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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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언제나, 사람들이 여러 가지 면과 선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고 매일매일 흔들린다는 걸 아는 사람들 쪽으로 흐른다. 나는 우리가 어딘가로 향해 나아갈 때, 우리의 궤적은 일정한 보폭으로 이루어진 단호한 행진의 걸음이 아니라 앞으로 갔다 멈추고 심지어 때로는 뒤로 가기도 하는 춤의 스텝을 닮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만 아주 천천히 나아간다고.”

72쪽 백수린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창비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갈등하고 번민하는 사람이다. 오늘은 이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내일이면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으며 매번 흔들린다. 이토록 불완전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다들 자기만 아는 부족함을 끌어안은 채 날마다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런 내게 백수린 작가의 문장은 더없이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소설가 백수린의 에세이집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에는 작가의 작지만 커다란 삶이 담겨 있다. 작가는 재개발 위기에 처한 동네에서 낡고 오래된 것들에 애정을 쏟으며 살아간다. 창이 있는 작은 단독 주택에서, 동네의 좁은 길을 걸으며 계절이 오가는 걸 다정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봉봉이라는 나이 들고 병든 개와 함께 살며 생명 있는 모든 것의 고유한 가치를 알아간다.



그녀는 담벼락을 나란히 한 이웃과 음식과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한 동네에 살게 된 이모, 언니와 도탑게 온기를 나눈다. 폐지를 줍는 아주머니를 위해 모아두었던 상자와 이면지를 가져다 주고 전철역에서 살구를 담아 파는 노파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맞춘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살고 바라보고 쓰는 삶을 지속하면서 알게 된 집과 동네, 사랑과 아름다움, 인생에 대해, 작가는 자기만의 정의를 조곤조곤 풀어낸다.



“내 것이 아닌 욕망과 거짓된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곳이 비로소 집이 될 수 있으며, 동네란 오래오래 걷고 겪어 육체성을 지니는 공간이라고 알려준다. 사랑이란 “고이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곳을 향해 흐르는 강물”임을. “어떤 아름다움은 소유하지 않아 존재”할 수 있고 “어쩌면 삶을 닮은 것”일지 모르는 아름다움이란 “도처에서 저마다의 빛을 품은 채 자라고 있다”고 속삭여준다.



쉽게 답을 건네기보단 답의 씨앗을 심길 좋아하고 삶에 존재하는 수많은 구멍을 채우는 일의 불가능을 인정하는 작가. 그녀의 시선은 무엇도 섣부르게 단정하지 않고 대상화하지 않는다. 매번 고민하고 망설이며 다가간다.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을 알아채고 세월의 무게가 지닌 품위와 존엄을 귀히 여기는 작가의 문장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두를 긍정해주는 것 같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겠지만 슬픔이 너무 커서 세상에 대해 원망만 가득했던 마음이 찬란한 가을 햇살 속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풍경들에 황홀함으로 물드는 걸 느낄 때마다 나는 아름다움은 어쩌면 삶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정해놓은 목적지도 없이 팔랑팔랑, 느릿느릿 걷는 매일매일이 쌓이는 동안 내 눈길이 오래 머무는 모든 것의 이름 또한 틀림없이 ‘아름다움’ 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도처에서 저마다의 빛을 품은 채 자라고 있다.”

142쪽



글을 읽으며 그녀가 자신의 집 창 밖으로 보이는 것들에 가만히 시선을 포개는 모습을 그려보다, 내 방 창으로 보았던 나만의 풍경을 떠올렸다. 올봄 이사한 집, 아파트지만 일층인 이곳에 살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내게 새벽은 모두가 잠든 고요의 세계였다. 하지만 그 시간에 서둘러 하루를 시작하는 이가 있다는 걸 이 집에서 알게 되었다.



