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으로 -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한 가장 지적인 여행
올리비아 랭 지음, 정미나 옮김 / 현암사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계절의 변화는 사람을 들뜨게 하는 마성이 있다. 바로 그 무렵 나는 우즈 강변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모든 것을 말끔히 정리하고 싶던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강으로 가야 한다는 느낌이 솟구쳐 올랐다. 그 뒤로 닥치는 대로 우즈 강 관련 지도를 사들였지만 사도 사도 성에 차질 않았다. 구입한 지도 중 몇 개는 핀으로 벽에 붙여놓기도 했는데, 특히 지형 지질도는 너무 마음에 들어서 침대 옆에 붙여놓았다.

나는 일종의 탐사나 답사를 구상했다. 말하자면 21세기 초입 어느 한여름의 일주일 동안 잉글랜드 한구석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포착해 글로 옮겨보려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구실을 댔다. 사실, 진짜 의도는 말로는 다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일상 세계의 표면 아래에 이르고 싶었다. 잠이 든 사람이 일상의 공기를 떨쳐내고 꿈에 다다르는 것처럼 그렇게.

p. 22~23 <강으로> 올리비아 랭, 정미나 옮김, 현암사

 

 

<강으로>의 저자 올리비아 랭은 ‘삶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사소한 위기’로 어쩌다보니 직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었다. 일상의 지지대가 흔들리던 그때 우즈 강변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강으로, 물로 끌리던 그 마음에는 표류하는 세계의 아래로 침잠해 무언가를 잡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우즈 강의 발원지에서 시작해 바다와 합류하는 지점까지 배낭 하나 둘러 메고 혼자 걷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영국 서식스 지방의 우즈강 근처 습지대에 살았고, 우즈 강으로 걸어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올리비아 랭은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더듬으며 여러 차례 우즈 강을 찾곤 했다. 그녀를 강으로 이끈 것은 버지니아 울프였지만, 강을 둘러싼 자연과 마주하며 길어 올린 영감은 자연에 이끌렸던 무수한 작가와 신화, 시와 소설, 역사적 사건과 과학적 발견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다. 이 책은 작가가 강변을 따라 걸으며 길어 올린 사유에 다양한 레퍼런스가 엮이면서 우즈강처럼 흐른다. 물줄기가 바뀌면서 긴 시간을 품고 변화 무쌍한 풍경을 보여주는 강물처럼.

올리비아 랭은 우즈 강을 바라보며 인간의 근원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순환시키고 지구를 운행하는 시간에 대해 사유한다. 사멸하고 마는 미약한 존재로서 물줄기가 이루어내고 휩쓸고 갔다 다시 만들어낸 역사와 시간을 헤아린다. 다양한 사료와 기록을 통해 과거를 되짚어보는 사이 명확한 것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순간 뿐이라는 걸 깨닫기도 한다. 과거라는 희미해진 기억의 윤곽은 현재를 바탕으로 그려지는 사이 왜곡되기 마련이고 미래란 우리의 능력 밖에 있으니까. 죽음 이전과 이후를 다루는 상상의 세계는 자주 물을 바탕으로 펼쳐지곤 하지만 기실 죽음 이후에는 완전한 소멸 밖에 없다고 작가는 믿는다. 그렇기에 지금, 눈 앞에 흐르고 있는 물줄기 자체, 저 하늘의 푸른 빛, 나에게 주어진 순간만이 전부라고 강조한다.

 

 

이 둥근 행성에서 영구 임대란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거래는 없다. 그리고 내가 비드보다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니지만 돈을 걸고 장담하겠다. 저 밖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햇빛 비치는 들판은 없으며, 설령 그 들판에 이른다 해도 전사 아킬레스가 드랬듯 이 초록빛 지구에서 천하디 천한 농부로 사는 것이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황제로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라고.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지금의 이 돌고 도는 짧은 삶이 전부다. 지금 이 순간 어둠과 어둠 사이에서 정오의 빛이 현실 세계에 내리비쳤다. 시든 꽃이 백악을 장식하다가 내가 언덕의 꼭대기에 이를 즈음 영국해협의 굽이치며 부서지는 파도로 떨어져 내렸다. 데릭 저먼이 영화 <블루>를 통해 말했듯, 바다가 하늘에서 빌려온 푸른빛은 지구 낙원의 색이었다.

p.336

 

 

저널리스트로 전향하기 전 약초 치료사로 활동했던 작가는 강변에 펼쳐진 들풀과 나무, 새의 이름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세밀한 풍경화를 눈 앞에 그려준다. 책장을 넘기는 사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강줄기를 따라 걷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어떻게든 짬을 내어 강변 산책을 해야겠다 다짐하고 양평으로 왔지만 칭얼거리는 아이 때문에 강가는 커녕 큰 길조차 나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집 앞 개울에서 살얼음 언 표면 아래로 흘러가는 작은 물줄기의 명랑한 노랫 소리를 들었고 대한을 넘긴 햇살에서 봄의 기별도 느낀 듯 하다. 물줄기는 어김없이 아래로 흐르고 시간은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올리비아 랭을 우즈 강으로 이끌었고, 물줄기를 따라 걷는 내내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 준 건 버지니아 울프다. <강으로>의 구석구석에서 울프의 작품과 그녀의 생애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자 울프의 소설과 그의 생애가 더 궁금해졌다. 새해를 시작하며 마음먹었듯, ‘울프 읽기’를 시작해야겠다.

 

 

우리 모두는 시간이 짠 얼개에 붙잡혀 있다. 내 옆으로 흐르는 개울은 동쪽으로 확고부동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바늘처럼 제때제때 한 땀씩 꿰어가면서. 바로 그것이 세상 이치가 아닐까.

p.84

 

 

작가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시간에 사로잡혀 흘러가고 있다. 그런 삶에서 강물처럼 제때제때 한 땀씩이라도 꿰어가고 있을까.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말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 돌아가는 이치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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