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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에떼 -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 어느 한 자유주의 우파의 은밀한 매력
<고종석 읽기>
고종석을 읽었다. 몇몇 잡지와 신문에서 드문드문 접하던 그를, 몇 권의 책으로 집중적으로 만났다. 누군가가 그를 ‘한국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사람’으로 지칭했을 때, 그의 글을 모아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잡지의 몇몇 칼럼에서 고종석을 대했을 때, 좀 무르고, 분명하지 않고, 유(柔)하다는 느낌이 앞섰다. 진중권이나 강준만에 비하면 그는 눈에 뜨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딱히 따로 그의 책을 볼 마음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그의 책 8권을 빌렸는데, 주로 시사 정치에 관한 4권을 옆에 두고 통독했다. 그의 책은 이전까지 여러 곳에 발표했던 글들을 묶은 것이 대부분인데, 글을 연속적으로 죽 읽어보니, 잡지의 칼럼 한 두 편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칼럼에서 느꼈던, 무르고 흐릿하고 유하던 그의 결점이, 이제는 온화하고 균형잡힌 단단함으로 느껴졌다. 상당히 의외의 느낌이었다. 더구나 그의 한국어 실력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그는 국어에 엄청난 애정과 실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럼에도 영어 공용론에 호의적이다!) 그런데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등으로 회화와 작문이 (유창하게) 가능한 사람이다. 그가 구사하는 몇 개의 언어가 더 있었는데, 책을 건성으로 읽다 보니 그 사이 까먹었다. 몇 개의 단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초라해진다.^^
그는 한국어뿐 아니라, 외국어, 그리고 언어 일반에 대한 대단한 애정과 실력을 갖춘 사람인 것 같다. 또 그의 한국어 실력은, 국어학 지식과 함께, 언어 구사 능력이 정말 탁월하다. 한 경지를 이루었다. 그가 파리 사회과학 고등연구원 언어학 석사과정을 밟았다지만, 그런다고 모두 고종석처럼 날씬한 언어를 구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의 언어는 엄청 세련되었다. 화사하다거나, 기름기가 흐른다거나 하는 세련이 아니다. 담백하면서도 정확하고, 호흡 역시 엄청 편하다. 입 속에 착착 굴리며 달라붙는 말의 물질성과, 그 말의 함의가 정확하게 머릿 속에 착착 포개진다. 언어를 완전히 통제하고 마음대로 부리며, 말의 형식과 내용을 정확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아, 지금 나의 언어는, 겉돌고 있다.)
고종석은 스스로를 <자유주의 우파>라 한다. 그런데도 강준만과 진중권을 엄청 좋아해서 ‘형제애’를 느낀다 하고, 고은광순, 김어준, 김규항을 말한다. 정치인으로는 강금실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엄청 좋아하고, 또 추미애와 노무현(대통령 임기 초반 비판적으로 돌아 서지만)을 좋아한다. 조선일보를 극우-유사 파시스트로 규정하고, 조선일보와 상종하지 않으면서도, 조선일보의 해악성을 알리고 싸우기 위해 조선일보를 읽고 분석한다. 국가 보안법을 미워하고, 성차별과 싸우고,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에 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특히 전라도 지역주의를 한국의 인종주의로 규정하며, 모든 ‘전라도 놈’을 위하여 전라도 담론에 정면으로 맞서며, 그러면서 김대중의 정치적 보수성과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김대중에게 칠해진 ‘전라도/빨갱이’에서 빨갱이 보다 전라도 놈이라는 기호가 정치적 동원력이 더 강하다고 한다.)