아직 어둠이 짙은 4시 45분이면 날마다 내 방 앞 놀이터 옆에 멈춰 비상등을 켜고 기다리는 봉고차가 있다. 잠시 후 드르륵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면 차는 분주하게 자리를 뜬다. 처음엔 그 소리가 불청객처럼 난폭하게 들렸지만 날이 갈수록 다시 한번 나를 깨우는 알람 소리가 되었다. 어떤 이는 날마다 4시 45분에 일을 하기 위해, 혹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 봉고차에 오른다. 그이는 나보다 더 이른 시간에 피곤한 눈을 비비며 일어났을 것이고 가만히 앉아 잔잔한 고요를 누리는 나와 전혀 다른 모양의 마음으로 하루를 열고 있을지 모른다.



비 오는 날을 유독 좋아하지만 그날이 누군가에겐 가혹할 정도로 힘든 날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놀이터 옆 빈 터는 택배차들이 차를 대놓고 짐을 내리는데 쓰이는 장소이기도 하다. 유난히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여름, 빗줄기가 거센 어느 날 비옷을 입은 택배 아저씨가 어김없이 그 자리에서 한참동안 택배 상자를 쏟아내 정리하는 걸 보았다. 그 뒤로는 비가 오는 게 좋다고 소리 내어 말하는 걸 망설이게 되었다.



매주 화요일이면 분리배출한 재활용 쓰레기를 싣고 가는 트럭이 온다. 집게손이 달린 트럭이 와서 밤새 사람들이 내놓은 박스와 온갖 쓰레기를 싣고 가는데 그 시간이 꽤나 길게 걸린다. 집게손이 쓰레기를 옮기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요란한 기계음이 난다. 처음엔 시끄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 창문을 닫았는데, 요즘은 조금 다른 마음으로 지켜본다. 소음이 들리는 시간만큼이 우리가 버린 쓰레기의 양이라는 걸 아니까. 가볍고 즐겁게 쓰고 쉽게 버릴 줄만 알았지 그걸 버리는 일의 과정과 수고로움은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까.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가 그렇게 많다는 것과 누군가는 그걸 옮기느라 수고하는 일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아파트에 살지만 일층이라 지상으로 연결된 내 방 창으로는 타인의 삶이 문득문득, 가만가만 비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들, 나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지는 삶의 풍경을 본다. 이것들을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없지만 이상한 방식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날씨가 허락하는 한은 방해가 되더라도 가능한 창문을 열어 놓으려 한다. 아파트라는 삭막한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과 연결된 통로 하나를 얻은 것 같아서. 문을 닫으면 들을 수 없고 커튼을 내리면 볼 수 없는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



며칠 새 단풍의 색이 짙어졌다. 그런데도 자고 일어나면 빛나듯 색을 토하던 잎들이 뭉텅뭉텅 바닥에 떨어져 가슴이 아릿해지는 날들이다. 발그레 색이 고운 홍옥을 먹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감홍 몇 알을 지나 부사를 먹는 날에 당도했다. 백수린 작가가 작은 집의 창문으로 바라보던 계절의 새 얼굴을 나 또한 지나침 없이 바라보고자 계절 과일을 챙기고 운동화를 신고 동네를 걷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



하루는 짙은 보라색으로 잘 익은 무화과가 보여 욕심껏 두 상자를 사 들고 왔다. 반으로 가르면 과육 안에 고여 있던 꿀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무화과를 파스타를 차린 저녁 식탁에 반찬처럼 먹었다. 그렇게 한 상자는 날 것으로 달게 먹고 나머지 한 상자는 다음 계절을 위한 잼으로 만들었다.



과일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게 설탕을 줄여 넣고 작은 불에서 뭉근하게 끓였다. 잼은 만드는 동안에도 집 안 가득 달큼한 냄새가 고이는 일이라 마음을 설레게 한다. 마지막엔 레몬을 넣어 마무리하고 사용하고 씻어 보관해 두었던 유리병에 담았다. 가을의 초입 짧게 왔다 가는 무화과를 병에 담고 보니 아쉬운 마음이 적힌 편지 한 통처럼 반가웠다. 토스트에, 플레인 요거트에 올려 먹으며 지난 계절의 즐거움을 떠올릴 어느 날이 기다려졌다. 잼을 사는 대신 제철 과일을 졸이고 가지고 있던 병을 재사용해 담았으니 그날은 실천과 실패를 오가는 환경을 위한 행보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고 할 수 있겠지.



