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6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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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파편화되어 존재하지만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실 한 오라기’처럼 허약하고 미약한 것일지라도 우리를 연결하는 무언가가 사회 속에는 존재한다. 혼란과 위기 상황일수록 그런 연결은 사람들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미래의 전망이 어둡고 불안한 시대일수록 흩어지려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줄 ‘중심’이 필요하다고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소설 <막간>은 이야기한다. 위기를 견뎌낼 힘은 '우리'에 있다고.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소설 <막간>에는 영국 시골 마을에서 연례행사로 치러지는 연극을 중심으로 서사가 펼쳐진다. 연극에서는 영국의 탄생에서부터 1939(소설 속 현재)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단편적인 에피소드의 나열로 재현한다. 소설 속 연극을 하나의 축으로 행사가 진행되는 포인츠 홀에 사는 바트와 루시, 이자와 자일로라는 인물 사이의 대화가 또 한 편의 연극처럼 흘러나온다. 소설의 제목처럼 소설 속 연극의 ‘막간’을 통해 1939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또 하나의 연극처럼 흘러나온다.



버지니아 울프가 이 소설을 쓰던 당시 상황은 히틀러의 도발이 극에 달하고 언제든 전쟁이 터질 거라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동차와 냉장고, 비행기가 등장하면서 삶은 한 단계 나아가는 듯 보였지만 전체주의라는 광기와 폭력의 지배에 사로잡힌 상황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흐리게 했을 것이다. 인간 해방을 전망했지만 실제로 마주할 미래는 문명의 몰락일 거라는 예견 속에 버지니아 울프는 어떤 전망을 제시하고자 했을까. 소설 속 인물들은 반복적으로 자신들 앞에 펼쳐진 ‘전망’을 바라본다. 그 전망은 때로 지속성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내포하다가도 돌연 답답한 무엇, 그래서 허물어지고 새로 쌓아야 할 무언가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렇다, 울프는 어떤 것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망을 바라보았고, 그들이 아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아는 것이 어쩌면 오늘은 다르지 않을까 보려고 말이다. 대부분 똑같았다.

“그것이 전망을 너무도 슬프게 만들어요,” 스위딘 부인이 자일스가 그녀에게 가져다준 접는 의자에 몸을 굽히면서 말했다. “그리고 너무도 아름답게 하지요. 우리가 사라진 다음에도 그들은 저기에 있을 거예요.” 그녀는 먼 들판에 놓여 있는 엷은 안개 조각을 향해 끄덕였다. (53쪽)



소설 <막간> 속에서 펼쳐지는 연극은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역사를 훑으며 인간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마을 사람들 앞에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어 그것이 그들의 손으로 일궈진 것임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저 밖에서 진행되고 있는 폭력적 전쟁에 대해 여기 모인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가담한 건 아니지만 전쟁으로 귀결되는 역사의 흐름에 복무했던 사람들과 동일한 역할을 해왔던 게 아닌가 질문한다. 연극의 마지막, 깨진 거울이 관중을 비춘다. 지금껏 보았던 역사 속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그러니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이다. 급작스레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마주한 관객들은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한다. 왜 부끄러운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황급히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독자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는가,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그가 말한 것을 느꼈어? 우리가 다른 역할을 하지만 동일하다는 것 말이야?”

(…)

“부스러기들, 조각들 그리고 파편들.”

(201쪽)



과학과 기술이 인간을 해방시킬 거라고 전망하던 시대였지만, 부패하고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전쟁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문명의 몰락을 마주하고 있다고 느꼈을 시대, 일군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던 사람들은 ‘부스러기들, 조각들, 파편들’이 되어 존재하며 위선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혈육인 바트와 루시, 부부인 이자와 자일로의 몰이해와 대립이 그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사회적 체면을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들은 일견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어긋난 욕망과 드러나지 않는 비난으로 뒤엉켜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관습적 관계 너머에서 일순간 타인의 내면을 읽고 진실한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연극보다 더 극적으로 보이는 주요 인물들의 독백과 대화는 사회 속에서 맺는 관계가 지닌 허구성을 드러내면서도 각각의 인물들이 욕망하는 대상을 통해 진실한 연결에 대해 갈망하는 인간의 모순적 본성을 보여준다.



실 한 오라기가 그들을 하나로 묶었다. 보였다, 안 보였다, 가을 해뜨기 전 떨리는 칼날 같은 풀잎을 하나로 묶는, 이제는 보였다, 저제는 안 보였다 하는, 그런 실들처럼 말이다.

(56쪽)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삶이 있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길 바라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우리는 다른 이들 속에서 살죠, ……씨. 우리는 사물들 속에서 살아요.”

(68쪽)


“당신은 보이지 않는 줄들을 잡아챘어요,” 늙은 부인이 뜻하고자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클레오파트라를 드러냈어요! 큰 기쁨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아아,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개개의 줄들을 잡아채는 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떠도는 육체들과 떠도는 목소리들을 큰솥에 펄펄 끓여서, 그들 무정형의 덩어리로부터 재-창조된 세계를 떠오르게 만드는 이였다.

