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정지돈 지음 / 스위밍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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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나빠지진 않겠지, 라는 기대. 이게 엄청난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야. 나빠지지 않는게 가장 힘든 일이야. 나빠지지 않으려면 미친듯이 좋아져야 해. 그러면 겨우 나빠지지 않을 수 있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110쪽,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정지돈, 스위밍꿀, 2017

 

 

 

 

일년에 1/3 이상은 미세먼지로 뒤덮인 하늘 아래 살고 있다. 무차별 총기 난사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해외 기사를 접한다. 서울에 집을 사는 건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 되었고 지방 도시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은 코로나 19의 출현으로 자유로운 외출을 포함한 당연한 일상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다. 아이들이 학교를 못 간지 반 년이 되어간다. 미래는 지금보다 나쁘지 않을까? ‘나빠지지 않으려면 미친듯이 좋아져야’ 하는데, 그래야 ‘겨우 나빠지지 않을 수’ 있는데. 좋아질 수 있을까? 애당초 나빠지지 않길 바라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기대인 건 아닐까?

 

정지돈의 소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스위밍꿀, 2017)에는 2063년의 미래 사회가 단편적으로 그려져 있다. 총기소지 합법화로 총격전이 일상화된 한반도, 서울 이외 지역은 공동화되면서 우범지대가 되었다. 서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죽음에 내몰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주국은 집 없는 사람들을 서울 밖으로 강제 이주시키려고 한다. 짐은 버스 운전기사다. 취미는 없지만 일하는 시간 외에는 글을 쓴다. 어느날 친구 안드레아로부터 자신과 무하마드를 태운 밴을 옌지까지 운전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보수가 클 것이라며 짐을 설득한다. 짐은 서울에 집을 사기 위해 ‘안드레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위험한 운행에 나선다.

일행은 테러리스트 지원 단체로 몰려 검거 당한 후 이주국 직원 보리의 도움으로 탈출, 난민과 추방자를 돕는 국제인권기구 ADRA가 세운 북한 최초 카페 ADRA에 도착한다. 일행은 마지막까지 이주국의 추적에 쫓기며 간신히 옌지로 향하는 배에 오르고 짐은 어머니를 찾아 부산으로 향한다. 테러리스트로 주목된 전직 스파이 겸 세계 석학 무하마드와 이주국 사이의 추격전에 끼어 일촉즉발의 위험 속에 놓이지만 짐은 내내 얼떨떨한 상태다. 전 아무것도 몰라요, 전 그냥 운전기사예요. 그의 마지막 말이다.

 

소설은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문제를 눈 앞에 펼쳐 보여준다. 하지만 아쉬움은 있다. 분량의 문제인지 결말은 급작스럽고 몇몇 인물의 등장과 행동은 설득력이 부족해보인다. 안드레아와 무하마드가 옌지까지 가야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고 이주국 직원이면서 노 모어 건스 운동을 하고 있는 보리의 추동력도 애매하다. 그렇지만 소설 속에 그려진 미래 사회의 현실과 인물들의 행동이 허무맹랑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한반도의 통일, 총기소지 합법화, 일상적인 총격전, 지방 도시의 공동화, 서울에 집이 없으면 죽음에 내몰리게 되는 상황, 무수한 난민과 추방자, 불투명한 막에 쌓여 있는 하늘, 일년에 며칠 해가 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햇빛을 쪼이는 사람들……. 2063년의 모습은 비극적이다. 덜컥 겁이 난다. 아무생각없이 미래로 나아가다보면 책 속의 비극이 현실로 등장할 것만 같다.

