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시절 열린책들 세계문학 103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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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시절>은 버마 원주민들에게 가하는 영국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인 동시에, 그러한 제국주의가 인간의 보편적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탐색하는 날카로운 시선이다. 즉 피지배자들은 물론 지배자 자신들조차 자기 파멸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무력하게 죽어가는 플로리처럼 제국주의라는 정치 메커니즘에 항거를 하는 이든, 혹은 클럽 회원처럼 그 메커니즘에 봉사해 권력을 휘두르는 이든, 거기에 속한 인간 개개인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파멸하거나 타락한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제국주의라는 현실 세계는 지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지만, 그 본질은 또 다른 모습으로 오늘날 이 순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390쪽, 옮긴이의 말, 박경서 <버마시절>, 열린책들

 

조지 오웰의 <버마시절>은 영국 식민지 버마를 배경으로 백인 지식인 플로리가 느끼는 환멸과 절망감, 외로움과 패배의식을 그와 주변인들의 관계를 통해 드러내는 소설입니다. 그는 제국주의와 백인 지배계층의 허상을 알고 비난을 일삼지만 변혁을 위한 실천적 방법을 모색하기보단 갈등을 회피하며 내면으로만 괴로워하는 나약한 지식인입니다. 엘리자베스라는 젊은 영국 여인의 등장과 함께 그녀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절망적이었던 식민지에서의 삶을 바꾸어 보고자 희망하지만 부패 관리의 계략에 휩쓸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자 자살을 선택하고 말지요. 원주민을 극도로 혐오하는 엘리스로 대표되는 백인 집단과, 자신의 입신과 명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악무도한 부패 관리 우 포 킨, 원주민으로 지식과 교양을 갖추었고 신뢰할 만한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지만 식민사관에 갇혀 있는 베라스와미, 속물근성에 사로잡혀 진실된 사랑을 찾지 못하는 엘리자베스 등 다양한 인물을 통해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모두가 불행한 식민지의 실상이 그려집니다. 특히 식민지배를 겪은 우리의 입장에 빗대어보면 각 인물에 대한 생각이 묘하게 색을 바꾸면서 당시의 상황이 더욱 슬프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그 후 해가 바뀔 때마다 그는 더 외로웠고 더 비참한 심정이 들었다. 그의 사고의 중심에 자리 잡고 모든 것을 증오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자신이 소속되어 살고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더욱더 심한 증오였다. 왜냐하면 철이 들면서-우리는 우리의 두뇌가 명석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미 그릇된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두뇌가 뒤늦게 발달하여 자신들의 비참한 삶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이들이 겪는 비극 중 하나이다 – 그는 영국인들과 그들의 제국에 대한 진실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전제 정부이다. 분명히 자비롭긴 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약탈인 전제 정부이다. 그리고 플로리는 같은 사회 속에 살면서 <백인 나리>가 된 동양의 영국 사람들을 미워한 결과, 이제 그들에게서 어떠한 정당성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불쌍한 악마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 나간다. 머나먼 오지에서 보잘것없는 봉급을 받으면서 30년을 보내고 난 뒤 술로 간이 망가지고 등은 파인애플처럼 쭈글쭈글해져 고국에 돌아온 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류 클럽의 귀찮은 시민으로 전락해 버린다. 또 한편으로 백인 나리들은 이상화될 수도 없다. <제국의 전초 기지>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적어도 유능하고 열심히 일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환상이다.

92~93쪽

제국주의라는 배경 장치 속에서 인물들은 내적 갈등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합니다. 마치 정해진 위치에서 꼭두각시처럼 자신의 배역만 연기하고 있다는 인상이 들지요. 조지 오웰이 말하려고 했던 제국주의의 비극 속에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주체적인 고민과 의지력을 상실한 채 떠밀려가듯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무기력함도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인물들의 만남과 이어지는 사건 속에서 역동적인 변화의 모습을 드러내거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고 선택을 모색하는 인물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생각을 절대적으로 믿는 편협하고 나약한 인간들만이 지독한 더위 속에 삶을 지속하지요. ‘사랑’이라는 격렬한 감정을 통해 삶의 변화를 기대했던 플로리 마저도 아름다운 백인 여성이라는 거짓된 허상에 사로잡히고요. 자신들의 처지를 체념하듯 받아들인 원주민들의 가난하고 비참한 삶과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혀 부당한 권리와 차별을 당연하게 누리는 지배층의 거짓된 삶이 진흙탕처럼 뒤엉켜 흘러 나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누군가가 기대하는 역할을 의심없이 지속하는 일은 이토록 쉽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당연하다고 믿었던 역할을 의문없이 이행한 삶의 끝에 반드시 행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무기력과 절망, 더한 경우 타락과 파멸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을까요, 나에게 주어졌다고 믿고 있는 역할에 거짓이나 허울은 없을까요.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는 생각이 누군가를 배척하고 타인의 희생을 전제로한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요. 조지 오웰의 소설을 통해 지금의 삶을 되짚어 보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버마시절>에서 작가는 식민지에서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제국주의의 비극을 독특한 특성을 지닌 인물들을 통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의 탁월한 문장은 식민지의 배경과 인물의 심리를 촘촘하게 묘사해냅니다. 버마의 끈적한 더위 속을 한바탕 헤매고 나온 듯, 빨려 들어 읽고 나면 씁쓸한 슬픔에 사로잡히고 말지요. 조지 오웰 특유의 비관주의와 냉소주의가 직시한 제국주의의 실상에서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그녀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든 것은 그가 행한 짓이 아니었다. 추악한 짓을 천 번을 해도 그녀는 그를 용서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치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순간 그의 흉측한 얼굴에 나타난 추악함을 보고 난 뒤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결국 플로리를 파멸시킨 것은 그의 모반이었다. (…)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나병 환자나 미친 사람을 싫어하는 만큼이나 그를 증오했다. 본성은 이성이나 심지어 이기주의보다 무서운 것이다. 그녀는 숨쉬기를 멈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성을 거스를 수 없었다.

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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