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올 사랑 - 디스토피아 시대의 열 가지 사랑 이야기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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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감염병이 삶을 뒤흔든 작년, 우리는 기후 위기라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연 이은 폭우 뒤로 폭염이 지속되었다. 계절이 바뀌자 한파가 몰아닥치고 많은 눈이 내렸다. 지구의 온도는 상승했고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높아졌다. 우리가 무분별하게 쓰고 버린 것, 그리고 할퀴고 상처 낸 것이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이상 기후로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는 “당장 2021년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몇 년 뒤를 생각하고 살아?”(p.38)라는 자기 중심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이 더 문제고, 경제가 더 중요하다는 논리에 밀려 미래에 대한 걱정은 늘 뒤로 밀려났다. 그런데 이대로도 정말 괜찮은 걸까.

 

 

라디오 피디이자 세월호 참사 관련 팟 캐스트를 제작하기도 했던 정혜윤은 코로나 19와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전염병과 관련된 온갖 자료를 섭렵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었던 1348년 경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을 읽게 된다. 무수한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쓰여진 책에는 슬픔과 상실이 주를 이룰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사랑의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흑사병이 초토화시킨 지구에서 하필이면 ‘사랑’에 대해”(p.20) 보카치오가 썼다는 것에 저자는 주목한다. ‘이전에는 없었던 사랑’에 대한 은유일까, ‘앞으로 올 사랑에 대한 가능성’일까.

 

 

그의 고민은 코로나 19로 상실과 고립,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막막함에 처한 우리 시대야 말로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으로 옮겨간다. 우리의 삶은 위태로워졌다. 당연하게 여겼던 ‘토대부터 흔들리는 상황’이다. “가치있는 변화만이 유일한 희망”(p.20)이 될 수 있다며 저자는 새로운 시대를 살기 위해 새로운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이야기를 펼쳤던 방식을 좇아 열흘에 걸쳐, 열 가지의 주제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쓰여진 책이 『앞으로 올 사랑』(정혜윤, 위고, 2020)이다.

 

 

정혜윤은 열흘에 걸쳐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부터 미셸 우엘백의 『세로토닌』, 마거릿 애트우드의 ‘미친 아담’ 3부작,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 등 다양한 문학 작품을 넘나들며 레이첼 카슨과 릴케, 존 버거, 어슐러 K. 르귄, 슬라보예 지젝까지 시대의 지성에게서 지혜를 빌어온다. 거기에 과학과 환경을 아우르는 온갖 자료를 연결하여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망하고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랑’을 탐색한다. 그리고 지구가 달려가는 방향이 ‘디스토피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성장과 개발, 경제’의 논리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사고할 것을 촉구한다. 성장이 아니라 장기적 생존으로 방향 전환이 필요함을 주장하며 저마다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의 감정을 두드린다.

 

 

‘경제’라면 만사형통인 세상은 무분별한 개발과 대규모 자본의 횡포를 방관했고 그로 인해 자연 자원의 파괴와 원주민들의 식량 문제, 빈곤이 심화되었다. 식량과 빈곤 문제는 부시미트(육상척추동물의 고기를 가리키는 명칭) 소비의 증대를 가져왔고 동물 몸에 살고 있는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파되는 인수공통감염병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이윤과 성장에 기반을 둔 공장식 축산업은 동물 학대를 당연시 여겼고 이에 순응하는 사이 다른 생명의 고통에 아파하고 연민을 느끼는 인간의 선한 본성은 무감각해졌다. ‘생명과 삶의 전 과정에 대한 돈의 지배’는 강화되었지만 우리는 ‘무지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러는 사이 자연과 생명, 공존의 가치는 무너졌다.

