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읽은 '수필 쓰기의 핵심'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수필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꺼내는
일이기에 삶이 진솔해야하며 모범은 못되어도 욕 먹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을 했는데
저자도 같은 말을 한다. 에세이는 자신의 속 마음을 꺼내는 내 이야기이기에 그것의 소재가
된다면 꺼낼 수 있어야 하며 그렇기 위해서 삶이 진솔해야 한다. 배설의 기쁨이 비움의
행복이듯 저자 역시 꺼내 놓고 나니 그렇게 홀가분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래서
해우소(解憂所)라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열 여덟의 내가 서른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며 신체의 변화를
느낀다. 푸석해진 얼굴을, 많아져가는 주름을, 늘어 가는 흰머리와 배를 감싸는 묘한 이물질들을
통해 우리는 나이 들어 감을 느낀다. 무엇보다 자꾸 잊어버리는 몹쓸 기억력은 '점점 나이들어
가는구나'하는 탄식을 뱉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는 날마다 선택을 한다. A나 혹은 B,
그도 아니면 Z를. 그 수없이 많은 선택 중 완벽하게 마음에 흡족한 선택은 없다. 뭔가 조금은
부족하고 아쉽지만 내가 한 선택을 최선의 선택으로 만드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선택을 붙잡는다. 때론 그 선택으로 인해 곤란을 겪기도
하지만 뭐 어떤가. 그렇게 사는것이 인생이고 어짜피 내 삶인것을.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말을 한다. 내 뱉어진 말들은 공중으로 흩 뿌려져 실체가 없는 듯 보이지만
누군가의 가슴에 고름 덩어리로 침전해 있을지도 모른다. 말투, 억양, 목소리, 단어 선택 등 말에서
비롯되는 모든것들이 복합적으로 섞이면서 오해를 부르고 불필요한 다툼을 만들기도 한다. 말은
백스페이스로 수정할 수도 딜레이트로 삭제할 수도 없기에 글을 쓰는 것보다 훨씬 신중해야 하는데
우리는 말을 너무 쉽게 뱉어낸다. 짧은 문장 하나를 쓰는데도 온 신경을 쓰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몇시간씩 고민을 하면서 말은 너무 쉽게 내 뱉고, 혹여 상처라도 받았다고 하면 '몰랐다'라는 말로
모든 것을 덮는다. 그 '몰랐다'가 더 큰 상처라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옛 현인은
'일곱번 생각하고 세번 말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오늘 나는 무슨 말을 했는지, 그것이 칼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본다.
사람을 바라 보는 시각은 모두 다르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 간다는 것도 서로를 향한 시선의 방향을
넓혀 가는 것이다. 한 방향 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도 볼 수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고,
제대로 볼 수 있어야 바로 알 수 있다. 360도 중 오직 1도의 방향으로 보면 나머지 359도의 다른
모습의 그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 매일의 삶이 다르듯 서로를 향한 시선 역시 새로워야 한다.
혼자 만든 요리를 혼자 먹는 요리사는 없다. 요리를 했다면 누군가에게 요리를 맛보게 해야 한다.
상대방의 입 안으로 음식이 들어가는 동안 손에선 땀이 흐리고 불안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서다. 보이지 않는 머릿속의 생각을 글로 써서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 글쓰기다. 꾸깃꾸깃 머릿 속에 가둬 두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 내서 알리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아무에게나 씀으로써 조금 더 글쓰는 일에 가까워 지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라는 책을 읽을때 들었던 감정이 다시 생겨
났다. 글을 쓴다는 것은 꾸준함과 진솔함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저자가 그렇다. 그는 글을 쓰며
가죽백처럼 무거웠던 마음이 에코백처럼 가벼워지고 꺼내면 꺼낼 수록 오히려 시원해짐을 느낀다.
그는 오늘도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