이런 우파를 본 적이 있는가? 자신은 좌파가 아니란다. 그가 말하길, 좌파란 곧 혁명이란다. 혁명을 도모하지 않으면서 좌파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우파일 수밖에 없고, 곧 개인의 자유를 우선하는 자유주의자라는 것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우리사회의 이념에 대한 이름 붙이기는, 비틀어져 있다 못해 아주 기괴하지 않은가. 노무현의 정책이 좌빨로 유통되는 사태는 그렇다 하더라도, 우익의 대표자인 ‘김구’ 조차도 뉴라이트에서는 ‘좌 편향’으로 배척하는 이 기괴함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자칭’ 보수는 모두 ‘극우-유사 파시스트’들이고, 기껏 보수 개혁 (혹은 자칭 진보) 세력이라는 자들이 ‘좌파’로 불리고 있다. 고종석은 우리 사회의 그로테스크한 이념적 명명에 저항해서, 세계 보편적 이념 지형에서 자신을 ‘우파’라 말하는 것이다. 그가 우파를 고집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 사회 이념어의 왜곡에 대해 저항하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 지형에서는 그는 충분히 ‘좌파스러운’ 정체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좌파와 거리 두려 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자칭’ 좌파에게도 믿음이 없다는 것을 시위하는 것이리라. 고종석 스스로 자신의 이념 정체성을 밝히는 대목을 옮겨 보자. 1999년에 쓴 그의 글을, 길지만 인용한다.
“실상 한국 사회는 극우파가 앞에서 이끌고 낡은 좌파의 일부가 뒤에서 밀어주며 굴러가는 사회다. 이 극우파와 낡은 좌파는 흔히 서로를 욕한다. 그러나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된다는 것을. 서로가 동류라는 것을. 그들은 둘 다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들은 적어도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의 유토피아는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적 질서를 전제한다. 이 기존 이데올로기 질서의 두 축 가운데 하나인 낡은 좌파는 때때로 소위 캐비어 좌파이기도 하다. 그들은 널따란 응접실에서 동류 인텔리와 함께 프르미에 크뤼 포도주를 홀짝거리며, 상상 속의 문화 혁명기를 그리워하고 밀림 속의 게릴라를 찬양한다. 그들이 친화감을 느끼는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의 관념 속의 위대한 노동자 계급이지, 현실 속의 나약하고 비루한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프로그램은 아직도 웅장하다. 이 낡은 좌파와 극우파는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정치적 사안에 따라 흔히 힘을 합한다. 나는 그들의 연합을 깨고 우파의 공간을 넓히기 위해서 발언하고 싶다.” (『서얼 단상』176~177)
낡은 좌파란, 그냥 내가 떠오르는 대로 말한다면, ‘민족주의 좌파’라는 기괴한 조합이 떠오른다. 민족주의란 우파 그것도 극우적 멘탈리티인데, 식민지와 외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에서는 이놈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좌파의 외피를 두르게 된 것이다. 또 캐비어 좌파란, 그냥 내가 떠오르는 대로 말한다면, 대학 강단에서 학문적으로 주절대는 (특히 프랑스 철학자들의 경향성) 쁘띠 부르주아들의 호사를 말하는 것이리라. 물론 실천력이 결여된 측면에서는 나 역시 그런 류이지만, 다행히 캐비어를 먹을 만큼의 ‘쁘띠’도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캐비어 좌파에게서는 쏙 빠지고 싶다. (^^)
아무튼 고종석 이념의 스탠스는 세계 보편적 지형에서는 자신의 말대로 ‘자유주의-우파’일 것이고, 대한민국의 특수 지형에서는 ‘좌파-빨갱이’ 일 것이다. 이는 그가 교류하는 자들이, 대한민국에서 이념적으로 분류되는 범주를 생각하면, 고종석 자신이 스스로를 우파라 한들, (기분 나쁘겠지만) 좌파로 유통될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슬픔이다. 우리는 언제 제 이름을 그대로 되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그는 우파든 좌파든 속 시끄러운 가르기보다는, 자신의 글쓰기를 모랄리스트의 글쓰기라 한다. ‘도덕 군자의 글쓰기가 아니라, 내적으로는 보편적 인간성의 탐구가 학문적 무능력(겸손의 표현이다)과 연결된, 비체계적 글쓰기’라 한다. (『서얼 단상』 279) 그래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말이 있는 것이리라. 그가 말하듯 학문적으로 무능력한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좌든 우든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면 이야말로 이념의 포로가 아니겠는가. 아마도 고종석도 이 점에서 자신을 모랄리스트라고 한 것이 아닐까, 나 혼자 생각해 본다.