 

 

조류독감이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죽음에는 개인의 서사 너머로 사회 구조와 시스템에 얽힌 무수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혼자 살아가지 않으며 서로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살아가는 일은 자신만을 바라보는게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코로나 19라는 감염병의 유행은 우리가 고려해야하는 관계 속에 “반드시 동물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p.216)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동안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철저히 ‘인간’과 ‘경제’ 중심이었다면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법은 ‘인간중심주의’ 사고에서 벗어나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길을 잃을 때는 이야기를 미래의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하고 앞날이 알고 싶다면 지향점과 방향성이 가리키는 쪽을 봐야 한다. 우리 시대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뿐이다.”

p.284 『앞으로 올 사랑』(정혜윤, 위고, 2020)

 

 

 

 

저자가 지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가능성은 ‘사랑’에 있다고 말한다. 레이첼 카슨이 자연을 향해 품었던 순수한 ‘경이로움’과 살충제의 남용으로 자연과 건강의 위협을 막기 위해 『침묵의 봄』을 썼던 마음에는 ‘사랑’이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치의 공격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식물 연구소의 종자씨를 지켜낸 사람들의 행동은 인간에게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노력과 사랑’이 존재함을 알려주며, 『존 버거의 사진으로 쓴 글』 속 토니오와 안토닌이 나눈 포옹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가슴 아파하고 슬퍼할 수 있는 선한 본성이 우리에게 있음을 일깨운다. 저자는 지구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풍요로운 삶을 지속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을 회복하고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라고 전한다.

 

바뀌지 않는다면, 지구 온난화는 가속화되고 식량난과 함께 주거난이 밀어닥칠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남겨질 세상은 그야말로 소설 속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저자의 지극한 ‘사랑’이 우리의 무지를 깨고 무관심했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인수공통감염바이러스’가 왜 생겼는지, 인간이 동물과 자연에게 가하고 있는 학대와 우리를 지배하는 세상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면 일말의 고통과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픔을 느끼는 것, 거기에 변화의 시작이 있다.

 

 

 

 

 

아파해야 한다. 그 아픔을 막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 또한 아파해야 한다. 가슴 아파함 없는, 안쓰러움 없는, 연민 없는 사랑은 없다. 가슴 아파할 수 있음이 앎과 변화를 낳는다.

p.54~55

 

 

 

 

냉장고에 달걀이 떨어졌지만 급히 채우지 않기로 했다. 책을 통해 양계장의 실태를 알고 나자 닭장에 갇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암탉의 얼굴이 눈 앞에서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태어나자 마자 버려지는 수컷 병아리와, 알을 많이 낳아 살짝만 잡아도 가슴뼈가 으스러진다는 골다공증에 걸린 암탉은,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손쉽게 했던 선택이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공장식 대량 축산의 현실을 생각하면 육식에 대한 마음도 불편해진다. 인간은 자신의 입맛을 채우기 위해 생명을 물건처럼 생산하고 처분해왔다. 필요라는 허울 뒤에는 동물 학대라는 진실이 숨어 있다. 식생활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비 횟수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해보려 한다. 실패하면서 지속하는 시도 속에서 ‘사랑’은 자랄 것이다.

 

 

 

 

 

 

‘잘 자요’는 오늘의 가장 좋은 시도와 내일의 가장 좋은 시도 사이에서 잠드는 거예요.

p.287

 

 

 

 

 

『앞으로 올 사랑』에는 지금 당장의 변화를 모색하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한 본성을 잃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무한하다. 이제 방향을 바꿔야 한다. 내일을 위해 오늘의 가장 좋은 시도를 선택하는 방향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아이들에게 남겨주는 방향으로. 부디 우리의 시도가 너무 늦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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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으로 -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한 가장 지적인 여행
올리비아 랭 지음, 정미나 옮김 / 현암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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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변화는 사람을 들뜨게 하는 마성이 있다. 바로 그 무렵 나는 우즈 강변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모든 것을 말끔히 정리하고 싶던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강으로 가야 한다는 느낌이 솟구쳐 올랐다. 그 뒤로 닥치는 대로 우즈 강 관련 지도를 사들였지만 사도 사도 성에 차질 않았다. 구입한 지도 중 몇 개는 핀으로 벽에 붙여놓기도 했는데, 특히 지형 지질도는 너무 마음에 들어서 침대 옆에 붙여놓았다.