(145쪽)


그녀가 상상력으로 -하나를 만드는- 순환성의 여정을 떠났다고 그들은 짐작했다. 양들, 소들, 풀, 나무들, 우리 자신들 -모두가 하나였다. 일치하지 않는다면, 조화를 만들어낸다 –우리에게는 아니라면, 거대한 머리에 부착된 거대한 귀에는 그랬다. 그래서-그녀는 관대하게 미소 지었다-특별한 양, 소, 혹은 인간의 고통은 필요했다, 그래서-그녀는 멀리 있는 금칠한 바람개비를 보면서 천사같이 밝게 미소 지었다-모두가 조화롭다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했다, 우리가 그것을 들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 것이다. 그녀 눈은 이제 하얀 구름 정상에 머물렀다.

(165쪽)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쟁의 임박을 알리는 비행기들이 수시로 떠다니며 극의 흐름을 끊는다. 전쟁의 포화가 눈앞으로 다가온 불안과 혼란 속에서 과거의 역사를 회상하고 공동체의 의미를 되물었던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 '연결', '전체', '전망', 소설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와 의미를 더듬어본다. 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진실된 소통이나 관계 맺음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실 오라기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혼란의 시기일수록 흔들리는 공동체를 모을 수 있는 중심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은 그래서 더욱 필요했으리라.



아파트마다 냉장고가 있어요…… 어머니는 저녁을 주문하는 데만 아침 반나절이 걸렸어요……우리는 열한 명이었어요. 하인들을 포함하면, 가족이 열여덟이에요……이제는 사람들이 간단하게 가게에 전화를 해요……. (…) 우리는 그를 자주 보지 못해요……바로 그런 점 때문에 좋은 거죠,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는 것, 우리 모두가 너무 바쁜 이런 시절에 말이에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거지요. (151쪽)


우리는 여러 무리들을 보았습니다. 제가 잘못 알지 않았다면, 우리는 새롭게 시도한 노력의 결과를 보았어요. (…) 적어도 제게는 우리가 서로에게 속한 구성원들이라는 것을 암시했어요. 각자는 전체의 부분입니다.

(180~181쪽)


우리가 필요한 것은 중심이에요. 우리 모두를 한데 모을 수 있는 어떤 것 말이에요. (…) 나는 사람이 언제나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186~187쪽)



공동체의 의미와 그 속에서 각자의 모습을 돌아보길 바랐던 작가의 의도 속에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찾고자 했던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누군가는 죽음을 향해 가고, (전쟁 속에) 역사와 도시는 부서져 사라지겠지만 눈앞의 자연만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 그럼에도 진실된 ‘현재’는 세대를 넘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 더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어떤 조화 속에서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고 있을 거라는 전망이었을까. 하지만 어디에서도 버지니아 울프의 명시적인 목소리는 발견할 수 없다. 시적이고 은유적인 대사들을 더듬으면서 어떤 ‘변화’에 대한 의지만은 굳건했음을 짐작해보게 된다.



변화가 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사물이 완벽하지 않는 한 말이다, 완벽하다면 그들은 시간을 견디리라 그녀는 추정했다. 하늘은 변함이 없었다.

(164쪽)



소설의 마지막은 이자와 자일로 두 사람의 싸움을 예고하며 끝난다. 현실 속 눈앞에 닥친 싸움(전쟁)을 예견하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싸움을 통해 새 생명의 잉태를 기원하기도 하는 결말은, 모든 것을 부숴내는 전쟁 이후 재건될 새로운 삶과 새로운 미래까지도 희망해보려는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울프 일기>에 보면 <막간>을 쓰는 동안 행복에 잠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소설의 결말에서도 현실에 대한 저항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을 마지막으로 울프는 스스로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막간>이라는 소설이 하나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연극이었듯, 울프의 죽음 또한 그 연극의 장막 속에 있는 듯 기이한 기분에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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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방식 - 수전 손택을 회상하며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홍한별 옮김 / 코쿤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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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전미도서상 수상자(<친구>)인 시그리드 누네즈는 젊은 시절 수전 손택의 일을 도왔던 경험이 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아들 데이비드와 연인이 되기도 했고, 한 동안 셋이 뉴욕의 아파트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그녀는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라는 직업의 멘토로, 그리고 연인의 어머니이자, 우정을 나눈 친구로 손택과 가까이에서 살며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던 한 시절을 회상한다. 그렇게 쓰여진 글이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그 속에는 수전 손택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저자 자신의 작가 지망생 시절 모습과 그 시절 미국 문화계, 작가와 출판계의 간략한 스케치까지 담겨 있다.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어렵다. 무언가를 말한다 해도 거기에 담기는 것은 그 사람의 편린일 뿐이고, 그 작은 조각조차 바라본 이의 의도대로 해석된 편견의 모양일 수 있으니. 그렇기에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면, 특히 그가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 시도는 오해와 비판, 그로인한 후회와 자책이라는 위험까지 감수해야 할테니 말이다.



그런데 시그리드 누네즈가 풀어내는 대상은 20세기 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수전 손택이다. 손택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부담을 이겨내고 최대한 솔직하게,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일을 적어보려 했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 하지만 이름만으로 하나의 아우라를 만든 사람에 대해, 그런데도 이야기해보고 싶은 마음이 그리움과 애정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우리는 같이 앉아 담배를 피우며 한참 이야기했다. 우리가 이렇게 앉아 담배를 피우고 이야기하며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바쁘고 누구보다도 생산적인 사람이 어떻게 늘 이렇게 긴 대화를 할 시간이 있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154~155쪽)




수전 손택 또한 한 명의 인간일 뿐이기에 출중한 면모와 함께 치명적인 단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이란 결코 완벽한 존재도, 완벽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니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뤄낸 성과일 것이다.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한 불우한 어린 시절과 성차별이 심하던 시대적 배경, 이혼 후 홀로 아이를 키워야 했던 어려움, 가난과 작업의 고단함, 혼자있는 걸 견디지 못하며 넘치는 호기심때문에 작가라는 고독한 직업에 걸맞지 않는 성격, 이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넘어서 자기만의 에세이 세계를 구축했고 이름으로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렸으니.