그래서 그는 ‘진영 논리’에 포획되지 않는,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는 드문 경우인 것 같다. 그는 여러 곳에서 강준만의 작업을 엄청 치켜 세우지만, 그와도 논쟁을 벌인다. 강준만이 김우창과 각을 세우자, 고종석은 김우창을 두둔하며, 강준만과 다른 입장에 선다. (물론 나는 김우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김우창에 대한 고종석의 후한 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종석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은 것 중의 하나가 ‘복거일’ 문제다. 나는 복거일이 싫다. 복거일의 책들을 거의 읽지 않은 내가 복거일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으로만 그를 싫어한다는 것은, 나의 편벽됨과 무지를 공개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래도 나는 복거일이 싫다. 그런데 고종석은 복거일의 엄청난 추종자이다. 군데군데 그를 자신의 ‘스승’이라 한다. 고종석은 말하길, 복거일은 자유주의자이며 인문주의자이고, 그래서 그에게 엄청 많은 것을 배웠고, 따르고, 영향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고종석의 멘탈리티를 경계하며 책을 읽어 간 것이다. 그런데 고종석은 자신의 스승 복거일의 책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를, 작심하고 깐다. 조목조목 복거일의 무지와 비약과 허술함과 윤리성을 까버린다.
이런 고종석은 기회주의자가? 비윤리적인가? 고종석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 진영라고 해서 그 사람의 이물감도 감싸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자기 진영이 아니라고 해서 그 사람의 올바름을 배척하지 않는다. 기회주의? 전혀 아니다. 고종석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비판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아주 윤리적 인간이다. 나는 그가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절대로 선제공격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상대의 공격을 ‘일단’ 수용한다. (수용하는 척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하나 다시 쳐낸다.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는, 다양한 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노무현의 진솔한 말투를 두고 한나라당에서는 ‘시정잡배’ 운운했던 모양이다. 좋다. 그는 시정잡배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정잡배를 위해 한 마디 변명의 말을 하고 싶다. 시정잡배의 코드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적이다. ‘시정(市井)’은 다름 아닌 민중의 생활공간을 가리키고 (…) 그것은 외부를 향해 열려 있는 21세기의 민주주의의 코드다.”( 『서얼 단상』 34)처럼, 상대의 힘을 마치 그물처럼 푹 받아들였다가 그 반동으로 쳐낸다. 이처럼 상대의 어법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경우(진중권 논법)도 있고,
" 나는 그것이 박정희 체제보다도 더 큰 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박정희 체제를 정당화할 근거가 되는가?” (『서얼 단상』 43)처럼 상대의 칼을 살짝 비켜서며 논점를 이동시킨다. 이것과 저것을 이항 대립시키는 상대의 공격을 살짝 비켜섬으로써, 상대의 예봉을 꺾는다.
또 박노해를 언급하면서 “[나는] 박노해를 평가할 자격이 없다. 그가 가장 힘들게 살아낸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안전하게 살았으니까. 그리고 우리 사회에 우글우글한 파시스트들을 잠시나마 젖혀 놓고 굳이 박노해를 비판하는 것은 공평한 일도 아닐테니까. 그러나 내가 박노해에게 윤리적 평가를 내릴 수는 없어도 심미적 평가를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서얼 단상』 180) 라며, 박노해의 ‘분별없음’을 엄청 씹는데, 새로운 층위에서 상대를 파고들며 논점을 무력화시키기는 것이다.
고종석의 말은 설득력을 있다. 우리는 알지 않는가, 논리로 누군가를 결코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논리가 정확해질수록 증오의 벽만 커질 뿐이라는 것을! 논리보다는 공감이 훨씬 큰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말이 쉬워 공감이지, 자신과 이념적으로 벽을 쌓은 사람과 어떻게 공감하지? 우리는 누구할 것 없이, ‘같은 놈’들 끼리 논다. 편향확증(confirmation -bias)이라고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있기에 같이 노는 것이다. 그래서 ‘논리-공감-설득’은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돈다.
고종석이 설득력 있다는 것은, 그의 언어가 내뿜는 외피의 화사함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언어가 품고 있는 ‘소박한 마음’이 내게 와 닿은 것이리라. 그 소박한 마음이란 다른 말로 ‘현실의 인간’이라고 해 두자. 이 현실이라는 말 만큼 애매모호한 말은 없지만, 그래도 달리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곳곳에서, 어떤 이념이든 어떤 입장이든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을 배제하는 모든 현실 억압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는 언제나 한 개인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온전한 조건의 확보를 말하고 있다. 한 개인의 종말은 우주 전체의 종말이라고 그가 말하듯, 그에게 한 개인의 삶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든 이념이든, 어떤 것이든, 개인의 삶과 자유 위에 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삶과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것도 그는 혐오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자유 민주주의의 옹호자, 자유주의자, 그것도 우파라고 하는 것 같다. 우파인 자신에게 한국 사회는 너무 힘들어, 이런 사회적 발언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단다. 그래서 사회에 발언하고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의 하나로, 꾸준히 발언하겠단다.
