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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하워드 진.도날도 마세도 지음, 김종승 옮김 / 궁리 / 2008년 10월
평점 :
하워드 진은 촘스키와 함께 널리 알려진 실천적 지식인으로,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언어는 현란하지도 않고, 주변을 맴도는 머뭇거림도 없다. 핵심을 명료하게 밝히고 설명을 정확하게 하는, 깔끔함이 좋다. 명쾌하고 쉽다. 그러면서 묵직하다.
내가 그의 글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판적 지식인들이 갖는 현실 냉소도 없고, 거리 두기도 그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결코 대중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함께’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스스로, 자신의 계급의 식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고 밝혔듯이, 그는 시종 자신이 계급적 좌표를 확인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하워드 진은 교육이 어떻게 지배권력의 이익에 복무해 왔는지를 시종 말하고 있다. 특히 역사학자로서 학교의 역사 교육에 대해 그는 할 말이 많다. 그가 『미국민중사』를 통해 콜럼버스가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는지를 밝혔을 때, 많은 미국민들이 보인 다양한 반응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벌이는 열띤 논쟁은 1492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1992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155)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과거 역사에 대한 해석과 기억은 바로 <지금, 이곳>의 사태를 결정짓는다. 역사를, 역사에 대한 자기의식을 갖지 못하면 언제나 망각과 왜곡에 의해 현실이 침탈당한다. 그래서 나는 이것, 역사의 해석을 <기억의 정치>라고도 부른다. 역사의식은 역사에 대한 잡지식과는 무관한 것이 아니겠는가? 연도기적 사건의 잡지식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무서우리만치 탈의식적인 우리의 역사 교육을 오래전부터 혐오스러웠던 나로서는, 하워드 진의 지적에 백번 공감한다.
그는 역사가 마치 ‘하나의 사실, 하나의 해석, 하나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처럼, 대중을 기만하는 것을 시종 비판한다. 또한 어떤 사안에 대한 기계적 균형은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한다고, 또 객관성이라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강조한다. 이는 그의 자전적 책 제목인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를 연상케 한다.
내가 가장 혐오하는 말이 바로 ‘중립성 혹은 객관성’이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말이지만, 이 말이 지시하는 실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태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었고, 또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단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중립성 혹은 객관성, 자신이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착각! 이것이야말로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이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 받아 왔고, 또 지금도 강단은 그렇게 가르쳐 왔으리라. 바로 이 중립성이라는 것이, 사실상 정치적 무뇌아를 생산한 것이리라. 이것이 교육을 장악한 국가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나는, 언어는 그 자체로 편향적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편향성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정치의식이라고, 줄곧 믿고 있다.
“정치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행위는 교육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 교과서가 그 부피와 지루함으로 제아무리 중립을 가장한다 해도, 교사가 아무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치적 입장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모든 교육은 사건과 책과 주장을 선택하기 때문이다.”(131)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가 선택하고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그리고 어떠한 담론이든 그 자체로 이미 정치적 자장에 포섭되는 것 아니겠는가. 쌍용자동차 사태에 대해, 노사문제이기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정부 논리, 이것이 바로 정치적 해석을 통과한 결과 아닌가? (그러면서 바로 또 엄청 노조 두들겨 패는 이 분열증적 작태, 말해 무엇하리요~~) ‘나는 정치에 관심 없으니 투표하지 않겠다’는 바로 그것이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 인간은 결코 정치적 자장 밖으로 탈출 할 수 없다. 텍스트의 바깥이 없듯이, 정치의 바깥도 없다! 그래서 초, 중, 고, 대학교 역시 가장 정치적 공간이 될 수 밖에 없다.
