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패티 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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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던 중 패티 스미스의 『몰입』을 읽게 되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런데 『몰입』은 세계적인 뮤지션이자 시인 패티 스미스가 시몬 베유와 카뮈에 몰입하면서 얻었던 영감을 쏟아낸 책이었다. 책의 첫번째 파트,「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은 급작스런 프랑스행에 시몬 베유의 책을 들고 가는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아파트에 쌓아둔 읽지 않은 책 더미 맨 위에 프란신 쉬 플레식스 그레이가 쓴 시몬 베유에 대한 논문과 표지에 깜짝 놀란 작가의 얼굴이 실려 이는 모디아노의 <혈통>이 있다. 나는 두 책을 낚아채다시피 집어 들고, 내 작은 아비시니안 고양이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공항으로 향한다.

(...)

천재성과 특권을 겸비했던 베유는 고급 교육의 위대한 강당들을 거쳤으나 훌훌 다 버리고 혁명, 현현, 공공에의 봉사, 희생이라는 어려운 길을 떠났다.

20-21쪽,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몰입』 중에서, 패티 스미스, 마음산책

 

 

사소한 행동 하나가 새로운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경우가 있다. 패티 스미스에게 베유의 책이 그랬다.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을 통해 낯설었던 작가의 삶과 세계에 몰입하게 되는 경험은 여정 속에서 무의식적인 나침반으로 작용한다. 여행 중 마주친 상황-호텔 방 텔레비전으로 본 피겨 스케이팅 중계, 발레리의 무덤을 찾아 간 곳에서 마주친 누군가의 묘석에 씌여진 글귀, ‘헌신’-과 베유의 무덤을 찾아 헤맨 경험 사이에서 피어오른 영감에 사로잡혀 패티 스미스는 글을 쓴다.

호텔 방에서,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정신없이 써내려간 글, 「헌신」은 짧은 소설로 완성되었다. 책에 실린 두번째 글이다. 소설 속에는 피겨 스케이팅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유대계 소녀가 등장한다. 이름은 유지니아, 강제수용소에서 부모를 잃은 열 여섯 소녀로 이모와 함께 살고 있다. 숲 속 얼어있는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는데만 몰두하는 그녀에게 스케이팅은 완벽의 세계다. 이모가 그녀를 떠나자 스케이팅을 계속하기 위해 자신을 훔쳐보던 삼 심대 후반의 알렉산더를 찾아가고 그와의 만남으로 소녀는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징표는 없어. 별도 십자가도 손목에 새겨진 숫자도 아니야. 우리는 우리 자신이야. 네 재능은 오로지 너로부터 나오는 거야.

109쪽, 「헌신」,『몰입』 중에서, 패티 스미스, 마음산책

 

 

오로지 스케이팅에 ‘헌신’하고자 했던 유지니아의 삶은 짧게 피어났다 사그라든다. 순수한 열정, 스케이트의 날 위에 벼려지는 몰입, 단 하나를 위한 숭배가 단 한 송이의 꽃을 꺾어버리는 이야기. 패티 스미스의 예술에 대한 흠모와 몰입의 열정이 엿보여 강렬하면서 여운이 긴 소설이다. 그런데 「헌신」속 한 장면에 우연처럼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등장한다. 책장을 넘기던 유지니아는 알렉산더가 남긴 메모를 발견한다. ‘삶은 살 가치가 있는가? 나는 살 가치가 있는가?’ 그것은 소설이 던지는 필연적인 질문이 된다.

 

 

운명에는 손이 있으나 그 손이 미리 정해진 건 아니다. 나는 무언가를 찾다가 무언가 다른 것을, 어떤 영화의 예고편을 찾았다. 울림이 깊지만 생경한 목소리에 마음이 동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인용과 참조의 교향악을 소환하는 빛의 주크박스에 이끌려 여행을 떠났다.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추상적 거리들을 배회하며 심지어 내 것조차 아닌 세계를 실로 였었다. 책 한 권을 읽고 시몬 베유의 신비적 행동주의를 알게 되었다. 한 피겨 스케이트 선수를 보았고 완전히 매혹되었다.

46쪽,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몰입』 중에서, 패티 스미스, 마음산책

 

 

우연처럼 흩어진 단초들이 묘하게 연결되어 이끌었던 여정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다. 우연한 만남에 몰입하자 완전한 매혹의 세계가 열렸다. 패티 스미스는 놓치지 않고 그 세계를 새롭게 재창조했다. 「헌신」에서 질문을 던지는 카뮈, 그것은 운명처럼 패티 스미스를 루르마랭에 있는 카뮈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카뮈의 친필 원고를 보고 패티 스미스는 다시금 글쓰기의 열정에 사로잡힌다. 책의 마지막에 실린 「꿈은 꿈이 아니다」에는 카뮈와의 만남에 매혹되어 또다른 몰입의 길로 향하는 그녀 내면의 여정이 담겨 있다. 카뮈에 대한 숭배와 글쓰기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그는 「헌신」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진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내 손가락이 촉침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질문을 추적한다. 젊었을 때부터 내 앞에 놓인 익숙한 수수께끼. 언어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놀이와 친구들과 사랑의 계곡에서 한 박자 바깥으로 물러서기.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합창이 터져 나온다.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129쪽, 「꿈은 꿈이 아니다」,『몰입』 중에서, 패티 스미스, 마음산책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이것은 ‘삶은 살 가치가 있는가? 나는 살 가치가 있는가?’에 조응하는 답이다. 그저 살기만 하는 것으로 삶의 가치는 일궈질 수 없다. 그렇기에 패티 스미스는 글쓰기에 헌신한다. 카뮈와 베유 등, 예술가에 대한 숭배와 흠모, 예술에 대한 열정,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몰입과 헌신은 ‘그저 살기만 할 수 없’는 인간이 삶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최선의 것이 아닐까. 무언가를 향한 몰입과 헌신이야말로 삶에 대한 답을 구하는 길일 것이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패티 스미스의 『몰입』으로, 그리고 다시 카뮈의 『시지프 신화』로 이어지는 독서의 여정에 있다. 다시 카뮈의 책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서 시작되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삶의 의미와 당위성에 대해 어떤 답을 열어 보여줄까? 패티 스미스와의 우연한 만남이 난해하게 다가오던 카뮈의 질문에 영감과 열정의 빛을 실어준다. 그녀의 자유롭고 아름다운 글을 통해 삶과 글쓰기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시적으로 바뀌었다.

패티 스미스처럼 단촐하게 짐을 꾸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가방 맨 위엔 베유와 카뮈의 책을 넣고. 우연이 빚어낸 매혹과 몰입의 순간을 통해 내가 길어낼 영감과 헌신은 어디를 향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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