“이제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촘촘한 결로 세분되는 행복의 감각들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결국은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므로.”

59쪽



매일매일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보다 매일매일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아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이제 나는 흔들리지 않으려는 완고함보다 기꺼이 흔들릴 수 있는 유연함이 더 좋다. 목표를 향해 빠른 길로 직진하겠다는 단호함보다 때에 따라 멈추고 멀리 돌아가기도 하는 망설임을 더 사랑한다. 뻔히 보이는 직선보다 머뭇거림으로 리듬이 만들어지는 궤적이 더 아름다울 걸 믿게 되었으니까. 그 궤적은 백수린 작가의 말처럼 춤의 스텝을 닮아 있을 것이다.



작가의 목소리처럼 가늘고 미세한 울림을 지닌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조심스러운 마음과 걸음걸음이 가만하게 눈을 맞춰주는 것 같아 내내 찬란하게 기뻤다. 답을 내릴 수 없어 갈팡질팡하던 마음, 지나치고도 마음에 남아 우물을 파는 일을 애써 떨쳐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내가 막연히 품고 있던 세계, 연약하고 상처 투성이지만 고유한 무늬로 아름다운 세계의 윤곽이 조금 또렷해진 기분이다. “섬세하고 연약한 물성을 지녔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견고한 표정을 짓”는 유리병처럼, 영롱한 언어로 그것들을 적어준 작가 덕분이다.



마음에도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그릴 수 있는 트레이싱지가 있다면 백수린 작가의 마음 위에 대고 천천히 따라 그리고 싶다. 여기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기분>에 그려진 마음의 오솔길을.






이제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촘촘한 결로 세분되는 행복이 감각들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결국은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므로. - P59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겠지만 슬픔이 너무 커서 세상에 대해 원망만 가득했던 마음이 찬란한 가을 햇살 속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풍경들에 황홀함으로 물드는 걸 느낄 때마다 나는 아름다움은 어쩌면 삶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정해놓은 목적지도 없이 팔랑팔랑, 느릿느릿 걷는 매일매일이 쌓이는 동안 내 눈길이 오래 머무는 모든 것의 이름 또한 틀림없이 ‘아름다움’ 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도처에서 저마다의 빛을 품은 채 자라고 있다. - P142

내 마음은 언제나, 사람들이 여러 가지 면과 선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고 매일매일 흔들린다는 걸 아는 사람들 쪽으로 흐른다. 나는 우리가 어딘가로 향해 나아갈 때, 우리의 궤적은 일정한 보폭으로 이루어진 단호한 행진의 걸음이 아니라 앞으로 갔다 멈추고 심지어 때로는 뒤로 가기도 하는 춤의 스텝을 닮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만 아주 천천히 나아간다고.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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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논)픽션 - 공간 시간 이동 기억 역사 자유, 정지돈의 에세이와 짧은 소설 온(on) 시리즈 1
정지돈 지음 / 마티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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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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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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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가 현실보다 진실할 때

이성애자로 살아온 내게 동성애의 세계는 미지의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음에 동의하지만, 나와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해 떠오르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마저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고 희미하게 남아있던 경계심을 씻어낼 수 있었다. 허구로 쓰인 이 세계가 지닌 진실함 덕분에 진실(혹은 사실)이라고 믿었던 현실이 어떤 걸 외면하거나왜곡시켜 바라본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그라는 사람이 궁금했고, 그보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그보다 그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내 감정을 휘저어놓는지 알고 싶어졌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감정들이 자꾸만 떠올라 초당 수천 미터는 뻗어가는 것 같았고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그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88쪽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사랑에 빠져들 때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은 이런 게 아니었던가. 이성이나 논리, 어떤 규제로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이토록 순수하게 발현되는 감정 이건만 어떤 이들은 틀렸다고 비난받고 바꿔야 한다고 강요당한다. 표현 방식에 차이는 있겠지만 사랑받고 사랑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에 있어서 만큼은 어떤 선도 그을 수 없다는 걸 이 소설은 보여준다.