“교육 받은 계급일수록 (언론과 국가의) 거짓말과 모순들을 기꺼이 수용한다. 교육을 많이 받고 전문 지식을 갖춘 사람일수록, 특권과 보상이 주어지는 이 체제에 더 많이 투자한 사람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 이는 교육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현실을 비판적이고 정확하게 읽어내는 능력이 더 뛰어난 것은 아니” 다.(14)
“학교의 교육 목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중산층 신화에 동화시키는 것입니다. 대다수 노동자계급 출신의 학생들, 특히 유색인 학생들은 중산층의 생활을 결코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거의 모든 노동자계급 출신 학생들이 학교에서 수업 중 다짐받는 약속에 배반당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식민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55)
학교를 졸업하고서야 학교가 얼마나 기만적인 곳인지 알았다. 누군가 1등을 하면, 누군가는 꼴찌를 해야 하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 뿐인 순환 구조에서, 모든 교사들은 ‘열심히 하라’고만 말한다. 누군가가 1등을 하는 순간,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내려 와야하지 않는가. 또 공부 잘 한다는 것으로 나머지 삶을 보장 받는다는 것도 허구 아닌가? 그리고 더 나아가, 교사들이 교실에서 학습을 독려하는 말들이, 몇몇을 빼고는 대다수 아이들의 내면에 어떤 굴종과 모멸을 각인 시키는 것인지 그들은 알까? 교과서의 우아한 말들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무력한 것들인지 그들 교사들과 교수들은 성찰하고 있을까?
내가 학생이었을 때, 공부 잘하는 학생이 그래도 올바르다고 생각했는데, 요즈음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 그들은 어떤 사회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일반화 시킬 수는 없겠지만, 권력과 자본을 선취하기 위해 자신의 그 한 줌 권력을 위해 노동자를 짓밟을 것이고, 자신들의 부(富)를 위해 착취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한 체제의 상층부에 진입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체제의 권력과 자본에 포섭되는 것 아닌가? 권력과 부(富)를 지극히 사유화할 미래의 권력자들이라고 하면, 너무 지나친가?
지금 권력자들, 관료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 모두 학창 시절, 수재였거나 적어도 공부 잘하는 모범생 아니었겠는가. 대학 가자마자 고시방에 틀어박혀 법조문이나 달달 외워 사시나 행시에 패스한 놈들이, 친구와는 어떻게 지내는 것인지, 이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지, 지금 내가 누리는 안락이 누구의 땀과 연결되어 있는지, 역사란 어떻게 해석하는 것인지, 한 톨 고민이라도 했겠는가? 모두 자신의 잘난 머리탓 능력탓으로 돌리고, 오직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상층부만을 바라볼 놈들 아닌가. 그것이 성공이라고, 그것 밖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괴물을 키우는 곳이 학교 아닌가? 오직 대중을 수탈할 놈들을 학교가 키워내고 있지는 않는가 한 번 쯤은 반문해 보자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탈색된 그런 괴물의 탄생이 전적으로 학교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러나 학교와 교사들, 교수들의 책임이 없다고는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변호사가 <조영래>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남들 등쳐 먹는 것은 부끄러운 줄 아는 사람 정도로는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에 검찰총장 후보로 나왔던 ‘천-수재’ 봐라. 총장 한 번 해 먹겠다고 당당하게 인사 청문회 나오는 ‘천-수재’의 그 뻔뻔함을 보면, ‘남들 등쳐 먹지 마라, 그건 부끄러운 짓이야’라는 말은 그에게 아무런 가르침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초등 1학년 개념부터 다시 해야 한다. ‘애들아, 이런 것을 두고 남들 등쳐 먹는 것이라 하고, 이런 짓을 하면 부끄러움과 연결되어야 하는데, 이 때 부끄러움이란 이러이러한 느낌을 말한단다. 아 참! 부끄럽다는 것은 당당한 것이 아니죠~. 그럴 때는 얼굴이 좀 붉어지고 고개가 숙여져야 되는 거란다.’ 완죤 조목조목 코메디다.
적어도 그들 수재들에게, 최소한의 <직업 윤리 정신>을, 살아가다가 한번쯤이라도 환기해 볼 수 있도록 어떻게든 학교가 노력해야하지 않겠는가. 공부 못 하지만 친구들 돌아볼 줄 아는, 또 지금의 학교 억압에 고통을 ‘느낄 줄’ 아는, 그래서 모범생이 못되는, 그래서 학교권력에 순치당하기를 거부하고 살아 펄떡이는, 그래서 소위 ‘문제아’라는 학생들, 이런 학생들이 정치적으로도 훨씬 올바르지는 않을까? 지나친 생각일까? 지나친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이 지나친 내 생각을 바꾸지는 못할 것 같다. 우리가 겪은 중고등학교를 되돌아보면, 폭력 그 자체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래서 교사는 무엇을 가르치는가라는 것 못지않게, 교사의 발언이 누구를 향하는 가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사들이여! 교실 구석에 파묻혀 소리도 내지 못하는 아이들, 자신을 존재를 내세우지도 못하거나, 혹은 교사와 학교의 억압에 온 몸으로 저항하는, 그래서 학교에서 문제아라고 부르는 이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려 주기를 부탁한다. 당신은 그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당신의 수업은 그들에게(도) 향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당신의 동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의 공저자인 도날도 마세도가 파울루 프레이리에게, 미국 교육의 엄청난 실패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느냐는 물음에 프레이리가 했다는 말이 재미있다.
