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세월
버지니아 울프 지음, 서진한 옮김 / 참빛나무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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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기터가 사람들>*. 이것은 대단한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 용감하고 모험적이어야 한다. 나는 현대사회의 전모를 드러내고 싶다. 에누리 없이. 사실과 더불어 비전도. 그리고 이 둘을 안데 엮는다. 내 말은 <파도>와 <밤과 낮>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것. 이것이 가능할까?"

(329쪽, <울프 일기> 버지니아 울프, 박희진 옮김, 솔출판사)

* 울프가 <세월>을 구상하던 초기 작품의 제목으로 했던 것인 <파기터가의 사람들>이다. 이후 이 구상에서 '소설' 부분이 <세월>로 '강연' 부분이 <3기니>로 나누어 묶어 냈다.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은1880년부터 1930년에 이르기까지 파기터 가문 사람들의 일대기를 통해 나이 들어가면서 변모하는 인물들의 모습과 더불어 사회 정치 경제적 환경의 변화까지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소설은 파지터 가문의 맏딸 엘리너, 그녀가 스물 두 살이던 시절 병든 어머니가 있는 집안의 풍경과 어머니의 죽음을 다루며 시작된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 속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삶이 쌓여있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가는 인물의 모습을 보면 삶이란 이렇게 흘러가버리고 마는 건가 싶어 허무해지다가도 인물들이 머무는 어떤 순간들에 반짝하고 비어드는 진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삶은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쉼없이 흘러가지만 그 과정에서는 인생의 시기마다 일구어지는 의미가 있고, 주변 인물들, 다른 세대와의 연결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고 확장되기도 한다고 버지니아 울프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삶이란 흘러가버리고 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향해, 매듭 짓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소설의 바탕에는 부모님의 죽음, 형제 자매의 성장과 결혼, 전쟁의 경험 등 버지니아 울프 자신의 가족사와 자전적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인지 <출항>에서부터 <밤과 낮>, <제이콥의 방>, <댈러웨이 부인> 그리고 <등대로>에 등장했던 인물과 서사가 합쳐져 하나의 무대 위에서 각색되어 펼쳐지는 듯 하다. 그만큼 긴 시간을 아우르며, 삶의 면면을 차곡차곡 담아낸 작품이라 이전 작품의 편린이 모여 하나의 책에 집대성되어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전작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졌던 순간의 의미, 나이듦과 쇠락해가는 삶의 의미, 진실한 의사소통과 타인에 대한 이해, 언어로 표현하는 일의 한계 등, 중년을 넘어선 울프가 평생 던졌던 질문과 생각, 가치관이 응축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녀가 홑이불 속에서 몸을 쭉 펴고 누워 있을 때, 뭔가가 그녀 곁을 스쳐지나가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풍경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이요, 변화하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250쪽


"그의 생활은 끝이 났으나 그녀의 생활은 시작되고 있었다. 아니야, 난 다른 집에 살 의향이 없어. 다른 집은 아니야, 천장의 얼룩을 쳐다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다시금 부드럽게 파도를 헤쳐 가는 배와 철로 위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기차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모든 것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모든 건 지나가고 변화한다고.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지? 어디로? 어디로…?"

252쪽



<세월> 의 후반부에 다다르면, 소설 속 ‘현재’가 등장하고 스물 두살이었던 엘리너는 칠순이 되어 있다. 여기서는 칠순이 넘은 그녀와 그녀의 조카인 페기와 노스가 각각 삶과 사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교차하면서 그려진다. 특히 엘리너와 조카 패기, 사라와 노스의 대화 부분은 희곡적이면서, 영화적 분위기를 자아내 몰입도를 높인다. 세대가 다른 각 인물이 서로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타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해 불가능이라는 장벽을 놓고도 서로를 알고자 열망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희망적으로 다가온다. 



단편적인 대화 속에서도 젊음과 노년에 대한 대비를 통해 삶의 의미를 묻고 인물들 각자의 생각 속을 떠돌며 흘러나오는 독백을 통해 인간 사회의 소통 불능이나 언어의 한계에 대해 통찰하려는 울프의 목소리가 느껴진다. 전작들에서처럼 울프는 후반부에 이르러,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이야기를 절정에 올려 놓고 출렁이게 한다. 소설의 중반부에 흩뿌려놓은 소재들이 재등장하고 하나로 연결되면서 울림을 만든다. 어김없지 순간 속에 스쳐가는 번뜩이는 찰나, 거기에 깃든 진실을 놓치지 않고 수려한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른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알 수 있겠는가….

그는 말을 멈추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이야기되었던 내용들인데도 정확하게 기억해내기가 어려웠다.

373쪽


“그녀는 어디서 시작하고 나는 어디서 끝나는 거지?"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은 계속 달렸다. 그들은 두 명의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고, 런던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두 개의 삶의 섬광이 두 개의 육체에 에워싸여 있었다. 두 개의 분리된 육신으로 둘러싸인 저들 삶의 섬광들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다고, 영화관 앞을 지나가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그녀가 풀기에는 너무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그녀는 한숨을 지었다.

“너는 그런 걸 느끼기에는 너무 젊어.”

엘리너가 말했다.