다채로운 사랑의 얼굴들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네 편의 연작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처럼 네 편의 소설에는 저마다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십대라는 젊고 치기 어린 시절의 우정 같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재희', 서른한 살이 되어 스물여섯에 겪었던, 삶의 한 부분을 영원히 바꿔 놓은 사랑에 대해 회상하는 '우럭 한점 우주의 맛', 뒤늦게 사랑이라고 깨닫는 관계와 삶과 사랑에서 번민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고민을 다룬,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 네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작중 화자이자 소설가 ‘영’은 ‘모두 같은 존재인 동시에 모두 다른 존재’라고 책의 말미에 작가는 적어 두었다.



화자인 ‘영’은 자기 자신과 삶,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의 고민과 질문, 진솔한 고백이 생생하게 담긴 이 소설은 블랙코미디처럼 피식 웃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지만 이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곤 한다. 쉽게 사랑에 빠져들지만 자신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고 결국 상처 입고 마는 ‘영’의 모습에서 부끄럽고 나약한 내 모습과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네 편의 소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이다. 한 사람에게 다른 한 사람의 존재가 우주처럼 커다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게 사랑이지만, 그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하는 게 사랑이다.



소설 속 ‘영’은 한때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열두 살 많은 ‘형’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그는 ‘영’의 ‘게이스러움’을 부끄럽게 여기고 '영'을 가르치려고 든다. ‘영’이 열한 살 때 이혼해 억척스레 살아온 ‘엄마’는 암에 걸려 투병 중이다. 신실한 기독교인인 그녀는 남들보다 못한 모든 걸 수치스러워했고 고등학생인 ‘영’이 남고생과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그를 정신과 폐쇄 병동에 입원시켰다.



사랑이라는 ‘포기의 마음’


‘엄마’와 ‘형’은 ‘영’을 가르치거나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닌 결핍을 혐오하고 회피하는 두 사람은 그들의 결핍을 떠올리게 하는 ‘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영’ 또한 그들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혐오로 괴로워하지만 자신을 직시하려는 노력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그녀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 나를 옥죌 의도가 없고, 나 역시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

178쪽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자신의 결핍을 바라보는 일의 어려움을 우리는 안다. 사랑할 수록 상대의 결핍이 내 것과 겹쳐져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도. 서로가 결핍을 떠안은 관계에서 자기 마음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영'의 눈물겨운 노력은 관계에 필요한 거리를 만들고, 의존적으로 기울었던 감정에 균형감을 부여한다.


그녀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인생이 예상처럼, 차트의 숫자처럼 차곡차곡 정리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가장 그렇지 말았으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핏줄이 연결된 것처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181쪽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사랑이란 무결한 이해와 용서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 할 줄 아는 지혜를 닮은 건지도 모르겠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마음은 완전히 이해하고 제대로 용서해보겠다며 불가능한 욕심을 부리기보단, 그 모습 그대로 가만히 두겠다는 포기의 마음과 오히려 가까워 보인다.



철 지난 관념과 사회적 시선 속에 규정된 사랑의 정의를 뛰어넘으며 자신의 감정과 관계, 사랑을 탐색하고 받아들이려 애쓰는 소설 속 주인공 ‘영’은 용감하다. 상처받더라도, 실패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뛰어들길 주저하지 않기에, 그는 아름답다. 존재 그대로를 사랑하고 끌어안고자 분투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나로 온전하기 위한 노력과 성숙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금 배운다.



사랑이라는 경계없는 우주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말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금 주먹을 꽉 쥔 채 이 사소한 온기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내 삶을,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오롯이 나로서 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

339쪽, 작가의 말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작가의 말처럼 ‘단지 나로서’, ‘오롯이 나로서 이 삶을 살아’ 가기 위해 매일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 소설에서 다뤄지는 사랑이,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것이라서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게 이 소설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담고 있는 감정이란 우주만큼 드넓으며 거기엔 옮고 그름이라는 경계도, 우월의 구분도 없다고 알려준다.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박상영 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 작가의 말 중에서) 관계를 바라는,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어쩔 수 없는 우리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고.