"차갑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여자 악당. 수전에게 전혀 애정을 주지 않았고, 똑똑한 딸을 칭찬해주지도 않았고, 자기한테 똑똑한 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던 사람. “완벽한 성적표를 들고 집에 가면 어머니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냥 사인만 했어. 칭찬이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내 학업에는 관심도 없었지.

나쁜 어머니. 무서운 여인. 아주 인색하기도 했다. “나한테는 동전 한 푼도 안 줬어. 집에서 나와 대학에 간 다음부터는 내 힘으로 다 해야했지. 그때 굶어서 죽었을 수도 있어.” 수전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 이야기를 알고 수전의 원망이 얼마나 깊은지도 알았다. 수전은 자기가 방치된 아이, 아니 아예 버려진 아이였다고 생각했다. 수전은 주로 로지라는 보모 손에 자랐다." (26쪽)



"집안에 지식인은 자기 한 사람뿐이었다. 문화나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전이 쓴 글, 수전이 누리는 명성, 수전의 화려한 경력. 수전의 가족에게는 전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수전의 세계가 그들에게는 외계나 다름없었다." (27쪽)



"나는 수전만큼 예술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열렬히 찬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는 미의 광인이야”라고 수전은 수도 없이 말했다. 그런 한편 수전만큼 자연의 아름다움에 무감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40쪽)



"“여자들한테는 더 힘들어.” 수전이 인정했다. 진지해지고,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가 여자는 더 어렵다고. 수전은 어릴 때 이미 결연하게 마음을 먹었다. 젠더가 걸림돌이 된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자들은 대체로 너무 소심했다. 여자들은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를 겁냈고 너무 똑똑하고 너무 야심 있고 너무 자신 있어 보일까봐 걱정했다. 여자답지 않게 보일까봐 겁냈다. 딱딱하고 냉담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게 보이기를 꺼렸다. 남자처럼 비치는 걸 두려워했다. 여자들이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두려움이었다." (42~43쪽)




시그리드 누네즈는 이 책에서 수전 손택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수전 손택'이라는 이름 뒤에 있는 진짜 '사람'을, 그의 취약함과 함께 보여준다. 그런데도 거기에 담긴 애정 덕분인지 손택의 명성을 훼손하기 보단 그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에 깊이를 더해줄 뿐이다. 한동안은 시그리드 누네즈의 이름 뒤에 '수전 손택'이 떠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실제로 누네즈의 삶에 손택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던 것은 아닐까 생각 해본다. 하지만 에세이에 비해 소설에서는 좋은 평을 받지 못했던 손택과 달리 시그리드 누네즈는 소설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 같으니 괜한 우려인 것 같기도 하고.




"수전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유가 있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전은 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주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늘 나에게 그 주도권을 잡으라고 닦달했다. “다른 사람들이 널 압박하도록 하지 마”라며 나를 압박했다." (79쪽)



“아주 빠르게 썼어. 끝나자마자 잘 됐다는 걸 알았는데 이러기는 처음이야. 알겠지만 보통 어떤 글이든 다 쓰고 나면 쓰레기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거든.” 수전의 말이다.

이런 자신감 결여가 젠더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 자부심 있고 지적 야심이 있는 사람이 여성 해방 이전 시대에 무수한 편견을 맞닥뜨리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짜증나는 일을 얼마나 많이 겪었을지 짐작은 간다(수전이 등장하자마자 깎아내리기부터 했던 사람들이 많다. 노먼 포드호레츠, 메리 매카시, 윌리엄 버클리, 제임스 디키, 필립 라브, 존 사이먼, 어빙 하우 등등). (87~88쪽)



“너 자신을 희생자로 생각하고픈 욕구를 물리쳐야 해.” (수전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을 참지 못했다. 자신을 지키는 보호 장구가 없는 사람을 보면 공격적으로 변했다.) 수전은 여자들이 매저키스트가 되도록 길러진다고 유감스러워했고 여자들이 여기에 저항해야 한다고 했다. 자기 자신은 보통 여자들과 크게 다르지만 그래도 자신에게도 매저키스트 성향이 있음을 느끼고 개탄했다. “나를 원하지 않는 사람한테 안달하는 그로테스크한 면이라든가.” (‘그로테스크’도 수전이 좋아하는 단어였다.)

(100쪽)




누네즈에게 손택과 함께 했던 한 시절은 그녀가 작가로 기반을 닦던 시기 그녀 안에 '날카로운 지성'의 토대를 다지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한 작가의 삶에 또 다른 작가의 삶이 포개어진 지점을 바라보는 일은 독자로서 즐겁고 감동적이다. 그러니 그 시절이 증오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기억으로 남은 것 같아서 다행스럽고, 이렇게 손택의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어 독자로서 고마울 따름이다.