 

 

 

 

내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리는 카페 밖으로 나오며 생각했었다. 생각을 해야 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녀는 생각한다는 걸 생각했고 텅 빈 도로 위를 움직이는 먼지바람을 봤다. 고통이 너무 점잖아서 고통을 느낄 수 없거나 느껴도 고통에게 뭐라고 할 수 없어. 이런 걸 아우슈비츠증후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참혹한 경험을 한 적이 없어. 나는 비극을 겪은 적이 없어. 보리는 생각했다. 비극을 소비하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운석이나 핵폭탄, 지진이 덮쳐 폐허가 된 도시에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남은 인류 최후의 생존자. 그러나 나는 그냥 재능 없는 노동자고 새로운 걸 꿈꾸기엔 넘 피곤해. 보리는 쉬는 시간의 대부분을 청소하는데 썼고 가끔 누워서 핸드폰을 했다. 갈 수 없는 여행지를 검색하며 자신과 여행지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체험했다. 모든 게 너무 위험했고 불완전했으며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돈에 대한 이야기, 자본에 대한 이야기, 경제적인 이야기, 물질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자. 나는 유물론자가 아니고 모든 건 마음가짐에 달려 있는 거야. 그녀는 카페 ADRA의 외관을 보았고 불투명한 막에 쌓인 하늘의 뒤편에서 빛이 저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제일 보고 싶은 건 그림자야. 길고 선명한 그림자. 그런데 마음이라니. 그런 게 왜 있는 거지?

138쪽

 

 

 

 

 

 

 

사람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끌고 오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이나 주의, 정치 경제적 사상과 같은 고차원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안전이 보장되는 곳에 살 수 없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없다면, 매 끼니를 치킨 버거로 때워야 한다면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는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되지 않을까. 이주국 직원이면서 짐 일행의 탈출을 도운 보리는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단지 ‘길고 선명한 그림자’가 보고 싶을 뿐이다. 버스 운전기사 짐은 안드레아와 무하마드가 추진하는 일이 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서울에 집을 살 돈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은 세계 평화나 정의 실현을 고민하기 이전에 맑은 하늘과 안전한 집이 필요하다고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일상을 유지하는 사소한 문제들이 사람들을 움직인다고 말이다. 신념 없이도 분쟁의 한 복판에 놓일 수 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변혁의 흐름 속에 발을 담글 수 있다. 그럴 때 인간은 순식간에 ‘투사’로 변신하지 않는다. ‘운전기사는 그저 운전기사’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할 뿐이다. 그게 평범한 사람들의 실제적 모습일 거라고 ‘짐’을 통해 생각해본다.

 

 

 

 

 

우리는 백미러를 통해 현재를 본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한다.

154쪽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야간 경비원의 일기> 등 이전에 읽었던 정지돈의 소설에서도 과거와 현재를 더듬으며 미래의 단초를 찾으려는 시도를 발견했다. 그의 소설은 과거를 통해 이루어진 현실의 단면을 직시하고 미래를 향해 질문하게 했다. 흔히 미래로 나아간다, 라고 말한다. 시간은 어찌되었든 앞으로 진행할 것이다. 더불어 세상의 모습과 인간의 삶 또한 앞으로 나아갈까, 그것은 긍정적인 방향일까. 지금은 확신하기 어렵다.

우리는 백미러로 현재를 보며 적당한 방관을 일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 치고 있는지도. 소설 속 모습이 우리가 당도할 미래가 되지 않기 위해 차를 멈추고 현실 속으로 내려서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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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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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다양한 글쓰기와 영화작업을 아우르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이다. 절제된 언어로 섬세하고 함축적으로 인물의 감정과 심리를 표현하는 그의 작품은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삶에 대한 권태’와 ‘기다림 또는 부재감’을 그려낸다. 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이 무더운 여름의 말미에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다.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라는 광고 문구처럼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친구와 낯선 남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담고 있다.

 

 

 

별장 몇 미터 앞 너르게 흐르는 은빛 강물이, 저 멀리 뽀얀 안개 속에 너울너울 펼쳐진 잿빛 바다로 이어졌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이라면 강이었고, 동네 자체는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그들이 이곳으로 휴가를 온 이유는 순전히 이곳을 좋아하는 루디 때문이었다. 유서 깊은 서구 바닷가의 작은 마을, 가장 폐쇄적이고 가장 무더우며 얼마 전까지도 세계 대전에 휩쓸렸던, 역사의 풍파가 끊이지 않았던 곳.

아닌 게 아니라 이레 전, 정확히는 이레 반 전에, 루디의 별장 뒷산에서 지뢰가 터져 한 청년이 폭사했다.