402쪽




소설의 끝에서 '마지막 파티' 장면이 길게 이어진다. 파기터 집안의 사람들이 모인 파티에서는 끝없이 대화가 이어진다. 지루하게 늘어져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는 부분인데 의도했다는 듯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말은 끊어지기 일쑤고, 서로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말은 뚜렷한 의미를 찾지 못하고 흩어져버리거나 완결되지 못한 채 중단된다. 인물들은 대화 중에도 자기만의 독백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면 한 무리의 사람들을 연결한 희미한 선이 보이고, 옅은 행복과 희망의 기운마저 감지하게 된다. 개개인은 각자의 내면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규정하기도 어려운 미지의 일면을 가지고 있지만 일순간 표면으로 떠오른 조각들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듯. 그렇기에 엘리너는 자신 앞에 '끝없는 어둠'(죽음)이 계속될 거라고 예상하면서도 페기와 노스 등, 젊은 세대를 바라보며 '지금 이 방 안'에 '다른 삶'(미래)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거기에는 또 다른 삶이 있었음이 분명해, 의자 속으로 몸을 움츠리면서 그녀는 화가 나서 생각했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사람들이 있는 이 방 안에. 그녀는 마치 자신이 머리를 뒤로 휘날리면서 벼랑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달아나려는 무엇인가를 막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거기에는 뭔가 다른 삶이 있었음이 분명해. 그녀는 되풀이했다. 그것은 너무 짧고, 너무 부서져버렸어.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심지어 우리 자신들에 관해서도. 우리는 다만 여기저기를 이해하기 시작한 거야. 그녀는 로즈가 손을 귀에다 갖다대는 것처럼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감싸쥐었다. 그녀는 손을 감싼 채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현재의 순간을 보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순간이 머무르도록,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지금 이 순간을 더욱 더 가득 채우고 싶었다. 그것이 깊은 이해와 더불어 빛나며, 완전하게, 밝게 될 때까지."

534쪽



소설의 후반부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나름대로 세계와 미래에 대한 관점, 비전을 제시하고자 애썼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장년의 노스와 페기를 통해 돈과 정치에만 몰두하는 사람들,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어떤 결핍과 위선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드러내면서도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노년의 엘리너의 입을 빌어 평범하지만 선량한 사람들의 미래를 낙관한다. 인물들의 독백과 대화를 통해 '다른 삶', '다른 세상', '다른 말',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한다. 결말 부분의 노래하는 아이들이 지닌 ‘시끄러우면서도 무서운 힘’이나 꽃다발 속에 하나로 엮인 여러 가지 꽃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움, 태양이 떠올라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새벽 거리에서 미래를 낙관하고 비전을 품어보려는 버지니아 울프의 시선을 느끼게 된다.



“사는 대신에, 삶과는 다르게, 다르게….”

그녀는 말을 멈췄다. 거기에는 아직도 그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단지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아주 단편적으로 표출했고, 그리고 노스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 앞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보았던 그것, 그녀가 말하지 못한 그것이 남아 있었다. 480쪽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는 의아했다. 나, 의례를 의심하고, 종교도 없고, 남자라고 말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그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나는? 그는 생각을 멈추었다. 그의 손에는 잔이 들려 있었고, 그의 마음 속에는 문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문장들을 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생각했다. 그는 손에 비단손수건을 들고 안자 있는 엘리너를 바라보았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단단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하면서? 508쪽


진실한 것은 그녀의 말이 아니라 얼굴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그에게 와 닿았다. 다르게, 다르게 산다. 진실로 이야기하자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

“누나가 말한 것은 진실이야. 정확히 진실이야.”

그가 불쑥 말했다. 그녀가 의미했던 것이, 말이 아니라 그녀의 감정이 진실이라고, 그는 스스로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이제 그는 그녀의 감정을 느꼈다.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관한, 새로운 세상, 다른 세상에 관한, 삼촌은 머리 위에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527쪽




울프가 제시하고자 했던 '다른 삶', '다르게 사는 것'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여성이 경제력을 획득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결혼'만이 답이 아니며 저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을 꾸려가는 자유로운 삶일까. 돈과 정치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판에 박힌 시선에서 벗어나 의미있는 일에 헌신하는 삶일까. <세월> 속에는 '다른 삶'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제시되지 않는다. (참고로 이에 대한 의견은 <3기니>에서 들을 수 있다.) 다만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 노스와 페기의 대화, 그리고 엘리너의 독백을 통해 암시할 뿐. 엘리너는 "현재의 순간이 머무르도록,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지금 이 순간을 더욱 더 가득 채우"려 하고, 노스와 페기는 서로의 얼굴에서 '진실한 것'을 찾으며, 진실을 말하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일 테고,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깊은 이해와 더불어 빛나며, 완전하게, 밝게" 된다면, 거기에서 '다른 삶', 즉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싹 틀 거라고, 울프의 메시지를 해석해본다.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채워진 '지금 이 순간'에 있다고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 시도를 할 만큼 힘겹게 써 내려갔던 소설 <세월>. 그 속에는 지난 삶의 궤적을 훑고 거기서 길어올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했던 노력이 담겨 있다. 진정한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물었던 <밤과 낮>과 죽음을 전제로한 삶은 유한하지만 세대를 넘어 지속되는 관계를 통해 영속성을 얻는다고 노래했던 <파도>가 <세월>이라는 책 한 권에 녹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내 앞에는 막 피어나는 삶을 사는 어린 딸이 있고, 늙어가는 엄마가 있다. 중년에 접어든 나와 남편의 삶도 있고. 중년을 맞는 나의 마음에는 우리가 의도치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어떤 순간에 다다랐다는 당혹스러움과 안타까움이 크지만, 순리대로 흘러갈 수 밖에 없는 이 삶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의연함도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변화를 경험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울프의 소설을 읽으며 삶과 시간의 흐름을 더듬어 보는 사이, 끝없이 변화하며 다가오는 삶의 물살에 천천히 숨을 고르며 발을 담글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 것도 같다. 비록 그 끝에 죽음이 있을지라도 밀어내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숙이, 더 온전하게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겠다고. 그래서 순간의 진실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애 써야겠다는 마음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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