문학과 지성이 그리는 어떤 지도는 사람과 사람을 통해 이어지고 그 길이 지속된다. 수전 손택을 통해 시그리드 누네즈를 알게 되었듯, 이 책을 계기로 시그리드 누네즈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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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니
버지니아 울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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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니>(1938년 출간)는 편지글 형식을 띠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다. <자기만의 방>의 후속편 격으로 여겨지는 이 글에서 화자는 전쟁을 막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구하는 남성 단체의 편지를 받고 이에 대한 답을 세 개의 파트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다. 당시 유럽 사회는 히틀러의 독재로 위기를 맞고 있었고 울프 주변의 많은 이들이 파시즘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전주의자였던 버지니아 울프는 어떤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느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울프는 전쟁을 추동하는 가부장제의 폭압에 저항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른 목소리가 필요함을 <세월>과 <3기니>에 풀어냈다.



<세월>이 버지니아 울프가 경험한 삶과 거기서 얻은 영감과 생각, 가치를 통합하여 그려내면서 미래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했던 노력을 소설로 표출한 시도였다면 <3기니>는 그러한 의도를 사회 구조의 변혁을 요구하는 구체적 목소리로 설파한 에세이다. 본래 <파지터가의 사람들>이라는 하나의 소설에 담아내려했던 두 개의 목소리를, '소설'과 '강연'으로 구분하여 <세월>과 <3기니>로 나누어 엮었다.



<3기니>의 전체 골격은 ‘전쟁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편지에 대한 회신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각 파트에서 펼쳐내는 화자의 주장에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자유를 옹호하는 급진적 여성주의의 목소리와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가 낳은 폐해(전쟁과 독재)를 해결하기 위한 비전과 고민이 담겨있다.



책의 첫번째 파트에서는 전쟁에 대한 혐오를 교육하는데 있어 남성 엘리트 교육이 실패했음을 지적하고 그것과 다른 방식의(여성,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고학력 남성의 딸들’에게 생활비를 버는 것이 왜 중요하며, 돈을 버는 것으로 얻게 되는 자립의 힘을 강조한다. 두번째 파트에서는 여성이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기회는 생겼지만 대다수 고위전문직은 남성들이 독식하고 있으며 보수에 있어서도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비판한다. 또한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성들이 “소유에 대한 집착, 권리에 대한 집착, 호전성, 탐욕”에 갇혀 있음을 지적하며 직업 세계에 발을 담근 여성들이 남성적 가치를 경계해야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글의 화자는 (남성 전문직 종사자들처럼) 탐욕으로 돈의 노예가 되고 재능과 힘을 과시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 가부장제가 세습하는 자부심에 대해 무시할 것을 요구한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직업의 기회가 주어지도록 서로 돕고 애쓸 것을, 남성적 대열에 합류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여성들의 이러한 움직임이 확대되고 사회가 여성에게 적절한 급료를 지급한다면 일의 노예가 되어 있는 남성들의 형편도 달라질 것이라 예측하며 가정과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길 꿈꾼다.



"전문직이 돈을 갖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찾아낸 전문직에 대한 사실들을 감안할 때, 돈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 바람직할까? 부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가르침이 2천 년이 넘게 인간의 삶에서 엄청난 권위를 유지해왔다는 것은 당신도 기억할 것이다.

(…)

너무 부자인 것은 너무 가난한 것과 똑 같은 정도로, 그리고 똑 같은 이유로 나쁘다는 이 증거에 당신도 동의할 것이 아닌가? 너무 부자인 것과 너무 가난한 것이 둘 다 나쁘다면, 그 두 지점 사이의 어딘가에 나쁘지 않은 중간 지점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그 지점은 어디인가?

(…)

우리가 저 대열의 꽁무니를 애써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먼 지평선의 비전을 내다볼 수 있으려면 먼저 이 사실을 살펴보아야 한다." 128~129쪽



세번째 파트에서는 오래된 성적 금기(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생각)를 들춰 내고 남성들의 생각을 고착시키고 강화해 온 사회를 비판한다. 그러한 시선 속에는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사회가 파시즘을 발현시키고 그에 동조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담겨 있으며 가부장제 사회의 압제와 굴종에서 벗어나는 것이 파시즘에 저항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속박에 대한 두려움)과 남성(금기가 깨지고 지배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모두 일종의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데, 그 감정은 깊숙한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화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이 두려움을 깨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유아기 고착이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가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고, 유아기 고착이 왜 생겨나는가와 관련된 설명도 막연한 일반론을 벗어날 수 없다. (…) 남성이 우위에 있다는 통념, 심지어 여성이 열등하다는 통념(여성은 곧 ‘불완전한 남성’이라고 느끼는 잠재의식에서 비롯되는 통념)의 배경에 바로 이런 유아기 고착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 많은 사람들이 여성이 교회의 직분, 그중에서도 특히 성소의 직분을 얻게 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는 사실 자체가 본 논의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거다. 이것을 수치로 여긴다는 것은 불합리한 성적 금기로밖에는 설명될 수 없다." 227쪽


"미스터 젝스 블레이크가 딸에게 원한 것은 아버지인 자신의 수중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아버지인 자기에게 돈을 받는다는 것은 아버지인 자기의 수중에 그대로 있다는 뜻인 반면, 딸이 다른 남자에게 돈을 받는다는 것은 아버지인 자기에게 의지하지 않게 된다는 뜻일 뿐 아니라 다른 남자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238쪽


"이 감정이 이렇게까지 강력해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사회가 유아기 고착을 비호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본성, 법, 자산 이 세가지가 모두 기꺼이 유아기 고착을 양해해주고 은폐해주었습니다.