16쪽,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마르그리트 뒤라스, 장소미 옮김, 녹색광선

 

 

사라와 자크 부부는 친구들과 함께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로 여름 휴가 여행을 왔다. 친구 루디와 지나는 서로를 못 잡아 먹어 안달이라는 듯 얼굴만 마주치면 싸워 대지만 처음 보는 사람도 그 둘이 영원한 한 쌍이라고 느낄 정도로 친밀감을 과시하는 부부다. 지적인 다이아나는 싱글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데 그녀와 자크는 오랜 친구다. 네 살 짜리 아들을 둔 사라와 자크는 큰 불화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권태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관계처럼 보인다. 더위가 극심해 광장에 단 하나 남아 있던 플라타너스 나무마저 시들어버렸다. 휴가에 대한 기대는 더위와 함께 한풀 꺾여버렸고, 익숙한 관계에도 새로운 바람이 필요한 시점. 사랑과 삶에 권태를 느끼는 여주인공 사라는 비가 내리길 기다리며 낯선 남자와 은밀한 시선을 주고 받는다.

 

이야기는 세 가지 사건으로 시작된다. 사라는 남편 자크와의 말다툼 끝에 친구 루디가 자신에 대해 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마을을 둘러싼 산에서는 지뢰가 폭발하는 바람에 한 젊은이가 죽었고, 그의 시신을 주워 모은 늙은 부모는 사망신고서에 사인하기를 거부한채 산에 머물고 있다. 때마침 해변에는 멋진 보트를 탄 낯선 남자가 등장해 사라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낸다. 밤에도 식지 않는 더위로 늘어진 시간 속에 당장의 변화는 없다. 느즈막히 일어나 밥을 먹고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낮잠을 자고 다시 물에 들어 갔다 와 저녁을 먹고 공놀이를 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뒤라스 특유의 나른하고 차분한 문장들이 지속된다. 그러면서도 사라와 루디 사이에 쳐진 장막과 사라와 장과의 관계, 노파의 거취 등이 묘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나도 우리가 어느 선에선, 그러니까 잘못 표현하거나 거짓으로 말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선에선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 이전도, 이후도 아닌 딱 그 경계에서. 하지만 그래도 난 기를 쓰고 침묵을 고수하는 사람들보다 그 경계에 부딪쳐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 경계를 허물고 표현해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더 좋아.(…)

“어쩌면 말보단 다른 걸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말과 똑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키면서 우리를 똑같이 홀가분하게 해 주는 다른 거.”

138-139쪽

 

 

 

다섯 명의 친구와 남자까지 더해 여섯의 대화는 이야기의 큰 흐름을 만든다. ‘공통적으로 엄격한 분야가 있는데 그게 언어’라고 할 정도로 이들은 말과 대화를 중시한다. 질문하고 답하고, 말하면서 서로를 확인하고 관계의 의미를 되짚는다. 그 속에는 말이 아닌 것, 말하지 않는 것으로 말과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한 실험도 존재한다. 침묵과 시선이다. 자크를 바라보는 사라, 남자가 사라를 바라보는 시선 등 ‘바라봄’을 통해 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렇다. 그들은 모두가 불편하게 여기는 노파에게 점심을 가져다 주고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한다. 이런 행위야 말로 ‘사망신고서에 사인하라’는 말 이상의 효과로 사람들을 ‘홀가분하게’ 해준다. ‘어쨌든 인생의 경험 중에 다른 경험보다 더 중대한 경험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야’, ‘우리 시대가 아무리 끔찍해 보인다 해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거였어’와 같은 루디의 말과 연결되어 그들의 대화와 행동은 의미를 더한다.

 

소설 속에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진다. 사라의 아들에 대한 지극한 모성애와 죽은 아들에 대한 노파의 사랑, 루디와 지나, 자크와 사라, 그리고 식료품상 등을 통해 보여지는 부부라는 지속된 관계 속의 사랑 그리고 사라와 장 사이에서 타오르는 순간의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동일한 단어가 쓰이지만 대상과 관계에 따라 그 속성은 다양해진다. 이성간의 사랑일지라도 각각이 가진 사랑의 의미와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루디와 지나처럼 서로 적대적이지만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는 반면, 식료품상처럼 사랑하게 되면서 떠나고 싶어지는 관계도 있는 것이다.