나는 일종의 탐사나 답사를 구상했다. 말하자면 21세기 초입 어느 한여름의 일주일 동안 잉글랜드 한구석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포착해 글로 옮겨보려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구실을 댔다. 사실, 진짜 의도는 말로는 다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일상 세계의 표면 아래에 이르고 싶었다. 잠이 든 사람이 일상의 공기를 떨쳐내고 꿈에 다다르는 것처럼 그렇게.

p. 22~23 <강으로> 올리비아 랭, 정미나 옮김, 현암사

 

 

<강으로>의 저자 올리비아 랭은 ‘삶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사소한 위기’로 어쩌다보니 직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었다. 일상의 지지대가 흔들리던 그때 우즈 강변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강으로, 물로 끌리던 그 마음에는 표류하는 세계의 아래로 침잠해 무언가를 잡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우즈 강의 발원지에서 시작해 바다와 합류하는 지점까지 배낭 하나 둘러 메고 혼자 걷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영국 서식스 지방의 우즈강 근처 습지대에 살았고, 우즈 강으로 걸어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올리비아 랭은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더듬으며 여러 차례 우즈 강을 찾곤 했다. 그녀를 강으로 이끈 것은 버지니아 울프였지만, 강을 둘러싼 자연과 마주하며 길어 올린 영감은 자연에 이끌렸던 무수한 작가와 신화, 시와 소설, 역사적 사건과 과학적 발견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다. 이 책은 작가가 강변을 따라 걸으며 길어 올린 사유에 다양한 레퍼런스가 엮이면서 우즈강처럼 흐른다. 물줄기가 바뀌면서 긴 시간을 품고 변화 무쌍한 풍경을 보여주는 강물처럼.

올리비아 랭은 우즈 강을 바라보며 인간의 근원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순환시키고 지구를 운행하는 시간에 대해 사유한다. 사멸하고 마는 미약한 존재로서 물줄기가 이루어내고 휩쓸고 갔다 다시 만들어낸 역사와 시간을 헤아린다. 다양한 사료와 기록을 통해 과거를 되짚어보는 사이 명확한 것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순간 뿐이라는 걸 깨닫기도 한다. 과거라는 희미해진 기억의 윤곽은 현재를 바탕으로 그려지는 사이 왜곡되기 마련이고 미래란 우리의 능력 밖에 있으니까. 죽음 이전과 이후를 다루는 상상의 세계는 자주 물을 바탕으로 펼쳐지곤 하지만 기실 죽음 이후에는 완전한 소멸 밖에 없다고 작가는 믿는다. 그렇기에 지금, 눈 앞에 흐르고 있는 물줄기 자체, 저 하늘의 푸른 빛, 나에게 주어진 순간만이 전부라고 강조한다.

 

 

이 둥근 행성에서 영구 임대란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거래는 없다. 그리고 내가 비드보다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니지만 돈을 걸고 장담하겠다. 저 밖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햇빛 비치는 들판은 없으며, 설령 그 들판에 이른다 해도 전사 아킬레스가 드랬듯 이 초록빛 지구에서 천하디 천한 농부로 사는 것이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황제로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라고.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지금의 이 돌고 도는 짧은 삶이 전부다. 지금 이 순간 어둠과 어둠 사이에서 정오의 빛이 현실 세계에 내리비쳤다. 시든 꽃이 백악을 장식하다가 내가 언덕의 꼭대기에 이를 즈음 영국해협의 굽이치며 부서지는 파도로 떨어져 내렸다. 데릭 저먼이 영화 <블루>를 통해 말했듯, 바다가 하늘에서 빌려온 푸른빛은 지구 낙원의 색이었다.

p.336

 

 