여고생 시절 동성의 친구와 나누었던 교감은 우정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 시절엔 친구가 나라는 우주의 전부였다. 매일 만나도 늘 그리웠고 밤이 늦도록 편지를 썼다. 쉬는 시간이면 애정 하는 친구를 보러 그의 교실을 찾아갔고 두근거리는 설렘을 느꼈다. 어른이 되어 사회로 편입되기 전, 금지의 규칙은 많았지만 어떤 면에선 정상성의 규제에서 벗어나 있던 그 시절, 우리는 감정과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지금보다 활짝 열려 있지 않았나 싶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단지 두렵다는 이유로 외면하거나 하나의 모습만 보며 그 세계를 왜곡시키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고 싶고,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더 사랑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소설을 권하고 싶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22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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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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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치유를 예감하는 가만한 응시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 소설집 <비 온 뒤>에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삶의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지나가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비가 퍼부어 시야가 흐리고 거센 빗방울에 바닥의 흙이 파여 엉망이지만 언젠가 비가 그치면 맑게 갠 하늘에 무지개가 뜰 것을 그들은 아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을 넘어뜨리려는 상처를 응시하며 말없이 고통을 삼킨다.


“이제 가야 돼.” 그가 친구의 아파트에서 말한다. 밑에 지나가던 행인 관찰을 중단한다. 다시 그들은 포옹하고 이제 그는 떠난다. 그녀의 입술 감촉이 그와 함께 떠난다. 그녀의 아쉬움 넘치는 웃음, 그날 오후 오랫동안 그의 손안에 있던 그녀의 연약한 손가락. 그는 차량을 뚫고 운전한다. 길을 완벽하게 알기 때문에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아파트에서 그녀는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고, 거기에서 위안을 찾는다. 다른 여자를 갖는 것은 그의 권리다. 호텔 테라스에서 그녀는 그렇게 결정했다. 아직 없애지 않은 편지를 들고 거기 앉아 있던 한 시간 동안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절대 발견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자신이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278쪽, ‘하루’,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옮김, 한겨레출판



<비 온 뒤>에 실린 ‘하루’라는 단편에는 과거 남편의 외도를 발견하고 눈 감았던 여인이 원치 않는 소식이 날아들 것을 예감하며 보내는 하루가 그려져 있다. 오랜 결혼 생활은 사랑과 신뢰로 단단하게 두 사람을 엮어 두었지만 불임인 그녀에겐 씻어낼 수 없는 불안과 상실감이 있다. 간신히 붙인 균열을 삶의 깊은 곳에 숨긴 채 살아왔던 그녀가 그것이 드러나고 말 것을 예감하는 하루는 살얼음 위를 걷듯 조마조마하다.



윌리엄 트레버의 문장은 소설 속 인물이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심리의 변화를 촘촘하게 따라간다. 판단이나 평가 없이 인물 내면에서 흘러가는 생각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주변의 모습을 고요히 옮겨 적을 뿐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을 무너지게 하는 사건은 있지만 그로 인한 소란은 없다. 금이 가거나 깨진 접시는 보이지만 음소거라도 한 듯 요란한 소리는 흘러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균열에서는 어김없이 피가 번진다. 흐르는 법 없이 삶 속으로 번져 들어가는 핏자국. 트레버는 그 상처의 자리를 가만히, 지극히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때론 정적과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한다.