 

 

 

 

어부가 사라에게 원숭이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던 하구의 늪지, 그 잿빛 강에서 그와 똑같이 완벽하고 침착하게 그물을 던졌던 다른 어부들을 상기시켰다. 정신을 조금만 집중해도, 바람에 잎이 떨어진 야자수의 신음과 바다의 포효가 뒤겄이고 거기에 맹그로브 나무들 사이를 뒤놀던 원숭이들의 깍깍거림까지 가세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들은 사라와 오빠, 그렇게 둘이었고, 조각배를 타고서 쇠오리를 사냥했더랬다. 이젠 오빠는 죽고 없다.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사라는 삶의 그런 원리에 익숙해졌다고 믿었고 그 범주 안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79쪽

 

 

 

 

 

여름 휴가는 무더위와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지지부진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지나와 루디는 매번 반복되는 다툼 속에서 사랑을 확인하며 권태에 빠져드는 것을 거부한다. 친구들은 익숙한 관계가 휴가를 망친다고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지지하겠다는 믿음을 확인한다. 사라는 장과의 만남으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욕망이 살아나지만 잠시 뿐이었다. 사라와 장, 자크 세 사람 사이를 오갔던 긴장감은 사망신고서를 거부하는 노파의 슬픔과 쌍을 이루며 이어졌다. 하지만 사라의 욕망은 사그라들고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던 노파의 고집도 거두어 진다. 끝내 모든 긴장이 잦아든다. 시간이 지나면 격렬했던 감정은 고요해지고 자연스럽게 흘러 제자리를 찾는다. 삶이란 어쩔 수 없는 상실을 거치게 마련이고 그걸 받아 들이고 나서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욕망과 권태, 죽음에 대한 슬픔, 이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게 인간의 삶이고 그 속에서 내밀한 욕구는 결코 온전히 충족될 수 없다. 하지만 그 모순을 끌어 안고서만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삶에서 사랑이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이어야 하고.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는 강물을 마주한 채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 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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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시절 열린책들 세계문학 103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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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시절>은 버마 원주민들에게 가하는 영국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인 동시에, 그러한 제국주의가 인간의 보편적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탐색하는 날카로운 시선이다. 즉 피지배자들은 물론 지배자 자신들조차 자기 파멸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무력하게 죽어가는 플로리처럼 제국주의라는 정치 메커니즘에 항거를 하는 이든, 혹은 클럽 회원처럼 그 메커니즘에 봉사해 권력을 휘두르는 이든, 거기에 속한 인간 개개인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파멸하거나 타락한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제국주의라는 현실 세계는 지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지만, 그 본질은 또 다른 모습으로 오늘날 이 순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390쪽, 옮긴이의 말, 박경서 <버마시절>, 열린책들

 