저널리스트로 전향하기 전 약초 치료사로 활동했던 작가는 강변에 펼쳐진 들풀과 나무, 새의 이름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세밀한 풍경화를 눈 앞에 그려준다. 책장을 넘기는 사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강줄기를 따라 걷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어떻게든 짬을 내어 강변 산책을 해야겠다 다짐하고 양평으로 왔지만 칭얼거리는 아이 때문에 강가는 커녕 큰 길조차 나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집 앞 개울에서 살얼음 언 표면 아래로 흘러가는 작은 물줄기의 명랑한 노랫 소리를 들었고 대한을 넘긴 햇살에서 봄의 기별도 느낀 듯 하다. 물줄기는 어김없이 아래로 흐르고 시간은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올리비아 랭을 우즈 강으로 이끌었고, 물줄기를 따라 걷는 내내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 준 건 버지니아 울프다. <강으로>의 구석구석에서 울프의 작품과 그녀의 생애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자 울프의 소설과 그의 생애가 더 궁금해졌다. 새해를 시작하며 마음먹었듯, ‘울프 읽기’를 시작해야겠다.

 

 

우리 모두는 시간이 짠 얼개에 붙잡혀 있다. 내 옆으로 흐르는 개울은 동쪽으로 확고부동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바늘처럼 제때제때 한 땀씩 꿰어가면서. 바로 그것이 세상 이치가 아닐까.

p.84

 

 

작가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시간에 사로잡혀 흘러가고 있다. 그런 삶에서 강물처럼 제때제때 한 땀씩이라도 꿰어가고 있을까.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말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 돌아가는 이치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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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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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질문하는 책이 있다. 책의 서두에서 한 번, 중반을 넘어서 한 번. 첫번째 질문은 가볍지만 두번째 질문의 무게는 사뭇 다르다. 책을 읽는 사이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리베카 솔닛과 연결된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한다.

솔닛의 글은 쉽지 않다. 자전적인 이야기와 성찰에서 출발해 예술과 문화에 대한 비평을 잇고, 환경과 인간의 역사를 엮으며 사회와 정치 문제로 나아가는 글이라 깊고 넓다. 작가이자 역사가이면서 현장운동가로서의 이력으로 자신의 경험을 사회 문제로 확장하고 문학과 예술을 엮어 사유한다.『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김명남 옮김, 창비, 2015)를 통해 일부 남성들의 ‘맨스플레인(man+explain)’ 현상을 비판해 세계적인 공감과 화제를 몰고 왔고 특유의 재치와 서정적 글쓰기로 산문의 위상을 다르게 보게 하는 저서를 썼다. 『멀고도 가까운』(김현우 옮김, 반비, 2016) 또한 그런 흐름 속에 있다.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여성주의를, 다양한 문학작품과 예술작품, 환경과 사회 정치 문제를 엮으며 연대와 변화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어느 날 리베카 솔닛 앞에 100파운드의 살구 더미가 떨어진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고 그녀 또한 유방암일지 모르는 이상 조직의 공격을 받는다.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흐르는 상황에서 살구는 풀어야할 이야기 또는 해결해야하는 문제에 대한 비유다. 솔닛은 섞고 멍들어가는 살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거나 넘어선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우연한 인연으로 아이슬란드로 떠나기도 한다. 얼음으로 가득 찬 북구에 대한 상상은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을 끌어내고, 자신의 아이가 죽는 경험 속에서도 영원히 죽지 않는 작품을 남긴 메리 셸리의 삶을 되짚는다. 그녀 삶의 여정 사이로 그림 동화 『백조 왕자』, 『눈의 여왕』, 체 게바라를 다룬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등 다양한 레퍼런스가 겹쳐진다. 색색깔의 실처럼 놓여진 이야기를 잣고 엮는 사이 그녀만의 태피스트리는 완성된다. 거기에는 억압 속에 일그러진 욕망을 딸에게 투사했던 어머니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용서를 비롯해, 인간의 유한성과 필멸에 대한 깨달음, 공감을 통한 연대와 삶을 연결하고 변화의 물길을 그리는 이야기의 힘이 수놓아져 있다.

