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원 이육사. 저항시인 이육사에 너무 익숙한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양반과 선비에 대해
양반 혹은 사대부는 벼슬아치를 두고 하는 말이고 이는 신분계급 철폐와 함께 사라졌고 선비는
인격적 개념으로 결코 사라질 수 없고 세속의 고난을 초월하여 천명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려는 군자의 이상이라 말하며 자신이 그 '선비'임을 자처했던 이육사.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아호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수인번호인 '264'를 숙명처럼 받아들여 가슴에 품있던 남자,
펜을 들 수 없을 땐 총을 들었고 총을 들 수 없을때엔 펜을 들었던 남자 그는 분명 선비였다.
또 하나의 선비가 있다. 자신은 육사처럼 강인하지 않아서 고문을 견뎌내지 못할것이기에 아예
가장 친한 지기였던 육사의 행적조차 묻지 않았던 신석초 선생의 모습에서도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의지와 그 길을 끝까지 걸으려는 결의와 지기와 함께 하려는 선비의 열망이 느껴진다.
수부선행(水浮船行)
물이 배를 띄워서 나아가게 한다는 말로 육사가 자신을 도와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한 일창한약방
주인인 일창 할아버지에게 써서 보낸 초서체로 된 휘호로 비록 항일 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지
않았지만 물심양면 뒤에서 도왔을 이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영화 '봉오동 전투'에 보면
그 군자금을 전달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이 모두
배를 띄워 올려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다.
이타적이고 비본능적일 때 인간은 짐승과 구별된다.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죽음의 길을 선택한 그들은 어쩌면 그 순간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육사가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불렀던것처럼 우리 역시도 그런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야 할것이다. 육사가 쓴 광야의 '광'은 '넓을
광'이 아니고 '빌 광'이다. 만주 벌판 같이 넓은 곳이 아니라 크기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빼앗긴
빈 들판인 그 광야는 우리의 선배들이 바라 보던 바로 그곳이고, 우리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던 바로 그것이다.
'제2부인은 어떠냐고', 자신은 어떠한 형태로든 당신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하는 여인과 이름을
어찌부르던 첩이라는 천박한 이름을 미화시킨것에 불과하며 그녀를 법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첩이 불과한 제2부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육사. 이들은 분명 사랑을 하고 있다.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에 그것이 담겨있고, 그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행동 하나하나에 그것이
들어있다. 그들은 처절한 가슴앓이를 하며 서로를 향하고 사랑을 표현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럼에도 인스턴트 사랑에 휘감긴 오늘 우리에게 이 사랑은 부럽다.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것임을 여인은 안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의 삶과 그의 의지를 이렇게 쓴다.
'그가 꿈꾸는 세상,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세계, 그곳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것이며 결코 헛되다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그런 사람이었다.' 문학평론가 방민호는
육사를 이 시대에 피어난 한 떨기 매화였고 매화의 참된 가치는 정녕 봄이 아직 오지 않은
겨울이여서야 빛나는 법이고 그는 어두운 밤의 시대를 밝힌 아리따운 별빛이라고 말한다. 낮을
사는 사람들은 이 별빛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짙은 어둠이 지나야 밝은 아침이 오듯
우리는 짙은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 해방을 맞이하지만 육사는 그곳에 없다. 그의 작품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른 '백마 탄 왕자'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지만 퇴계의 후손으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붓을 들었던 남자, 도쿄로 유학하고 베이징으로 유학하며 펜을 들었던 남자, 의혈단이 난징에
세운 군관학교에서 총을 들었던 남자, 끝내 총을 쏠 기회는 얻지 못했으나 총탄보다 단단한
모국어로 강철 무지개 같은 시를 남겨 놓고 떠난 그 남자.
그는 분명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살아서 마르지 않는 강물과 같은 의기로 '이 땅'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