등장한다. 그를 보고 있자니 그 밑에 아무리 뛰어난 장수가
있다 한들 패배의 길로 접어 들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에 안쓰럽기까지하다. 이런 형과 아버지를 둔
둘째 황자는 더 이상 지켜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대부분의 쿠데타는 이랬다) 드디어 이렇게 말한다.
'나 황제가 되고 싶다'
이에 반해 고구려 왕실의 모습은 '연합'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총명하며 진중한 영양왕, 그런 왕을
보좌하며 견고하게 서 있는 왕자, 왕의 명령이라면 불속이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장군들,
왕에 대한 충성으로 의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대대로와 대신들, 거기에 전설의 치우검을 소유한
용맹한 지략가 을지문덕, 이들이 이루어 내는 하모니는 '화합' 그 자체이다.
이렇게 수와 고구려 양측은 일촉즉발의 상태에서 고구려가 먼저 선공을 취하러 떠나는 장면에서
1부가 막을 내린다.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단숨에 읽게 만드는 김진명 작가의 필력에 다시금
감탄한다. 그리고 2부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