지금 술을 마시는 욕실 페인트에 어울리는 불투명한 파란 컵은 칫솔 통으로, 수수한 칵테일 잔보다 술이 많이 들어간다. 거의 세 배는 들어간다. 맛도 다르다. 플라스틱 통은 손에 쥐는 느낌도 달라 유리잔처럼 손으로 잡는 부분도 없고 서늘하지도 않고 입술에서는 더 따뜻하다. 오후가 다가오면서 지나간 아침이 멀게 느껴진다. 오후는 어제의 오후 또 그 전날의 오후와 연결되고, 이런 반복은 어딘가에 출발점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273쪽, ‘하루’,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옮김, 한겨레출판



트레버의 가만한 응시는 상처의 아픔보다는 상처의 치유를 예감하게 한다. 이야기는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으니. “오후는 어제의 오후 또 그 전날의 오후와 연결되고, 이런 반복은 어딘가에 출발점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273쪽) 그렇듯 내일의 오후가, 그다음 날의 오후가, 인생에서는 지속될 것이다. 흠집이 생기고 금이 간 오늘의 오후는 그 반복 속에 사라져 언젠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연인과 이별(‘비 온 뒤’)하고 죽마고우를 잃더라도(‘우정’), 하나뿐인 자식에게 상처 입고(‘티머시의 생일’)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더라도(‘하루’) 말이다.



삶은 흘러간다는 진실


삶의 뿌리를 뒤흔드는 사건이 있더라도 그 균열을 지닌 채 삶은 흘러갈 수 있다고 노작가는 말한다. 상처는 피할 수 없을 테지만 변함없는 삶의 반복이 흉터를 옅어지게 할 순 있다고. “종종, 저녁에, 그녀의 남편이 그들의 집으로 돌아올 때” 볼 수 있는 부엌의 익숙한 모습이 편안함을 건네 듯,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늘 그렇듯이, 그녀를 안아 옮길 때” 그가 부드러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듯, 다만 변함없는 것에 기대어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트레버의 고요한 응시는 그렇게 상처를 위로로 어루만진다.


부엌의 알록달록한 조리대 위에서 고기는 레스웨스 부인이 둔 그 자리에 있고, 기름 일부는 잘려나갔고, 칼은 여전히 돼지갈비 조각에서 기름을 떼어내고 있다. 아까 낮에 껍질을 벗긴 감자는 찬물이 담긴 냄비에 있고, 껍질을 까놓은 콩은 다른 냄비에 있다. 종종, 저녁에, 그녀의 남편이 그들의 집으로 돌아올 때 부엌은 그런 모습이다. 그는 늘 그렇듯이, 그녀를 안아 옮길 때 부드럽다.

281쪽, ‘하루’,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옮김, 한겨레출판



어느 시점이 되면 열심히 쌓아온 삶이라는 모래성이 파도에 닿아 서서히 침식하는 걸 목격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파도의 존재를 모른 채 자기만의 모래성을 쌓기 위해 질주했던 시간이 끝나면 결국 마모의 시간만이 남는 걸까.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삶은 흐르기 마련이라는 진실이,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고 안도감을 건넨다. 삶의 어떤 것도 영원히 박제될 수 없다는 것이. 기쁨과 행복이 잠시 머물고 사라지듯 고통과 절망도 희미해지게 마련이다. 시간에 기대어 삶은 닳아갈 테다. 시간이 건네는 망각이라는 ‘선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삶이라는 공정한 저울


벨이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었고, 그런 주장에 따라 피해를 입거나 파괴당하는 뭔가가 생기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늘 이기는 법이니 결국에는 벨이 이길 터였다. 그 또한 공정해보였으니, 바이얼릿은 처음에 이겨 더 나은 시절을 누렸기 때문이다.

27~28쪽, ‘조율사의 아내들’,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옮김, 한겨레출판



삶이라는 거짓 없는 저울에 진실되게 자신을 올리고 묵묵히 자신의 몫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이 책에서 본다. 피아노 조율사의 두 번째 아내 벨은 눈멀고 나이 든 남편에게서 죽은 첫 번째 아내의 존재를 느끼지만 살면서 그 흔적마저 옅어질 것을 예감한다(‘조율사의 아내들’). 둘 다 남편을 잃은 과부 처지임에도 자신과 달리 애도 속에 남편의 사랑을 간직하는 캐서린의 모습에 질투심을 느끼는 얼리샤(‘과부들’). 그녀에게 결혼은 불행한 것이었지만 그걸 보상하는 아름다움이 그녀에겐 있었다. 삶이라는 전 과정에서 각자의 몫은 그렇게 공평할 것이라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미 살면서 보아왔듯, 지금도 경험하고 있듯. 그러니 절망할 필요도 없고 자만하며 우쭐해서도 안 될 것이다. 트레버 소설 속 사람들처럼 언제나 고요하지만 촘촘한 시선으로 삶을 응시해야겠다.