(…) 사회는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아기 고착이라는 병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243~244쪽



저자의 결론은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이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의 조력이 필수적이며, 기존의 남성적, 가부장적, 독재적 가치관이 지닌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와 수단(아웃 사이더적/여성적 시선과 가치관을 반영한)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지닌 ‘전쟁’이라는 파멸적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기존과 다른 방식의 사고와 언어가 필요한데, 이는 여성들(아웃 사이더)이 가지고 있었던 방식과 가치관에서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모종의 연결,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연결이 존재한다는 것, 공적인 세계와 사적인 세계는 서로 불가분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 어느 한쪽 세계의 압제와 굴종은 곧 다른 한쪽 세계의 압제와 굴종이라는 것을 이 사진은 일러주니까요. (…) 우리 자신 또한 이 형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곧 이 형상이라는 것, 우리는 평생 저항 없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생각과 우리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이 형상을 바꾸어나갈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라는 것을 이 형상은 일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으니, 귀하의 세계와 저희의 세계가 하나로 이어진다는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체들과 무너진 집들이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256쪽


"저희가 귀하의 전쟁 방지 노력에 도움이 될 최선의 방법은, 귀하가 사용하는 말을 반복하고 귀하가 동원하는 수단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을 찾아내고 새로운 수단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귀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귀 단체의 외부에 남아 있으면서 귀 단체의 목적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귀하와 저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한 명 한 명 정의와 평등과 자유라는 대원칙에 따라 존중받을 권리”를 천명하는 것입니다." 258쪽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극명하게 가르는 히틀러 독재는 가부장 독재의 가장 폭력적인 형태이며, 당시 사회와 교육제도가 가부장 독재를 공고히하는 형태를 띠고 있음을 고발하고 파시즘 독재와 전쟁을 막기 위해 가부장 독재를 옹호하는 사회의 구조적 변혁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가정에서의 가부장 독재와 사회 조직 내에서 일부 남성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권력과 부의 편중을 확인하고 여성의 경제적 정치적 입장을 고찰했다. 그리고 지배력 강화와 힘의 과시, 폭력성을 옹호하는 남성주의에 반하는 가치를 여성 사회와 소수집단(아웃 사이더*)에서 찾으려 시도했다.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닌, 남성 사회가 답습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일궈야 함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가 그렇다. 당면한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고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에서 다른 사회, 새로운 언어, 새로운 수단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하며 변화할 것을 제안한다.

(*책에서는 '여성' 또는 '아웃 사이더'라고 명명된 이 집단은 현대적 시각에서 여성을 포함한 모든 소외 계층과 소수 집단으로 바꾸어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3기니>에서 감지되는 버니지아 울프의 여성주의적 시선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또한 과거 가부장제 폭압의 현실과 남성 지배적 사회 구조의 실체, 그 이면에 내포된 남성적 본성과 성적 금기, 그리고 여성의 열악한 상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로서도 의미를 갖는다. 가부장제의 역사 뿐만 아니라 여성 억압의 역사와 여성의 권리(선거권이나 재산권 등)획득과 신장의 과정을 확인하는 일은 현재의 위치를 가늠하고 미래를 예견하는데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러므로 울프의 의견이 근원적 문제 제기에 그치고 해결책에 대한 제안이 모호하거나 낭만적인 방식에 머문다는 아쉬움이 있을지라도, 남성 중심 사회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있어 <3기니>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남성 중심의 사회적 가치가 파시즘과 전쟁이라는 파멸을 향해 달려갈 때 여성주의적, 소수 지향적(아웃 사이더적) 목소리의 필요성, 사회 변화를 위한 새로운 시선과 수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당시에도 의미가 큰 글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사회적 문제-환경 오염, 빈부 격차의 심화, 차별과 혐오, 극단적 폭력 등-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한 세기 전 울프의 제안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서지고 갈라지고 고장난 세계를 치유하고 엮어 줄 힘은 우정을 바탕으로 한 공생과 연대, 보살핌과 돌봄 등 여성적이며 소수 지향적 태도와 가치관에 있지 않을까. 다른 삶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하다. 기존의 경쟁적 파괴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향해 가기 위해 우리 또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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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세월
버지니아 울프 지음, 서진한 옮김 / 참빛나무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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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기터가 사람들>*. 이것은 대단한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 용감하고 모험적이어야 한다. 나는 현대사회의 전모를 드러내고 싶다. 에누리 없이. 사실과 더불어 비전도. 그리고 이 둘을 안데 엮는다. 내 말은 <파도>와 <밤과 낮>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것. 이것이 가능할까?"