고종석의 글을 몇 일 계속 연속해서 보니, 그의 섬세한 문장이 논쟁의 지뢰밭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술로도 여겨질 때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우아한 생존술은 아무나 체득할 수는 있는 것이 아니다. 비판적 글쓰기란, 상대에게 반격의 빌미를 주지 않는 언어의 세세한 배치가 필요하다. 그런 장치들이 고종석에게는 좀 더 많은 것 같기에, 글이 좀 빙빙 두르기도 한다. 또 그의 글을 계속 읽다보면, 다분히 냉소적인 느낌이 든다. 그의 도시 기행책인 『도시의 기억』, 파리에 대한 기억의 부분. 마르크스와 하워드 진이 인류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공간으로 파리 코뮌을 규정했다지만, 고종석은 파리 코뮌이 딱 2달이 아닌, 2년 혹은 20년 지속되었다면 그런 이상공간을 유지시키지 못했을 것이며, 그렇기에 파리 코뮌이 2달이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다는 진단을 내린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고종석에게서는 현실과 육박하는 대결 의식이 없다. 그런데 이런 류의 현실 인식이 군데군데, 자주 나온다.
물론 그는 ‘대결 의식’이라는 말의 위선과 폭력성을 비판 할 것이며, 그러면서도 조선일보같은 유사 파시트들과는 열심히 싸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개인적 자유주의자가 된다. 그가 대상과 어느 정도 ‘안정거리’를 두기에 진중권보다는 푸근하고 강준만 보다는 세련되었다. 그러나 또 그것으로 인해 진중권처럼 발랄하지 못하고, 강준만처럼 육박하는 힘과도 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논법이 부정확한 것은 아니다. 아주 예리하고 정확하게 목표물을 가격한다. 예를 들어 안티 조선일보 운동의 김정란 시인이 신경숙과 은희경을 어떻게 오인 사격하는지를, 정확하고 날카롭게 지적해 주는 것처럼, 그는 철저하게 ‘정확’하다. 부정확한 통쾌함 보다는 정확한 소심함(?)이 더 안전하다. 아니, 올바르다.
내가 읽은 글들은 모두 몇 년전 글들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의 요즘 글들은 읽지 않았기에, 현재 그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복거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노무현 사후를 어떻게 독해하는지, 지금의 민주당과 진보정당에 대해서는, 그리고 MB의 ‘통치’에 대해 어떤 언어를 적용 시킬 것인지, 궁금하다. 아마도 큰 그림에서는 짐작이 가지만, 그의 예리한 말길을 따라가는 재미가 솔솔할 것이다.
『경계 긋기의 어려움』과 『자유의 무늬』는 신문 잡지 등에 실었던 것으로, 아주 짧은 글들의 묶음이다. 단편적이지만, 그의 입장을 간결하게 접할 수 있었다.
