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사는 방식 - 수전 손택을 회상하며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홍한별 옮김 / 코쿤북스 / 2021년 5월
평점 :
2018년 전미도서상 수상자(<친구>)인 시그리드 누네즈는 젊은 시절 수전 손택의 일을 도왔던 경험이 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아들 데이비드와 연인이 되기도 했고, 한 동안 셋이 뉴욕의 아파트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그녀는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라는 직업의 멘토로, 그리고 연인의 어머니이자, 우정을 나눈 친구로 손택과 가까이에서 살며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던 한 시절을 회상한다. 그렇게 쓰여진 글이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그 속에는 수전 손택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저자 자신의 작가 지망생 시절 모습과 그 시절 미국 문화계, 작가와 출판계의 간략한 스케치까지 담겨 있다.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어렵다. 무언가를 말한다 해도 거기에 담기는 것은 그 사람의 편린일 뿐이고, 그 작은 조각조차 바라본 이의 의도대로 해석된 편견의 모양일 수 있으니. 그렇기에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면, 특히 그가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 시도는 오해와 비판, 그로인한 후회와 자책이라는 위험까지 감수해야 할테니 말이다.
그런데 시그리드 누네즈가 풀어내는 대상은 20세기 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수전 손택이다. 손택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부담을 이겨내고 최대한 솔직하게,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일을 적어보려 했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 하지만 이름만으로 하나의 아우라를 만든 사람에 대해, 그런데도 이야기해보고 싶은 마음이 그리움과 애정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우리는 같이 앉아 담배를 피우며 한참 이야기했다. 우리가 이렇게 앉아 담배를 피우고 이야기하며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바쁘고 누구보다도 생산적인 사람이 어떻게 늘 이렇게 긴 대화를 할 시간이 있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154~155쪽)
수전 손택 또한 한 명의 인간일 뿐이기에 출중한 면모와 함께 치명적인 단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이란 결코 완벽한 존재도, 완벽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니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뤄낸 성과일 것이다.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한 불우한 어린 시절과 성차별이 심하던 시대적 배경, 이혼 후 홀로 아이를 키워야 했던 어려움, 가난과 작업의 고단함, 혼자있는 걸 견디지 못하며 넘치는 호기심때문에 작가라는 고독한 직업에 걸맞지 않는 성격, 이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넘어서 자기만의 에세이 세계를 구축했고 이름으로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렸으니.
"차갑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여자 악당. 수전에게 전혀 애정을 주지 않았고, 똑똑한 딸을 칭찬해주지도 않았고, 자기한테 똑똑한 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던 사람. “완벽한 성적표를 들고 집에 가면 어머니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냥 사인만 했어. 칭찬이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내 학업에는 관심도 없었지.
나쁜 어머니. 무서운 여인. 아주 인색하기도 했다. “나한테는 동전 한 푼도 안 줬어. 집에서 나와 대학에 간 다음부터는 내 힘으로 다 해야했지. 그때 굶어서 죽었을 수도 있어.” 수전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 이야기를 알고 수전의 원망이 얼마나 깊은지도 알았다. 수전은 자기가 방치된 아이, 아니 아예 버려진 아이였다고 생각했다. 수전은 주로 로지라는 보모 손에 자랐다." (26쪽)
"집안에 지식인은 자기 한 사람뿐이었다. 문화나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전이 쓴 글, 수전이 누리는 명성, 수전의 화려한 경력. 수전의 가족에게는 전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수전의 세계가 그들에게는 외계나 다름없었다." (27쪽)
"나는 수전만큼 예술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열렬히 찬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는 미의 광인이야”라고 수전은 수도 없이 말했다. 그런 한편 수전만큼 자연의 아름다움에 무감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40쪽)
"“여자들한테는 더 힘들어.” 수전이 인정했다. 진지해지고,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가 여자는 더 어렵다고. 수전은 어릴 때 이미 결연하게 마음을 먹었다. 젠더가 걸림돌이 된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자들은 대체로 너무 소심했다. 여자들은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를 겁냈고 너무 똑똑하고 너무 야심 있고 너무 자신 있어 보일까봐 걱정했다. 여자답지 않게 보일까봐 겁냈다. 딱딱하고 냉담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게 보이기를 꺼렸다. 남자처럼 비치는 걸 두려워했다. 여자들이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두려움이었다." (42~43쪽)
시그리드 누네즈는 이 책에서 수전 손택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수전 손택'이라는 이름 뒤에 있는 진짜 '사람'을, 그의 취약함과 함께 보여준다. 그런데도 거기에 담긴 애정 덕분인지 손택의 명성을 훼손하기 보단 그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에 깊이를 더해줄 뿐이다. 한동안은 시그리드 누네즈의 이름 뒤에 '수전 손택'이 떠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실제로 누네즈의 삶에 손택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던 것은 아닐까 생각 해본다. 하지만 에세이에 비해 소설에서는 좋은 평을 받지 못했던 손택과 달리 시그리드 누네즈는 소설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 같으니 괜한 우려인 것 같기도 하고.
"수전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유가 있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전은 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주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늘 나에게 그 주도권을 잡으라고 닦달했다. “다른 사람들이 널 압박하도록 하지 마”라며 나를 압박했다." (79쪽)
“아주 빠르게 썼어. 끝나자마자 잘 됐다는 걸 알았는데 이러기는 처음이야. 알겠지만 보통 어떤 글이든 다 쓰고 나면 쓰레기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거든.” 수전의 말이다.
이런 자신감 결여가 젠더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 자부심 있고 지적 야심이 있는 사람이 여성 해방 이전 시대에 무수한 편견을 맞닥뜨리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짜증나는 일을 얼마나 많이 겪었을지 짐작은 간다(수전이 등장하자마자 깎아내리기부터 했던 사람들이 많다. 노먼 포드호레츠, 메리 매카시, 윌리엄 버클리, 제임스 디키, 필립 라브, 존 사이먼, 어빙 하우 등등). (87~88쪽)
“너 자신을 희생자로 생각하고픈 욕구를 물리쳐야 해.” (수전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을 참지 못했다. 자신을 지키는 보호 장구가 없는 사람을 보면 공격적으로 변했다.) 수전은 여자들이 매저키스트가 되도록 길러진다고 유감스러워했고 여자들이 여기에 저항해야 한다고 했다. 자기 자신은 보통 여자들과 크게 다르지만 그래도 자신에게도 매저키스트 성향이 있음을 느끼고 개탄했다. “나를 원하지 않는 사람한테 안달하는 그로테스크한 면이라든가.” (‘그로테스크’도 수전이 좋아하는 단어였다.)
(100쪽)
누네즈에게 손택과 함께 했던 한 시절은 그녀가 작가로 기반을 닦던 시기 그녀 안에 '날카로운 지성'의 토대를 다지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한 작가의 삶에 또 다른 작가의 삶이 포개어진 지점을 바라보는 일은 독자로서 즐겁고 감동적이다. 그러니 그 시절이 증오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기억으로 남은 것 같아서 다행스럽고, 이렇게 손택의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어 독자로서 고마울 따름이다.
문학과 지성이 그리는 어떤 지도는 사람과 사람을 통해 이어지고 그 길이 지속된다. 수전 손택을 통해 시그리드 누네즈를 알게 되었듯, 이 책을 계기로 시그리드 누네즈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