(329쪽, <울프 일기> 버지니아 울프, 박희진 옮김, 솔출판사)

* 울프가 <세월>을 구상하던 초기 작품의 제목으로 했던 것인 <파기터가의 사람들>이다. 이후 이 구상에서 '소설' 부분이 <세월>로 '강연' 부분이 <3기니>로 나누어 묶어 냈다.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은1880년부터 1930년에 이르기까지 파기터 가문 사람들의 일대기를 통해 나이 들어가면서 변모하는 인물들의 모습과 더불어 사회 정치 경제적 환경의 변화까지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소설은 파지터 가문의 맏딸 엘리너, 그녀가 스물 두 살이던 시절 병든 어머니가 있는 집안의 풍경과 어머니의 죽음을 다루며 시작된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 속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삶이 쌓여있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가는 인물의 모습을 보면 삶이란 이렇게 흘러가버리고 마는 건가 싶어 허무해지다가도 인물들이 머무는 어떤 순간들에 반짝하고 비어드는 진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삶은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쉼없이 흘러가지만 그 과정에서는 인생의 시기마다 일구어지는 의미가 있고, 주변 인물들, 다른 세대와의 연결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고 확장되기도 한다고 버지니아 울프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삶이란 흘러가버리고 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향해, 매듭 짓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소설의 바탕에는 부모님의 죽음, 형제 자매의 성장과 결혼, 전쟁의 경험 등 버지니아 울프 자신의 가족사와 자전적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인지 <출항>에서부터 <밤과 낮>, <제이콥의 방>, <댈러웨이 부인> 그리고 <등대로>에 등장했던 인물과 서사가 합쳐져 하나의 무대 위에서 각색되어 펼쳐지는 듯 하다. 그만큼 긴 시간을 아우르며, 삶의 면면을 차곡차곡 담아낸 작품이라 이전 작품의 편린이 모여 하나의 책에 집대성되어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전작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졌던 순간의 의미, 나이듦과 쇠락해가는 삶의 의미, 진실한 의사소통과 타인에 대한 이해, 언어로 표현하는 일의 한계 등, 중년을 넘어선 울프가 평생 던졌던 질문과 생각, 가치관이 응축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녀가 홑이불 속에서 몸을 쭉 펴고 누워 있을 때, 뭔가가 그녀 곁을 스쳐지나가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풍경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이요, 변화하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250쪽


"그의 생활은 끝이 났으나 그녀의 생활은 시작되고 있었다. 아니야, 난 다른 집에 살 의향이 없어. 다른 집은 아니야, 천장의 얼룩을 쳐다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다시금 부드럽게 파도를 헤쳐 가는 배와 철로 위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기차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모든 것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모든 건 지나가고 변화한다고.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지? 어디로? 어디로…?"

252쪽



<세월> 의 후반부에 다다르면, 소설 속 ‘현재’가 등장하고 스물 두살이었던 엘리너는 칠순이 되어 있다. 여기서는 칠순이 넘은 그녀와 그녀의 조카인 페기와 노스가 각각 삶과 사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교차하면서 그려진다. 특히 엘리너와 조카 패기, 사라와 노스의 대화 부분은 희곡적이면서, 영화적 분위기를 자아내 몰입도를 높인다. 세대가 다른 각 인물이 서로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타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해 불가능이라는 장벽을 놓고도 서로를 알고자 열망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희망적으로 다가온다. 



단편적인 대화 속에서도 젊음과 노년에 대한 대비를 통해 삶의 의미를 묻고 인물들 각자의 생각 속을 떠돌며 흘러나오는 독백을 통해 인간 사회의 소통 불능이나 언어의 한계에 대해 통찰하려는 울프의 목소리가 느껴진다. 전작들에서처럼 울프는 후반부에 이르러,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이야기를 절정에 올려 놓고 출렁이게 한다. 소설의 중반부에 흩뿌려놓은 소재들이 재등장하고 하나로 연결되면서 울림을 만든다. 어김없지 순간 속에 스쳐가는 번뜩이는 찰나, 거기에 깃든 진실을 놓치지 않고 수려한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른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알 수 있겠는가….

그는 말을 멈추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이야기되었던 내용들인데도 정확하게 기억해내기가 어려웠다.

373쪽


“그녀는 어디서 시작하고 나는 어디서 끝나는 거지?"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은 계속 달렸다. 그들은 두 명의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고, 런던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두 개의 삶의 섬광이 두 개의 육체에 에워싸여 있었다. 두 개의 분리된 육신으로 둘러싸인 저들 삶의 섬광들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다고, 영화관 앞을 지나가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그녀가 풀기에는 너무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그녀는 한숨을 지었다.

“너는 그런 걸 느끼기에는 너무 젊어.”

엘리너가 말했다.

402쪽




소설의 끝에서 '마지막 파티' 장면이 길게 이어진다. 파기터 집안의 사람들이 모인 파티에서는 끝없이 대화가 이어진다. 지루하게 늘어져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는 부분인데 의도했다는 듯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말은 끊어지기 일쑤고, 서로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말은 뚜렷한 의미를 찾지 못하고 흩어져버리거나 완결되지 못한 채 중단된다. 인물들은 대화 중에도 자기만의 독백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면 한 무리의 사람들을 연결한 희미한 선이 보이고, 옅은 행복과 희망의 기운마저 감지하게 된다. 개개인은 각자의 내면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규정하기도 어려운 미지의 일면을 가지고 있지만 일순간 표면으로 떠오른 조각들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듯. 그렇기에 엘리너는 자신 앞에 '끝없는 어둠'(죽음)이 계속될 거라고 예상하면서도 페기와 노스 등, 젊은 세대를 바라보며 '지금 이 방 안'에 '다른 삶'(미래)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거기에는 또 다른 삶이 있었음이 분명해, 의자 속으로 몸을 움츠리면서 그녀는 화가 나서 생각했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사람들이 있는 이 방 안에. 그녀는 마치 자신이 머리를 뒤로 휘날리면서 벼랑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달아나려는 무엇인가를 막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거기에는 뭔가 다른 삶이 있었음이 분명해. 그녀는 되풀이했다. 그것은 너무 짧고, 너무 부서져버렸어.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심지어 우리 자신들에 관해서도. 우리는 다만 여기저기를 이해하기 시작한 거야. 그녀는 로즈가 손을 귀에다 갖다대는 것처럼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감싸쥐었다. 그녀는 손을 감싼 채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현재의 순간을 보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순간이 머무르도록,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지금 이 순간을 더욱 더 가득 채우고 싶었다. 그것이 깊은 이해와 더불어 빛나며, 완전하게, 밝게 될 때까지."

