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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고 있어 - 거리 위 아이들을 향한 양떼 목사의 마음
이요셉 지음 / 두란노 / 2019년 1월
평점 :
대부분의 타협은 거창하고 대단하게 오지 않는다. p182
녀석이 말하는 싸움법은 잘 때리는 것이 아니라 잘 맞는 것이었고,
잘 피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p186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된다"
제도교회가 너무너무 싫어서 스스로 가나안교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 앞에 저자가 던지는 고백은 화살이 된다. 그렇다. 지금 교회는 세상의 집중포화에
너덜너덜해지고 고유의 고귀함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세상을 걱정하던 교회가
어느새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어 버린 암담한 현실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사역자의 이름으로 도저히 갈 수 없는 곳, 사역자들이 거닐 수 없는 시간,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만나기 힘든 아이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인가. 그럼 아골골짝 빈 들은
어디인가? 이것, 저것, 그것 다 빼고 남는 그곳에서 찾는게 우리가 목놓아 부르는
골골짝인가? 이런 허울 뿐인 편견을 버린 저자가 부럽다. 십여년 이상을 청년사역을 한
나로서도 견디기 힘들었던 그 시선과 말들을 꿋꿋이 견뎌내며 그 길을 걷고 있는 저자의
열정이 부럽다. 그런 저자의 첫 주제는 이렇다.
'복음을 듣기만 하는 세대'
너무 많이 들었다. 특히나 부모가 교회를 다닌다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들이 만난
예수를. 그러다 보니 정작 자신의 예수는 없다. 모두가 남의 예수만 가득하다보니 삶의 변화가
없다. 아니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뿐 아니라 삶과 행동이 다른 그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아이들의 마음엔 이미 '그런 예수라면 난 안 믿어요'가 가득하니 백번 천번 들어도 변화는 없다.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게 우선인데 자꾸 다른 사람을 보며 정죄한다. 그러다 보니 복음을 듣기만
한다. 우리도 이런데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먼저 믿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한다. 바르게
믿어야 하고 잘 믿어야 한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예수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 문자로 된 예수가 아니라 삶에서 드러나는 예수를 만나야 하며 그 예수를
믿어야 바르게 말할 수 있다.
우리 전도사님이 좋아하니까 찬양을 듣고 우리형이 싫어하니까 앞에서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아이들의 배려는 도무지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현실을 맞닥뜨리는 나에겐 충격이다.
배려없는 목회자, 교인, 교회가 결국 높은 철옹성을 쌓고 자기들만의 천국을 만들어가다 보니
세상속에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할 교회가 점점 더 세상과 멀어지는 것이다. 배려는 내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인데, 우리 주님도 그렇게 사셨는데 그 뒤를 따르겠다고 제자임을
자처하는 우리의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그리스도인의 타자성'이라는 기독교 윤리학의 가장
중요한 항목을 글로만 배웠지 도무지 마음과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지독한 자기애에 빠진
우리들의 현실 또한 안타깝다. 물론 나도 여기에 포함된다.
한걸음에 읽고 마지막 장을 넘기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 자신의 반기독교적 이성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그것을 쫒기만 했던 나 자신이 떠올라 고개를 떨군다.
주님은 결코 자신이 가시지 않은 길을 따르라고 하시지 않는다. 이미 걸어가신 그 길을, 이미
이겨 놓으신 그 승리의 길을 따라오라고 걸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한채 여전히
세상의 것을 기웃거리는 나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라고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이 생각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