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훌 - 제1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57
문경민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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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우의 어깨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세윤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툭툭, 하는 느낌과 함께 마음에 새살이 돋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번 더 힘을 주어 연우의 어깨를 안았다.

251쪽 <훌훌> 문경민, 문학동네


때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때문에 삶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를 일으키고 다시 나아가게 하는 힘도 그들에게서 나온다.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인간이 지닌 고유한 온기를 나눌 수 있다. 어깨를 두드려주고 손을 잡고, 끌어안아주는 사이 우리 사이를 오가는 온기가 주는 위안이 얼마나 큰지, 그 온기가 우리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걸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있다. 곁에 있는 이들의 온기로 아픔을 털어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문경민 작가의 <훌훌>이다.



소설 속 고등학교 2학년 유리는 할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다. 자신을 입양한 엄마 서정희 씨마저 떠나버린 집에서 할아버지와 필요한 대화만 나눈다. ‘과거 따위 없는 셈 치고’ 살아가고 싶었지만 급작스레 전해진 서정희 씨의 부고와 그녀의 친아들 연우(초등학교 4학년)와의 동거 생활이 시작되면서 과거의 위태로운 감정이 되살아난다.


지금이야 그 시절을 돌이켜도 무덤덤하지만 당시에는 제법 힘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혼자 잠든 내 방에 불쑥 들어와 온몸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떠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괜한 소외감과 괜한 억울함, 괜한 서러움이 마음속 각기 다른 그릇에 담겨 찰랑거렸다. 찰랑거리던 그것들이 조금이라도 넘쳐 주르륵 흘러내리는 날이면 나는 잠깐 돌아 버렸다. 칼로 필통을 긋고 지우개와 연필을 썰고 혼자 조용히 훌쩍이곤했다.

19쪽 <훌훌> 문경민, 문학동네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한 유리의 내면에는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감정이 숨어 있다. 그런 유리의 삶에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서정희 씨의 사망과 관련하여 어린 연우에게 미심쩍은 정황을 발견한 경찰의 방문으로 유리는 연우가 서정희 씨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한 걸 알게 된다. 또한 말은 안 하지만 나날이 병색이 짙어가는 할아버지의 얼굴도 심상치 않다. 대학만 들어가면 이 집을 떠날 거라고 생각하며 학업에 집중했던 유리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런 유리에게도 ‘시간은 칙칙폭폭 앞으로 나아’ 간다. 집안 사정이나 학업 등수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친구 미희와 주봉, 그리고 특별활동 모임을 만들며 새롭게 가까워진 세윤이 있다. ‘학교 생활이 이어지고 친구를 만나고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겪’으며 유리는 자신의 처지에 적응했고 그러느라 일찍 성숙해버린 걸까.



‘우울해한다고 해서’ 조건이 바뀌지 않고, 힘들더라도 ‘현실을 인정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음을,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뼈아픈 진실을 유리는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어떤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다. 보호막이 되어줄 어른이 없을 때,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어른이 된다.



위태로운 유리 곁에 지켜주는 친구들처럼 유리의 상황을 캐묻지 않으면서도 어려움은 공감해주고 힘을 건네주는 어른도 있다. 고새 학년이 되어 만난 고향숙 선생님이다. 그녀의 존재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유일하게 빛을 밝힌 등대처럼 위기의 순간에 유리을 지켜준다.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그 사정을 알 수가 없잖니.”

나는 내 허벅지에 얹힌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우의 지난 삶을 생각했고 연우가 살아가며 겪게 될지 모를 무수한 어려운 일들을 생각했다. 목이 메어 왔고 눈물이 돌았다. 엄마 서정희 씨의 삶을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삶도 생각했다.

207쪽 <훌훌> 문경민, 문학동네




힘겨웠던 과거의 경험이 있고 그로 인해 주변에서 무례하고 뾰족한 말들이 흘러 나오지만 고향숙 선생님은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자신을 지켜내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그녀가 유리에게 해주는 말은 우리 모두를 향한 것 같다.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데, 혹시 그러고 있지 않는지.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쉬이 판단하고 섣부른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유리의 존재도 그 메시지를 되새겨 보게 한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입양한 엄마에게도 버림받는 아픔을 겪었지만 유리는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자신의 뿌리가 되었어야 할 사람들에게서 잘려 나가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들에 대한 미움만 품지 않고 이해해보려 마음을 도닥인다. 내 삶의 어려움만큼 그들 삶에 있었을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연우와 할아버지에게 미움과 원망을 키우기보다 자연스레 보호자의 역할을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어린 연우의 학교 생활과 끼니를 챙기고 하나뿐인 딸을 먼저 보내 외롭게 암투병을 하는 할아버지를 걱정하며 유리는 잘려나간 뿌리를 스스로 키워낸다. 혼자 살겠다고 차갑게 마음을 다지던 유리가 연우와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으로 기울어갈 때 유리라는 뿌리가 지닌 생명력이 이 가족에게 새로운 싹을 틔우게 할 거라 기대하게 되니까. 상처투성인 연우의 몸과 마음에 새살을 돋게 하고, 고단하고 어두운 할아버지의 삶에 빛을 드리울 거라고.



금이 가고 깨어진 자리가 못난 흉터가 되는 게 아니라 선을 잇고 새살을 돋우며 아름다운 무늬를 그려낼 수도 있다는 걸 유리와 세윤, 할아버지와 고향숙 선생님의 삶을 통해 배운다. “모든 고통은 사적이지만 세상이 알아야 하는 고통도 있다. 무엇으로 아프고 힘든지 함께 나누고 이야기해야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지기 마련이다. <훌훌>이 없는 세상보다 <훌훌>이 있는 세상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254쪽 작가의 말) 작가의 말처럼 <훌훌>이 있어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한 뼘 더 넓어졌다.



입양 가족의 삶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의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어딘가에서 힘차게 살아가고 있을 유리나 연우 같은 아이들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그 삶의 상실과 아픔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 입양 가족의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마음도 스며든다. 한 권의 책으로 그들이 맞닥뜨리는 고통과 아픔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고통을 끌어안고도 온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



누구나 각자의 슬픔을 삶의 일부로 보듬고 살아가고 있다는 당연한 진실을 생각하면 내 삶의 슬픔이 조금은 얕고 가벼워 보인다. 내 것보다 더 깊고 무거운 슬픔을 짊어진 누군가에게 손을 건넬 수 있겠다는 작은 용기도 생긴다. 한 뼘 더 넓어진 세상을 마주하며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함부로 선을 그어서도 안 되지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곳에도 나와 똑같은 체온으로 온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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