살구가 변하는 사이 솔닛 자신도 변했다. 변화는 다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사람들과 연결하고 반응하는 사이 일어났고 인생의 고비를 넘기게 했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체 게바라가 나병 환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혁명을 이끈 인물로 거듭났던 이야기를 통해 솔닛은 감정이입과 공감의 필요성을 말한다.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동일시는 애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신적 자아의 한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사랑의 한계다. 그러니까 사랑은 확장된다는 이야기다.’ (p158) 타인의 고통에 감정 이입하고 공감할 때 자아의 경계를 확장하고 연대할 수 있다고 솔닛은 말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삶도 사람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가 선택하고 연결한 이야기가 삶을 바꾼다. 그렇기에 솔닛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당신을 듣는 이는 누구인가로 바뀌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에 이름을 지어 주고, 그런 다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p15) 이야기 자체보다 누구와 연결되고 어디로 확장하는지, 그 변화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한다.

『멀고도 가까운』은 하나의 미로와 같은 책이다. 어둠 속에 잠긴 미로의 여백을 더듬어 길을 찾아 나오면 입구로 들어갔다 입구로 되돌아 나왔다는 걸 알게 된다. 무언가를 만나는 일은 미로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이 책은 『천일야화』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솔닛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거기서부터 당신의 이야기 혹은 누군가의 삶의 조각을 꿰매 나갈 수 있다. 솔닛은 래프팅을 떠나 마주한 콜로라도 강물에 천천히 걸어 들어갔던 일화로 글을 마무리한다. 강물처럼 ‘계속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삶이고 삶이 흐르는 한 자아를 확장하며 누군가와 연결되는 여정은 계속될 것이라는 듯. 한 번쯤 자신의 이야기를 써 보고 싶은 꿈을 가진 이에게 이 책은 나만의 것을 잣기 위해 골라내야 할 실을 찾고 어떻게 직조해 나가는지 알려주는 설명서가 되어 줄 것이다. 또한 살아가는 일이 타인과의 연대임을 감지했던 이에게, 혹은 솔닛의 살구더미와 같은 위기에 놓여 타인과의 연결이 절실한 이에게 따뜻한 위로와 변화의 희망을 건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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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패티 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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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던 중 패티 스미스의 『몰입』을 읽게 되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런데 『몰입』은 세계적인 뮤지션이자 시인 패티 스미스가 시몬 베유와 카뮈에 몰입하면서 얻었던 영감을 쏟아낸 책이었다. 책의 첫번째 파트,「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은 급작스런 프랑스행에 시몬 베유의 책을 들고 가는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아파트에 쌓아둔 읽지 않은 책 더미 맨 위에 프란신 쉬 플레식스 그레이가 쓴 시몬 베유에 대한 논문과 표지에 깜짝 놀란 작가의 얼굴이 실려 이는 모디아노의 <혈통>이 있다. 나는 두 책을 낚아채다시피 집어 들고, 내 작은 아비시니안 고양이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공항으로 향한다.

(...)

천재성과 특권을 겸비했던 베유는 고급 교육의 위대한 강당들을 거쳤으나 훌훌 다 버리고 혁명, 현현, 공공에의 봉사, 희생이라는 어려운 길을 떠났다.

20-21쪽,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몰입』 중에서, 패티 스미스, 마음산책

 

 

사소한 행동 하나가 새로운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경우가 있다. 패티 스미스에게 베유의 책이 그랬다.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을 통해 낯설었던 작가의 삶과 세계에 몰입하게 되는 경험은 여정 속에서 무의식적인 나침반으로 작용한다. 여행 중 마주친 상황-호텔 방 텔레비전으로 본 피겨 스케이팅 중계, 발레리의 무덤을 찾아 간 곳에서 마주친 누군가의 묘석에 씌여진 글귀, ‘헌신’-과 베유의 무덤을 찾아 헤맨 경험 사이에서 피어오른 영감에 사로잡혀 패티 스미스는 글을 쓴다.