조지 오웰의 <버마시절>은 영국 식민지 버마를 배경으로 백인 지식인 플로리가 느끼는 환멸과 절망감, 외로움과 패배의식을 그와 주변인들의 관계를 통해 드러내는 소설입니다. 그는 제국주의와 백인 지배계층의 허상을 알고 비난을 일삼지만 변혁을 위한 실천적 방법을 모색하기보단 갈등을 회피하며 내면으로만 괴로워하는 나약한 지식인입니다. 엘리자베스라는 젊은 영국 여인의 등장과 함께 그녀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절망적이었던 식민지에서의 삶을 바꾸어 보고자 희망하지만 부패 관리의 계략에 휩쓸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자 자살을 선택하고 말지요. 원주민을 극도로 혐오하는 엘리스로 대표되는 백인 집단과, 자신의 입신과 명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악무도한 부패 관리 우 포 킨, 원주민으로 지식과 교양을 갖추었고 신뢰할 만한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지만 식민사관에 갇혀 있는 베라스와미, 속물근성에 사로잡혀 진실된 사랑을 찾지 못하는 엘리자베스 등 다양한 인물을 통해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모두가 불행한 식민지의 실상이 그려집니다. 특히 식민지배를 겪은 우리의 입장에 빗대어보면 각 인물에 대한 생각이 묘하게 색을 바꾸면서 당시의 상황이 더욱 슬프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그 후 해가 바뀔 때마다 그는 더 외로웠고 더 비참한 심정이 들었다. 그의 사고의 중심에 자리 잡고 모든 것을 증오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자신이 소속되어 살고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더욱더 심한 증오였다. 왜냐하면 철이 들면서-우리는 우리의 두뇌가 명석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미 그릇된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두뇌가 뒤늦게 발달하여 자신들의 비참한 삶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이들이 겪는 비극 중 하나이다 – 그는 영국인들과 그들의 제국에 대한 진실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전제 정부이다. 분명히 자비롭긴 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약탈인 전제 정부이다. 그리고 플로리는 같은 사회 속에 살면서 <백인 나리>가 된 동양의 영국 사람들을 미워한 결과, 이제 그들에게서 어떠한 정당성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불쌍한 악마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 나간다. 머나먼 오지에서 보잘것없는 봉급을 받으면서 30년을 보내고 난 뒤 술로 간이 망가지고 등은 파인애플처럼 쭈글쭈글해져 고국에 돌아온 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류 클럽의 귀찮은 시민으로 전락해 버린다. 또 한편으로 백인 나리들은 이상화될 수도 없다. <제국의 전초 기지>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적어도 유능하고 열심히 일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환상이다.

92~93쪽

제국주의라는 배경 장치 속에서 인물들은 내적 갈등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합니다. 마치 정해진 위치에서 꼭두각시처럼 자신의 배역만 연기하고 있다는 인상이 들지요. 조지 오웰이 말하려고 했던 제국주의의 비극 속에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주체적인 고민과 의지력을 상실한 채 떠밀려가듯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무기력함도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인물들의 만남과 이어지는 사건 속에서 역동적인 변화의 모습을 드러내거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고 선택을 모색하는 인물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생각을 절대적으로 믿는 편협하고 나약한 인간들만이 지독한 더위 속에 삶을 지속하지요. ‘사랑’이라는 격렬한 감정을 통해 삶의 변화를 기대했던 플로리 마저도 아름다운 백인 여성이라는 거짓된 허상에 사로잡히고요. 자신들의 처지를 체념하듯 받아들인 원주민들의 가난하고 비참한 삶과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혀 부당한 권리와 차별을 당연하게 누리는 지배층의 거짓된 삶이 진흙탕처럼 뒤엉켜 흘러 나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누군가가 기대하는 역할을 의심없이 지속하는 일은 이토록 쉽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당연하다고 믿었던 역할을 의문없이 이행한 삶의 끝에 반드시 행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무기력과 절망, 더한 경우 타락과 파멸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을까요, 나에게 주어졌다고 믿고 있는 역할에 거짓이나 허울은 없을까요.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는 생각이 누군가를 배척하고 타인의 희생을 전제로한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요. 조지 오웰의 소설을 통해 지금의 삶을 되짚어 보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버마시절>에서 작가는 식민지에서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제국주의의 비극을 독특한 특성을 지닌 인물들을 통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의 탁월한 문장은 식민지의 배경과 인물의 심리를 촘촘하게 묘사해냅니다. 버마의 끈적한 더위 속을 한바탕 헤매고 나온 듯, 빨려 들어 읽고 나면 씁쓸한 슬픔에 사로잡히고 말지요. 조지 오웰 특유의 비관주의와 냉소주의가 직시한 제국주의의 실상에서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그녀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든 것은 그가 행한 짓이 아니었다. 추악한 짓을 천 번을 해도 그녀는 그를 용서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치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순간 그의 흉측한 얼굴에 나타난 추악함을 보고 난 뒤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결국 플로리를 파멸시킨 것은 그의 모반이었다. (…)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나병 환자나 미친 사람을 싫어하는 만큼이나 그를 증오했다. 본성은 이성이나 심지어 이기주의보다 무서운 것이다. 그녀는 숨쉬기를 멈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성을 거스를 수 없었다.