『서얼 단상』과 『바리에떼』는 주로 잡지에 발표했던 글들이 많다. 분량이 길어 그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서얼 단상』
「신분제로서의 지역주의」에서
‘전라도’가 지역 이름이 아닌 정서적 기호로 기능하는 한국 사회를 마음 먹고 비판하고 있다. 저자 자신이 전라도 출신이기에 오히려 전라도를 옹호하는 발언의 입지가 좁혀짐에도 (강준만이 서울대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서울대 폐지론이 얼치기들로부터 감정적 비난을 당하는 것을 떠 올리면 된다), 정면으로 전라도인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고종석은 전라도라는 기호는 전라도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놈이라는 혈통’을 지칭하는 것이며, 바로 이는 피를 문제 삼은 것이기에 인종주의와 다름 아니라는 지적에, ‘아! 그렇구나 바로 이것이 인종주의구나’하는 공감이 일어났다. “그래서 지역주의와의 싸움은 인종주의와의 싸움처럼 봉건성과의 싸움, 봉건적 심성과의 싸움이다. 그것은 더러 계급 문제와 겹쳐지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신분의 문제이다.”(18)
지역주의에 대한 어떤 학술적 시도보다도 가슴에 와 닿는다. 혹시 ‘전라도’라는 기호에 이물감을 느끼지 않더라도, 전라도 사람들의 말을 한 번 들어본다는 마음으로 꼭 한 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조선일보의 동인 문학상 후보를 왜 황석영처럼 거부하지 않았느냐는, 네티즌의 글에 대해, 고종석은 솔직하게 말한다. “나는 지금 내가 나빴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얼마나 나빴는가? 아주 나빴다.”라며 흔쾌히 직설법으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다, 자신의 밑바닥에 있는 인정(認定) 욕망을 고백하며, 깔끔하게 사과한다. 이렇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논자’가 있던가? 신선했다. 이 유려하고 섬세한 결을 지닌 고종석이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드러낼 때조차도 멋있다. 그런데 여기엔 ‘또 뭐 다른 세련된 계산(?)에 따른 것인가’하는, 구질구질한 의심이 순간, 퍼뜩, 들었다.(^^)
『바리에떼』
「섞인 것이 아름답다」 에서
-민족주의, 인종주의, 영어 등의 영역에서 ‘고유성’을 주장하는 것은 곧 순결주의이며 근본주의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곧 파시즘으로 연결될 수 있다.
「식민주의적 상상력」 에서
-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부쳐’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복거일의 친일파 옹호 논리를 하나하나 논박하고 있다. 복거일은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라는 책에서 일제 식민지 통치는 체제의 문제였기에, 친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쩔 수 없었던 생존의 문제였단다. 그래서 지금의 시각으로 그 때 친일자들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식민지 기간 인구가 늘었다는 것을 바탕으로, 일제 식민시대가 국민들로서는 살만한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고종석은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복거일의 책을 읽어 보지 않은 나로서는 균형을 잡기 어렵지만, 고종석의 반론은 가히 발군이다. 상대 논지의 핵심을 정면과 측면에서 되받아치는 논법이 대단하다. 고종석은 여러 문장에서 복거일을 자신의 스승이라고 할 만큼 그를 따르고 있음에도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퍼붓고 있다.
「반 생물학을 위하여」 에서
-한 여성학자의 박근혜 지지를 계기로 살펴본 대한민국 여성정치인 이야기이다. 페미니즘 진영에서 박근혜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을 생물학적 성(SEX)으로만 환원하는 것이기에, 나 역시 원칙적으로 비판적이었다. 고종석은 더 나아가 젠더로서의 여성성의 확장을 위해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며, 여성의 정치력 확장을 위한 여러 제안을 펼치고 있다.
「분열속에서 좌표 찾기」 에서
- 민주당과 열린 우리당 분당 사태에 대한 판단. 고종석은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자로서, 열린우리당의 분열주의와 영남주의 편승을 통렬히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민주당의 구태, 민주당-한나라당 공조를 더 크게 비판하며, 결국 현실적으로 열린 우리당을 지지할 수 밖에 없을을, 아주 가슴 아프게 밝히고 있다. 정치 동지인 강준만으로부터 공개 비판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정치 정서를 배반하면서도, 큰 틀에서 ‘자유주의’의 몰락을 방지하고, 유사 파시스트(한나라당)의 득세를 막기 위해, 결국 열린 우리당을 지지할 수 밖에 없다고 밝힌다. 이 부분에서 고종석은,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현실의 지정학을 고려하고, 차선과 최악을 구분하며, 자신이 왜 자유주의자인지를 웅변하는 것 같다.
또 고종석은 이 글이 쓰여진 2003년, 정동영을 개혁의 이미지만으로 포장된 기회주의자라고 정확히 진단했다. 나는 2007년 대선 때 정동영의 모습과, 대선 후 민주당을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그것도 지역구를 옮겨서 보궐 선거에 나온 여러 행태를 보며, 정동영은 개혁적이지도 않지만, 절대로 신뢰할 수도 없는, 무엇을 이루어낼 수도 없는, 기회주의자라고 겨우 인지했는데 말이다.
『서얼 단상』 -한 전라도 사람의 세상 읽기
『바리에떼』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
『경계 긋기의 어려움』 - 고종석 시평집
『자유의 무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