호텔 방에서,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정신없이 써내려간 글, 「헌신」은 짧은 소설로 완성되었다. 책에 실린 두번째 글이다. 소설 속에는 피겨 스케이팅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유대계 소녀가 등장한다. 이름은 유지니아, 강제수용소에서 부모를 잃은 열 여섯 소녀로 이모와 함께 살고 있다. 숲 속 얼어있는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는데만 몰두하는 그녀에게 스케이팅은 완벽의 세계다. 이모가 그녀를 떠나자 스케이팅을 계속하기 위해 자신을 훔쳐보던 삼 심대 후반의 알렉산더를 찾아가고 그와의 만남으로 소녀는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징표는 없어. 별도 십자가도 손목에 새겨진 숫자도 아니야. 우리는 우리 자신이야. 네 재능은 오로지 너로부터 나오는 거야.

109쪽, 「헌신」,『몰입』 중에서, 패티 스미스, 마음산책

 

 

오로지 스케이팅에 ‘헌신’하고자 했던 유지니아의 삶은 짧게 피어났다 사그라든다. 순수한 열정, 스케이트의 날 위에 벼려지는 몰입, 단 하나를 위한 숭배가 단 한 송이의 꽃을 꺾어버리는 이야기. 패티 스미스의 예술에 대한 흠모와 몰입의 열정이 엿보여 강렬하면서 여운이 긴 소설이다. 그런데 「헌신」속 한 장면에 우연처럼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등장한다. 책장을 넘기던 유지니아는 알렉산더가 남긴 메모를 발견한다. ‘삶은 살 가치가 있는가? 나는 살 가치가 있는가?’ 그것은 소설이 던지는 필연적인 질문이 된다.

 

 

운명에는 손이 있으나 그 손이 미리 정해진 건 아니다. 나는 무언가를 찾다가 무언가 다른 것을, 어떤 영화의 예고편을 찾았다. 울림이 깊지만 생경한 목소리에 마음이 동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인용과 참조의 교향악을 소환하는 빛의 주크박스에 이끌려 여행을 떠났다.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추상적 거리들을 배회하며 심지어 내 것조차 아닌 세계를 실로 였었다. 책 한 권을 읽고 시몬 베유의 신비적 행동주의를 알게 되었다. 한 피겨 스케이트 선수를 보았고 완전히 매혹되었다.

46쪽,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몰입』 중에서, 패티 스미스, 마음산책

 

 

우연처럼 흩어진 단초들이 묘하게 연결되어 이끌었던 여정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다. 우연한 만남에 몰입하자 완전한 매혹의 세계가 열렸다. 패티 스미스는 놓치지 않고 그 세계를 새롭게 재창조했다. 「헌신」에서 질문을 던지는 카뮈, 그것은 운명처럼 패티 스미스를 루르마랭에 있는 카뮈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카뮈의 친필 원고를 보고 패티 스미스는 다시금 글쓰기의 열정에 사로잡힌다. 책의 마지막에 실린 「꿈은 꿈이 아니다」에는 카뮈와의 만남에 매혹되어 또다른 몰입의 길로 향하는 그녀 내면의 여정이 담겨 있다. 카뮈에 대한 숭배와 글쓰기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그는 「헌신」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진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내 손가락이 촉침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질문을 추적한다. 젊었을 때부터 내 앞에 놓인 익숙한 수수께끼. 언어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놀이와 친구들과 사랑의 계곡에서 한 박자 바깥으로 물러서기.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합창이 터져 나온다.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129쪽, 「꿈은 꿈이 아니다」,『몰입』 중에서, 패티 스미스, 마음산책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이것은 ‘삶은 살 가치가 있는가? 나는 살 가치가 있는가?’에 조응하는 답이다. 그저 살기만 하는 것으로 삶의 가치는 일궈질 수 없다. 그렇기에 패티 스미스는 글쓰기에 헌신한다. 카뮈와 베유 등, 예술가에 대한 숭배와 흠모, 예술에 대한 열정,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몰입과 헌신은 ‘그저 살기만 할 수 없’는 인간이 삶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최선의 것이 아닐까. 무언가를 향한 몰입과 헌신이야말로 삶에 대한 답을 구하는 길일 것이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패티 스미스의 『몰입』으로, 그리고 다시 카뮈의 『시지프 신화』로 이어지는 독서의 여정에 있다. 다시 카뮈의 책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서 시작되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삶의 의미와 당위성에 대해 어떤 답을 열어 보여줄까? 패티 스미스와의 우연한 만남이 난해하게 다가오던 카뮈의 질문에 영감과 열정의 빛을 실어준다. 그녀의 자유롭고 아름다운 글을 통해 삶과 글쓰기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시적으로 바뀌었다.