534쪽



소설의 후반부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나름대로 세계와 미래에 대한 관점, 비전을 제시하고자 애썼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장년의 노스와 페기를 통해 돈과 정치에만 몰두하는 사람들,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어떤 결핍과 위선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드러내면서도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노년의 엘리너의 입을 빌어 평범하지만 선량한 사람들의 미래를 낙관한다. 인물들의 독백과 대화를 통해 '다른 삶', '다른 세상', '다른 말',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한다. 결말 부분의 노래하는 아이들이 지닌 ‘시끄러우면서도 무서운 힘’이나 꽃다발 속에 하나로 엮인 여러 가지 꽃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움, 태양이 떠올라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새벽 거리에서 미래를 낙관하고 비전을 품어보려는 버지니아 울프의 시선을 느끼게 된다.



“사는 대신에, 삶과는 다르게, 다르게….”

그녀는 말을 멈췄다. 거기에는 아직도 그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단지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아주 단편적으로 표출했고, 그리고 노스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 앞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보았던 그것, 그녀가 말하지 못한 그것이 남아 있었다. 480쪽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는 의아했다. 나, 의례를 의심하고, 종교도 없고, 남자라고 말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그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나는? 그는 생각을 멈추었다. 그의 손에는 잔이 들려 있었고, 그의 마음 속에는 문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문장들을 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생각했다. 그는 손에 비단손수건을 들고 안자 있는 엘리너를 바라보았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단단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하면서? 508쪽


진실한 것은 그녀의 말이 아니라 얼굴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그에게 와 닿았다. 다르게, 다르게 산다. 진실로 이야기하자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

“누나가 말한 것은 진실이야. 정확히 진실이야.”

그가 불쑥 말했다. 그녀가 의미했던 것이, 말이 아니라 그녀의 감정이 진실이라고, 그는 스스로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이제 그는 그녀의 감정을 느꼈다.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관한, 새로운 세상, 다른 세상에 관한, 삼촌은 머리 위에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527쪽




울프가 제시하고자 했던 '다른 삶', '다르게 사는 것'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여성이 경제력을 획득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결혼'만이 답이 아니며 저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을 꾸려가는 자유로운 삶일까. 돈과 정치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판에 박힌 시선에서 벗어나 의미있는 일에 헌신하는 삶일까. <세월> 속에는 '다른 삶'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제시되지 않는다. (참고로 이에 대한 의견은 <3기니>에서 들을 수 있다.) 다만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 노스와 페기의 대화, 그리고 엘리너의 독백을 통해 암시할 뿐. 엘리너는 "현재의 순간이 머무르도록,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지금 이 순간을 더욱 더 가득 채우"려 하고, 노스와 페기는 서로의 얼굴에서 '진실한 것'을 찾으며, 진실을 말하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일 테고,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깊은 이해와 더불어 빛나며, 완전하게, 밝게" 된다면, 거기에서 '다른 삶', 즉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싹 틀 거라고, 울프의 메시지를 해석해본다.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채워진 '지금 이 순간'에 있다고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 시도를 할 만큼 힘겹게 써 내려갔던 소설 <세월>. 그 속에는 지난 삶의 궤적을 훑고 거기서 길어올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했던 노력이 담겨 있다. 진정한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물었던 <밤과 낮>과 죽음을 전제로한 삶은 유한하지만 세대를 넘어 지속되는 관계를 통해 영속성을 얻는다고 노래했던 <파도>가 <세월>이라는 책 한 권에 녹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내 앞에는 막 피어나는 삶을 사는 어린 딸이 있고, 늙어가는 엄마가 있다. 중년에 접어든 나와 남편의 삶도 있고. 중년을 맞는 나의 마음에는 우리가 의도치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어떤 순간에 다다랐다는 당혹스러움과 안타까움이 크지만, 순리대로 흘러갈 수 밖에 없는 이 삶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의연함도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변화를 경험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울프의 소설을 읽으며 삶과 시간의 흐름을 더듬어 보는 사이, 끝없이 변화하며 다가오는 삶의 물살에 천천히 숨을 고르며 발을 담글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 것도 같다. 비록 그 끝에 죽음이 있을지라도 밀어내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숙이, 더 온전하게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겠다고. 그래서 순간의 진실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애 써야겠다는 마음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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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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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접종을 위해 병원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나이가 지긋한 남성분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빨리 맞으려고 일찍 왔는데 시간이 되어야 맞을 수 있다며 기다리게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 말에 상대편에서 뭐라고 했는지 돌연 화를 내며 상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일순간 몸이 움츠러들었고 조심스레 자리를 옮겼다.