아일랜드 출신의 윌리엄 트레버는 안톤 체호프와 제임스 조이스를 잇는 단편 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1964년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소설집 15권에 달하는 수백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뉴요커》는 그에 대해 “영어로 단편소설을 쓰는, 생존해 있는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격찬했고, 줌파 라히리는 “트레버의 작품에 견줄 만한 이야기를 단 한 편이라도 쓸 수 있다면 행복하게 죽을 수 있겠다”라고 존경을 표하는 등 수많은 영미권 작가들로부터 애정 어린 찬사를 받았다.



그의 나이 67세에 출간된 <비 온 뒤>에는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 소설의 아름다움과 힘을 절제된 문체로 빼어나게 담아냈다. 담담하게 쓰인 소설처럼, 상처 입고 쓰러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담담하게 버티어 내는 게 삶의 자세라고 노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삶이 지닌 공정함이라는 저울을 잊지 말라고 조언한다. 지금 얻는 게 있다면 언젠가 잃은 것이 있을 테고, 지금 잃은 게 있다면 언젠가 얻은 것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가 책 속에 되살려낸 삶의 조각들처럼 실제 삶도 그렇게만 공정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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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훌 - 제1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57
문경민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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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우의 어깨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세윤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툭툭, 하는 느낌과 함께 마음에 새살이 돋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번 더 힘을 주어 연우의 어깨를 안았다.

251쪽 <훌훌> 문경민, 문학동네


때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때문에 삶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를 일으키고 다시 나아가게 하는 힘도 그들에게서 나온다.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인간이 지닌 고유한 온기를 나눌 수 있다. 어깨를 두드려주고 손을 잡고, 끌어안아주는 사이 우리 사이를 오가는 온기가 주는 위안이 얼마나 큰지, 그 온기가 우리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걸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있다. 곁에 있는 이들의 온기로 아픔을 털어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문경민 작가의 <훌훌>이다.



소설 속 고등학교 2학년 유리는 할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다. 자신을 입양한 엄마 서정희 씨마저 떠나버린 집에서 할아버지와 필요한 대화만 나눈다. ‘과거 따위 없는 셈 치고’ 살아가고 싶었지만 급작스레 전해진 서정희 씨의 부고와 그녀의 친아들 연우(초등학교 4학년)와의 동거 생활이 시작되면서 과거의 위태로운 감정이 되살아난다.


지금이야 그 시절을 돌이켜도 무덤덤하지만 당시에는 제법 힘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혼자 잠든 내 방에 불쑥 들어와 온몸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떠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괜한 소외감과 괜한 억울함, 괜한 서러움이 마음속 각기 다른 그릇에 담겨 찰랑거렸다. 찰랑거리던 그것들이 조금이라도 넘쳐 주르륵 흘러내리는 날이면 나는 잠깐 돌아 버렸다. 칼로 필통을 긋고 지우개와 연필을 썰고 혼자 조용히 훌쩍이곤했다.

19쪽 <훌훌> 문경민, 문학동네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한 유리의 내면에는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감정이 숨어 있다. 그런 유리의 삶에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서정희 씨의 사망과 관련하여 어린 연우에게 미심쩍은 정황을 발견한 경찰의 방문으로 유리는 연우가 서정희 씨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한 걸 알게 된다. 또한 말은 안 하지만 나날이 병색이 짙어가는 할아버지의 얼굴도 심상치 않다. 대학만 들어가면 이 집을 떠날 거라고 생각하며 학업에 집중했던 유리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런 유리에게도 ‘시간은 칙칙폭폭 앞으로 나아’ 간다. 집안 사정이나 학업 등수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친구 미희와 주봉, 그리고 특별활동 모임을 만들며 새롭게 가까워진 세윤이 있다. ‘학교 생활이 이어지고 친구를 만나고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겪’으며 유리는 자신의 처지에 적응했고 그러느라 일찍 성숙해버린 걸까.