패티 스미스처럼 단촐하게 짐을 꾸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가방 맨 위엔 베유와 카뮈의 책을 넣고. 우연이 빚어낸 매혹과 몰입의 순간을 통해 내가 길어낼 영감과 헌신은 어디를 향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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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7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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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려는 것은 가난 그 자체이다. 나는 이 빈민가에서 처음으로 가난을 만났다. 지저분하고 괴이한 삶으로 이루어진 이 빈민가는 처음에는 가난의 실제 교육 현장이 되어주었고 다음에는 내 경험의 배경이 되었다.

132-133쪽,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오웰, 문학동네

 

 

조지 오웰의 소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에는 춥고 더럽고 배고픔이 난무하는 파리와 런던 바닥 인생의 삶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이 책은 작가가 5년에 걸친 식민지 버마에서의 경찰 생활을 접고 돌아와 속죄의 의미로 선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제국주의 통치자의 일원이 되어 버마의 원주민을 착취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 하층민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스스로 ‘백인 원주민’이 되어 가난과 자본주의의 실태와 허상을 대면한 것이다.

조지 오웰은 하층민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노동과 간이 숙소와 구호소 등에서 목격한 가난의 누추한 낯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를 통해 가난에 대해 통찰하고 가난을 양산하는 사회 제도를 비판한다. 굶주림은 영혼을 좀 먹는다. 가난은 생각을 죽이고 미래를 없앤다. 인간은 가난 속에서 당장의 먹고 자는 문제에만 골몰하느라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게 된다. 인간성과 도덕성을 상실한 채 돈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빈민 구호소는 연이어 머물 수 없게 제도화 되어 있어 떠돌이는 다음 숙소를 향해 매일 떠돌 수 밖에 없다. 배고픔 속에 떠도는 일상에서 그들은 구제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지고 ‘떠돌이’의 삶은 악순환된다. 그렇기에 구호소 등을 통해 적절한 의식주를 제공해주고 (질 나쁜 빵과 차로 간신히 허기를 떼우는 정도의 식사가 아니라) 안정된 생활의 발판과 자활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또한 그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주했던 경험을 토대로 ‘떠돌이’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허상이라는 것을 꼬집는다. 사람들이 떠도는 것은 부자들이 이야기하듯 즐기기 위해서 혹은 유목민적 성향을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굶어죽는 것을 면하기 위해' 그들은 떠돌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구걸하는 사람들은 일하지 않기 때문에 경멸받아야 마땅한 기생충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속에서 ‘부자가 될 수 없는 장사’를 택한 실패한 노동자일 뿐이었다. 그들을 향해 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는 교육과 부를 가진 자들에 의해 주입되고 강화된 것이었다.

 

 

가난에 다가가면서 가난으로 인한 어떤 발견을 했기때문이다. 권태라든가 비열할 정도로 쩨쩨한 것, 굶주림의 시초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더불어 가난이 지닌 커다란 장점, 즉 가난은 미래를 말살해버린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

가난에 큰 위안이 되는 또 하나의 감정이 있다. 찢어지게 극심한 가난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이런 감정을 체험했으리라 믿는다. 자신이 마침내 진정 밑바닥까지 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안도감, 아니 거의 쾌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148-149쪽,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오웰, 문학동네

그것은 그들이 적절한 생계비를 벌지 못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일이 유용한지 무용한지, 생산적인 것인지 기생적인 것인지에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이익을 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 돈이 미덕을 가늠하는 위대한 척도가 되었다. 거지는 이 척도에 맞지 않기 때문에 멸시당하는 것이다. (…) 거지란 현실적으로 보면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근로자이다. 그네들은 대부분의 현대인들과는 달리 명예를 팔지 않는다. 그저 부자가 될 수 없는 장사를 택하는 실수를 범했을 뿐이다.

