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문학 수준의 압도적 명작’이라니, ‘하루키 최대의 대작’이라니,  판매를 위한 광고이지만  굳이 이런 수사로 출판사 스스로 자찬의 인플레를 만들어야 하나?

역자인 김춘미의 번역 문체을 문제삼는 글이 많은데 이는 역자의 역량 탓이 아닌 것 같다. 하루키 문체가 후반기 작품으로 가며, 초기의 반짝이는 비유와 묘사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확연하게 나타난 것 같다. 하루키는 문체작가이다 그러나 이제 하루키 문체는 죽었다.

  그런데 그 감각이 죽으니 남는 건 작위 밖에 없다. 그리고 오직 상징만이 있다. 상징이 너무 많아 작위적이고 소설적 즐거움도 반감한다.

  15살 소년이 아버지의 저주를 극복하기 위해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자를 만나 섹스하고 그녀의 영매인 15살 소녀와 만나 재생을 완성한다는 이 이야기를 900여쪽에 이렇게 장황하게 쓸 이유가 있었을까? 군데군데 슬데없는 삽화와 대화가 너무 많아 산만하고 지루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15살은 너무 어리다.  하권 123~127쪽에  ‘메타포와 가설’ 등의 논쟁에 이르면 이건 너무 지나치군 하는 느끼함이 저절로 일어난다.   째즈나 프린스를 흥얼거린다고?  다무라의 생활은 지금 하루키 세대인 50대 그대로이다.  

  소포클레스의 희곡에서는 인간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운명의 비극성을 뛰어난 긴장감으로 독자를 흡입한다.  인물은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앞날을 예상하지 못한다. 그런데  하루키는 다무라가 스스로 그 운명의 정면에 다가가지만 - 그리고 이때 사에키와의 섹스가 구원이 될지 파탄이 될지 모르는 다무라가 무슨 확신으로 그렇게 확실히 섹스 쪽으로 밀어붙이는지? 세계의 끝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섹스가 파탄이 아니라, 화해와 극복의 제의적 행위가 될 것이라는 너무 확실한 예측을 소설 초반부터독자에게 던져주고 있어,독서의 긴장감을 완전히 죽이고 있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낡은 이론을 뻣뻣하게 적용시킨 것도 너무 식상하고 도식적이다.

 마르께스의 마술적 비현실성이 엄청난 긴장감과 리얼리즘을 획득한 데 비하면 하루키의 여러 환상성은 이야기의 설득력을 줄일 뿐 아니라, 사건을 손쉬운 방법으로 진행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느껴진다.

 또한 인물의 현실적 고통과 방황을 서술하지만, 관념적 대화와 진술이 지나치게 많아 소설적 구체성을 약화시키고 있으며,  또한 고통스런 세계를 통과하고 세계의 끝까지 가야한다는 주제가  하루키의 전작뿐 아니라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과 비슷하다. 물론 달의 궁전에는 근친상간은 없지만 근친의 혈연성이 중심 축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유사하다. 

이 소설은 '기억'과 '경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도 아주 비효율적인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나는 하루키를 좋아한다.

단지 나의 실망은 그를 너무 깊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꽃피는 봄날 

건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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