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으며 그녀가 자신의 집 창 밖으로 보이는 것들에 가만히 시선을 포개는 모습을 그려보다, 내 방 창으로 보았던 나만의 풍경을 떠올렸다. 올봄 이사한 집, 아파트지만 일층인 이곳에 살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내게 새벽은 모두가 잠든 고요의 세계였다. 하지만 그 시간에 서둘러 하루를 시작하는 이가 있다는 걸 이 집에서 알게 되었다.
아직 어둠이 짙은 4시 45분이면 날마다 내 방 앞 놀이터 옆에 멈춰 비상등을 켜고 기다리는 봉고차가 있다. 잠시 후 드르륵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면 차는 분주하게 자리를 뜬다. 처음엔 그 소리가 불청객처럼 난폭하게 들렸지만 날이 갈수록 다시 한번 나를 깨우는 알람 소리가 되었다. 어떤 이는 날마다 4시 45분에 일을 하기 위해, 혹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 봉고차에 오른다. 그이는 나보다 더 이른 시간에 피곤한 눈을 비비며 일어났을 것이고 가만히 앉아 잔잔한 고요를 누리는 나와 전혀 다른 모양의 마음으로 하루를 열고 있을지 모른다.
비 오는 날을 유독 좋아하지만 그날이 누군가에겐 가혹할 정도로 힘든 날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놀이터 옆 빈 터는 택배차들이 차를 대놓고 짐을 내리는데 쓰이는 장소이기도 하다. 유난히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여름, 빗줄기가 거센 어느 날 비옷을 입은 택배 아저씨가 어김없이 그 자리에서 한참동안 택배 상자를 쏟아내 정리하는 걸 보았다. 그 뒤로는 비가 오는 게 좋다고 소리 내어 말하는 걸 망설이게 되었다.
매주 화요일이면 분리배출한 재활용 쓰레기를 싣고 가는 트럭이 온다. 집게손이 달린 트럭이 와서 밤새 사람들이 내놓은 박스와 온갖 쓰레기를 싣고 가는데 그 시간이 꽤나 길게 걸린다. 집게손이 쓰레기를 옮기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요란한 기계음이 난다. 처음엔 시끄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 창문을 닫았는데, 요즘은 조금 다른 마음으로 지켜본다. 소음이 들리는 시간만큼이 우리가 버린 쓰레기의 양이라는 걸 아니까. 가볍고 즐겁게 쓰고 쉽게 버릴 줄만 알았지 그걸 버리는 일의 과정과 수고로움은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까.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가 그렇게 많다는 것과 누군가는 그걸 옮기느라 수고하는 일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아파트에 살지만 일층이라 지상으로 연결된 내 방 창으로는 타인의 삶이 문득문득, 가만가만 비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들, 나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지는 삶의 풍경을 본다. 이것들을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없지만 이상한 방식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날씨가 허락하는 한은 방해가 되더라도 가능한 창문을 열어 놓으려 한다. 아파트라는 삭막한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과 연결된 통로 하나를 얻은 것 같아서. 문을 닫으면 들을 수 없고 커튼을 내리면 볼 수 없는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
며칠 새 단풍의 색이 짙어졌다. 그런데도 자고 일어나면 빛나듯 색을 토하던 잎들이 뭉텅뭉텅 바닥에 떨어져 가슴이 아릿해지는 날들이다. 발그레 색이 고운 홍옥을 먹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감홍 몇 알을 지나 부사를 먹는 날에 당도했다. 백수린 작가가 작은 집의 창문으로 바라보던 계절의 새 얼굴을 나 또한 지나침 없이 바라보고자 계절 과일을 챙기고 운동화를 신고 동네를 걷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
하루는 짙은 보라색으로 잘 익은 무화과가 보여 욕심껏 두 상자를 사 들고 왔다. 반으로 가르면 과육 안에 고여 있던 꿀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무화과를 파스타를 차린 저녁 식탁에 반찬처럼 먹었다. 그렇게 한 상자는 날 것으로 달게 먹고 나머지 한 상자는 다음 계절을 위한 잼으로 만들었다.
과일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게 설탕을 줄여 넣고 작은 불에서 뭉근하게 끓였다. 잼은 만드는 동안에도 집 안 가득 달큼한 냄새가 고이는 일이라 마음을 설레게 한다. 마지막엔 레몬을 넣어 마무리하고 사용하고 씻어 보관해 두었던 유리병에 담았다. 가을의 초입 짧게 왔다 가는 무화과를 병에 담고 보니 아쉬운 마음이 적힌 편지 한 통처럼 반가웠다. 토스트에, 플레인 요거트에 올려 먹으며 지난 계절의 즐거움을 떠올릴 어느 날이 기다려졌다. 잼을 사는 대신 제철 과일을 졸이고 가지고 있던 병을 재사용해 담았으니 그날은 실천과 실패를 오가는 환경을 위한 행보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고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