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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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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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한 통찰, 특유의 유머와 통쾌한 독설’로 알려진 조지 오웰(1903-1950). 그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은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글이 다수라 쉬이 읽히지 않는다. 딱딱하거나 난해하다는 인상에 눌려 몰입하기 전에 덮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꽂히기만 한다면, ‘조지 오웰’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은 식민지 간부에서 밑바닥 생활까지를 어우르는 실질적 체험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힌 작가로 유명하다. 이러한 경험은 다양한 주제의 글과 정치적 논쟁에서 인간 중심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다. 날선 통찰과 탐색을 통해 자신과 인간 내면에 대한 진솔한 민낯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던 작가 조지 오웰, 그는 '정치적 글쓰기'를 주장했다. 지식인으로서, 작가로서 정치적이어야만 한다는 그의 주장은 흔히 권력 다툼으로 치닫는 ‘정치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정치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통렬한 비판을 일삼는 이 작가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품게 된다.

『나는 왜 쓰는가』에는 <코끼리를 쏘다>, <나는 왜 쓰는가>를 비롯한 27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시대와 사회적 배경이 촉구했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한 글(<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민족주의 비망록> 등)들 사이로 <서점의 추억> <행락지> <물속의 달>, <두꺼비 단상>처럼 그의 인간적 면모와 자연에 대한 태도를 짐작해볼 수 있는 짧고 재치있는 글을 만날 수 있다. <정말, 정말 좋았지>에서는 유년기를 더듬는 자전적 글을 통해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그의 성장 과정과 내면의 변모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글이 쓰여진 지 백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글이 던지는 질문과 사색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지성과 자각을 일깨운다. 각성은 시대를 떠나 필수적인 요소임을 확인하게 한다. 한 번에 소화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 읽고 나면 다시 꺼내 읽게 될 확률이 99%는 되지 않을까, 감히 짐작해본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 오웰은 글쓰기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나의 경우 쓰기는 ‘나와 타인, 세상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고 세상을 알기 위해 쓰기라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후 쓰기는 ‘아쉬움’에 매달리고 있었다.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졌다. 존재를 휘감았던 슬프고 아름다웠던 순간이 사라져버리는게 아쉬워 썼다. 이것은 ‘기록’에 가까웠고 어떤 면에서 ‘역사적인 충동’에 해당했던 것 같다.

한때 ‘외부 세계에 대한 아름다움’을 언어로 포착하고 싶다는 갈망도 있었다. (미학적인 열정) 하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타고난 감각과 감식안, 그리고 재능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깨달음에 다다랐다. 지금은 쓰기에 대한 갈증과 열망으로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단순히 과거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정치적 열정)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오웰 읽기 또한 그런 맥락 하에서 하고 있고. 쓰는 일을 지속하고 훈련하다 보면 미학적 관점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하지만 이 모든 열망의 가장 밑바닥에는 ‘순전한 이기심(‘똑똑한 여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없진 않다고 고백해야겠다.

여전히 ‘아쉬움’때문에, 쓰는 일의 곁을 맴돈다. 사라지는 것들을 남겨두고 싶어 쓴다. 그리고 무엇보다 쓰기에 이토록 몰두하는 이유에는 설터가 말하는 글쓰기에 대한 믿음이라는게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글쓰기가 다른 일보다 훌륭한 일이라는 믿음이 늘 잠복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결국에는 글쓰기가 더 훌륭하다는 게 입증되리라는 믿음이.”

(제임스 설터,『나는 왜 쓰는가: 소설의 기술에 대한 생각』(1999년) 중에서)

소멸을 향해 가는 인생의 시간을 쏟아 부을 만한 훌륭한 일이란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여러번 물었다. 답은 늘 '쓰기’였다.

 

 

1.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 그런가 하면 소수지만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는 재능 있고 고집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끼치는 영향,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 기쁨이기도 하다.

(...)

3.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 정치적 목적.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저항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293-294쪽, <나는 왜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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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유효숙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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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 설명이 불가능한 것을 끝내 언어로 옮기고자 하는 지독한 노력이 치열하게 적어내린 낱낱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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