354-355쪽,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오웰, 문학동네

 

 

소설 속 파리와 런던이라는 대도시의 화려한 조명 너머엔 비참한 삶을 근근이 이어가는 극빈층 사람들이 있다. 사회라는 울타리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음에도 그들을 울타리 밖으로 내몰고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극도의 굶주림을 모면할 정도의 음식과 간신히 몸을 누일 수 있는 열악한 환경의 보호소만 제공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고 사회에서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근본적 지원은 없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절대 넘을 수는 없는 선이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선의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먹고 자는 기본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인간 이하의 취급에 내몰리는 것이다. 간이 숙소나 구호소에서 그들이 받는 처우는 감옥에서의 것과 비슷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존엄은 박탈당한다.

‘떠돌이’나 ‘노숙자’, ‘극빈자’라는 단어가 가진 허상과 그릇된 이미지에 대해서도 소설은 비판한다. 교육과 사회적 통념으로 강화된 부정적 이미지가 이들 단어를 맴돈다. 하지만 조지 오웰이 바닥 생활에서 마주했던 군상들은 사회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는 면면의 사람들이었다. 그는 ‘게으르거나 방탕하다’, 혹은 ‘포악하거나 위험하다’는 이미지는 교육에 의해 주입된 허상이라 주장한다. 천성적으로 너그러운 '패디'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했던 '보조', 빌린 담배 꽁초를 갚으며 기분좋은 웃음을 짓던 스코티등을 통해 보통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적 면모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들은 개별의 성격과 취향을 갖춘 누구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현 시대 빈민층이나 노숙자 등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그는 떠돌이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격-비열하고 질투심 많은 데다 자칼같이 간교한-의 소유자였다. (…) 그 따위 너절한 음식을 먹으며 살아왔으니 마침내 육신은 말할 것도 없고, 영혼까지 저절로 타락해버렸던 것이다. 그의 인간성을 파괴한 것은 타고난 악덕이 아니라 바로 영양실조였다.

326쪽,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오웰, 문학동네

 

 

극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회적 책무다. 조지 오웰이 '떠돌이'를 양산하는 당시 영국의 제도와 인간다운 처우를 제공하지 않는 구호소의 행태, 자선의 태도로 국한된 편협한 시선을 비판했듯, 가난에 대한 현대 사회의 복지 제도에도 그런 맹점은 남아 있다. 바람직한 인간성을 갖추는 것은 인간다운 생활이 전제 될 때 가능하다. 생계의 문제가 곧 인간다운 삶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좀먹는 극도의 가난을 사회적으로 방지하고 인간적인 삶을 기본으로 삼는 사회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모두가 동감할 수 있길 바란다. 우선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나 태도에 사회적으로 조장된 편견이 머물고 있지 않은지 조심스레 되짚어 봐야겠다.

조지 오웰은 식민지 버마에서 제국주의 통치에 기여했던 과거에 대한 속죄와 원주민에 대한 죄의식을 씻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바닥으로 '내려감'을 선택했다. 그 체험을 장편서사로 풀어낸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은 오웰의 삶과 사상 그리고 글쓰기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책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가난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함으로써 가난을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실제 체험에 버금가는 경험으로 오웰이 느낀 죄의식을 전염시킨다. 죄의식은 우리의 도덕성을 각성시킨다. 이것이 시작이다.

 

 

나는 접시닦이, 떠돌이, 노숙자의 영혼 속에 정말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다. 내가 본 것은 가난의 표피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결핍 가운데 지내며 한두 가지 배운 점은 있다. 이제 나는 다시는 모든 부랑아들이 술에 절어 사는 막된 놈들이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던져주는 1페니에 쩔쩔매며 고마워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으며, 실직한 사람이 무기력증에 빠져도 놀라지 않고, 다시는 구세군에 도움을 청하지도, 내 옷을 저당 잡히지도, 광고 전단지를 거절하지도, 고급식당에서 식사를 즐기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시작이다.

409쪽,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오웰,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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