폭력은 힘이 세다. 약한 이들을 겁먹게 하고 복종하게 하니까. 하지만 상처를 내고 미움을 싹트게 한다. 상처와 미움이 쌓이면 증오가 되고 증오는 복수의 칼을 갈게 한다. 폭력은 그렇게 폭력을 부른다. 그래서 폭력은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누군가 폭력성을 드러내면 우리는 그를 경계하고 거리를 둔다. 반면 다정함은 어떤가. 다정함은 우리를 가깝게 해 준다. 다정한 말엔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고 애정 어린 행동에는 손을 내밀고 몸을 맡기고 싶어 지니까.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에서 우리가 다정함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음을, 다정한 종이 더 생존에 우세했음을 이야기한다. 낯선 침팬지에게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침팬지는 서로를 공격해 해를 가하고 이는 죽임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반면 낯선 보노보에게 더 우호적으로 행동하는 보노보는 친화력을 이용해 번식력과 생존력을 높여왔음을 보여준다.


보노보는 처음 보는 보노보에게 털을 쓰다듬으며 친근함을 표시하고 먹이를 나누어 주면서 스스럼없이 무리에 끼어 준다. 특히 친화력이 높은 암컷 보노보는 다정한 수컷을 더 선호하는 방식으로 수컷들에게도 다정함을 전파시키고, 서로 협력하고 보호하는 방식의 집단 분위기가 형성되도록 이끌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지만, 그들을 그냥 참고 견뎌주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서로 돕는다. 장기를 기증하는 큰 친절도, 누군가 길 건너는 것을 도와주는 작은 친절도.”

159쪽,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인간 또한 탁월한 친화력으로 지구 상에서 우위를 점하고 번성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살피며 ‘가족’이라는 집단을 이루어 살아간다. 혈연관계로 맺어지지 않은 사회 속에서도 서로에게 크고 작은 친절을 베풀고,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우리가 침팬지처럼 공격적 성향만 지녔다면 날마다 다툼이 끊이지 않았을 테지만, 우리는 대체로 보노보처럼 가까운 이들에게 친근함을 표현하면서 서로 돕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무엇보다 평온하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선호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몸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은 공감 능력을 상승시키고 타인의 감정을 더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돕는다. 세로토닌의 분비는 두개골과 얼굴 형태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쳐 ‘여성형’ 얼굴로 진화하게 했다. 우리 눈의 하얀 공막은 눈 맞춤을 통해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고 이해와 친화력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이렇듯 인간은 친화력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으며 유대와 협력, 긴밀한 의사소통을 발달시켜왔다.


하지만 우리의 탁월한 친화력은 극악무도한 잔인성으로 바뀌기도 한다. 아기를 분만할 때 엄마 몸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은 아기를 보호하게 하지만 누군가 아기를 위협한다고 느낄 때 분노를 솟구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더 강렬하게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집단이 위협받을 때, 사람은 더 큰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다. 타자에게 친절한 “우리 종의 특성은 보노보와 일치하지만 사람의 경우 이 친절함은 특정 타인에게만 해당되고 그렇지 않은 타인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공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187쪽)고 저자는 말한다. 즉 우리의 친절한 본성은 아이러니하게도 폭력과 잔인함으로 뒤바뀔 수 있는 잠재력 또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르치지 않아도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선호하는 대신 다른 이들을 경계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만드는 편견을 갖기도 한다. 인간이더라도 자신과 조금 다른 모습, 익숙지 않은 타인에게 불편함을 느끼는 ‘불쾌한 골짜기’가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쾌한 골짜기’는 누군가를 ‘비인간화’하는 편견을 만들고 ‘비인간화’한 대상에겐 무자비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걸 용인한다. 이러한 공격성은 개인보다 집단으로 작용할 때 더 강력해진다. 따라서 우리의 어두운 본성을 길들이기 위해 기술의 발전을 선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인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타인을 비인간화하며 차별과 억압을 행했던 과거 사회 정치적 환경을 돌아보며 폭력적 저항보다 평화적인 노력이 동반될 때 내구력 있는 변화가 가능했음을 저자는 보여준다. 또한 이질적 집단 간 접촉을 늘리는 것이 서로에 대한 친밀감을 상승시켜 주고 다른 집단, 낯선 타인에게 노출되는 빈도가 증가할수록 관용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사회 환경, 제도, 시스템이 관용을 베푸는 방향으로 작동될 때 그 안의 개인들도 관용을 베풀 수 있으며 “두려움 없이 낯선 타인을 만날 수 있고 무례하지 않게 반대 의견을 내고, 자신과 닮지 않은 사람들과도 친구가”(284쪽) 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300쪽,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 더 많은 친구를 만드는 능력이었다는 저자의 결론은 희망적이다. 환경오염과 기후 재난, 질병과 가난의 위협이라는 현실 속에서 위기가 심화되면 갈등과 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걱정을 잠재우기 어렵다. 그런데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서로가 적이 되는 방식이 아니라 나누고 보살피며 손잡아주는 친구가 되는 방식이라고 이 책은 알려주고 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출생 후 빠르게 자립할 수 있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 아기는 수년 동안 엄마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며 인간은 무리를 지어 협력하며 살아갈 때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적일 수 있다. 타인의 존재가 필수적인 우리가 서로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비결은 다정함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폭력은 서로를 멀어지게 하지만 다정함은 우리를 더 가깝게 해 준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려는 연민의 감정이 없다면 인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는 이근화 시인의 말처럼, 우리를 사람이게 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손을 내밀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마음을 기울이는 데 있다. 서로에게 친구가 되겠다는 이 마음이 우리를 위태로운 지구에서 살아남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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