‘우울해한다고 해서’ 조건이 바뀌지 않고, 힘들더라도 ‘현실을 인정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음을,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뼈아픈 진실을 유리는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어떤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다. 보호막이 되어줄 어른이 없을 때,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어른이 된다.



위태로운 유리 곁에 지켜주는 친구들처럼 유리의 상황을 캐묻지 않으면서도 어려움은 공감해주고 힘을 건네주는 어른도 있다. 고새 학년이 되어 만난 고향숙 선생님이다. 그녀의 존재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유일하게 빛을 밝힌 등대처럼 위기의 순간에 유리을 지켜준다.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그 사정을 알 수가 없잖니.”

나는 내 허벅지에 얹힌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우의 지난 삶을 생각했고 연우가 살아가며 겪게 될지 모를 무수한 어려운 일들을 생각했다. 목이 메어 왔고 눈물이 돌았다. 엄마 서정희 씨의 삶을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삶도 생각했다.

207쪽 <훌훌> 문경민, 문학동네




힘겨웠던 과거의 경험이 있고 그로 인해 주변에서 무례하고 뾰족한 말들이 흘러 나오지만 고향숙 선생님은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자신을 지켜내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그녀가 유리에게 해주는 말은 우리 모두를 향한 것 같다.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데, 혹시 그러고 있지 않는지.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쉬이 판단하고 섣부른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유리의 존재도 그 메시지를 되새겨 보게 한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입양한 엄마에게도 버림받는 아픔을 겪었지만 유리는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자신의 뿌리가 되었어야 할 사람들에게서 잘려 나가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들에 대한 미움만 품지 않고 이해해보려 마음을 도닥인다. 내 삶의 어려움만큼 그들 삶에 있었을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연우와 할아버지에게 미움과 원망을 키우기보다 자연스레 보호자의 역할을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어린 연우의 학교 생활과 끼니를 챙기고 하나뿐인 딸을 먼저 보내 외롭게 암투병을 하는 할아버지를 걱정하며 유리는 잘려나간 뿌리를 스스로 키워낸다. 혼자 살겠다고 차갑게 마음을 다지던 유리가 연우와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으로 기울어갈 때 유리라는 뿌리가 지닌 생명력이 이 가족에게 새로운 싹을 틔우게 할 거라 기대하게 되니까. 상처투성인 연우의 몸과 마음에 새살을 돋게 하고, 고단하고 어두운 할아버지의 삶에 빛을 드리울 거라고.



금이 가고 깨어진 자리가 못난 흉터가 되는 게 아니라 선을 잇고 새살을 돋우며 아름다운 무늬를 그려낼 수도 있다는 걸 유리와 세윤, 할아버지와 고향숙 선생님의 삶을 통해 배운다. “모든 고통은 사적이지만 세상이 알아야 하는 고통도 있다. 무엇으로 아프고 힘든지 함께 나누고 이야기해야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지기 마련이다. <훌훌>이 없는 세상보다 <훌훌>이 있는 세상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254쪽 작가의 말) 작가의 말처럼 <훌훌>이 있어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한 뼘 더 넓어졌다.



입양 가족의 삶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의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어딘가에서 힘차게 살아가고 있을 유리나 연우 같은 아이들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그 삶의 상실과 아픔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 입양 가족의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마음도 스며든다. 한 권의 책으로 그들이 맞닥뜨리는 고통과 아픔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고통을 끌어안고도 온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



누구나 각자의 슬픔을 삶의 일부로 보듬고 살아가고 있다는 당연한 진실을 생각하면 내 삶의 슬픔이 조금은 얕고 가벼워 보인다. 내 것보다 더 깊고 무거운 슬픔을 짊어진 누군가에게 손을 건넬 수 있겠다는 작은 용기도 생긴다. 한 뼘 더 넓어진 세상을 마주하며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함부로 선을 그어서도 안 되지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곳에도 나와 똑같은 체온으로 온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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