“도날도 선생, 그렇게 순진해서야. 선생께서 실패라고 부르는 그것이 바로 이 체제가 본래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이 누구지요? 흑인들, 백인 노동자들, 소수 민족들, 이민자들입니다.” (86)
‘그것도 몰라?’하는 듯한 프레이리의 대답에 마세도가 어떤 표정이었을까 상상해보라. 우리는 알고 있는가? 학교가 진정 어떤 인간을 원하는지?
“누군가 ‘우리는 잘하고 있습니다. 경제도 좋고, 이 나라는 번창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 부유함 중에 제 것은 얼마나 되지요? 이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돌아가나요? 얼마만큼 이리 오고 또 얼마만큼 저리로 가나요?’가 될 것입니다.”(106)
아주 간단하게 간파한다. 그렇지 않은가? 간단하지 않은가? 대한민국 잘 산다고 다리 밑에 사는 거지가 행복하겠는가? 웃기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계급의식이다. 계급이라는 말만 나와도 내 주변에서는 알레르기 반응에서 발작 수준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있다. 어찌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전쟁은 지배 계급이 일으키고 그 전쟁을 노동자 계급이 치른다 (…) 그래서 전쟁은 부자의 배를 불리고 빈민을 사지로 몰아넣는 계급의 문제”이다.(230) 그래서 그들은 “이 나라(미국)가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240)
또 마세도와 진은 이렇게 묻는다.
“왜 미국 사회는, 미국 (역사)교육은 그런 계급 의식을 실천하지 못했는가?”
이에 대해 그들은 노동운동이 학교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다. 노동운동이 생산수단의 통제, 인종, 계급, 성(性) 평등의 문제까지 확장하지 않고, 기껏 부의 재분배 문제로만 집중했기에 점차 일반 대중과 동떨어졌고, 자본에 순치되어 갔다는 것이다. 미국 노동운동의 '경제주의'가 결국 편협한 노동운동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란다. 이는 유럽에는 그나마 있는 노동당이 미국에는 없는 한 이유라는 것이다. 경제주의 노동운동의 편협함과, 연계적 사고력의 상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멋있는 말을 한다.
“단지 내가 가난한 집 아이로 태어나 돈에 쪼들린 젊은 가장으로 살았기 때문에 계급 의식을 갖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전혀 다른 사회관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고, 나와는 전혀 다른 젊은 시절을 보냈음에도 나와 가까운 세계관을 가진 사람도 많다.”(219)
적절한 지적이다. 계급의식을 말하면, 꼭 누군가가, 에둘러 말하지만 결국 ‘너, 없이 살아서 그렇지?’라는 경제적 환원주의로 몰아가려 한다. 맞다. 계급이란 것이 원래 '있고, 없고'의 문제 아니던가. 그러나 또 일견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날리는 하워드 진의 ‘똥침’이 통쾌한 까닭이다. 나보다 훨씬 잘 나가는 사람이 나보다 더 치열한 사회의식 가지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사람들이 나보다 더 나이브한 사회의식 가지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진은 또 말한다. 우리가 이루려는 사회가 윤리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자신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지적하라고 한다.
“단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타인에게 저지른 행위에 죄책감을 느껴서 평등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시각이 진정으로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279)
마지막으로, 하워드 진이 중등 교원에게 전하는 말을 옮겨 보자.
“지난 수년간 고등학교 교사들과 만나오면서 느낀 문제점은 교사들의 소심함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독단적이거나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위험이 따르겠지요. 교사들은 스스로 움츠려들고 통제 바깥에 있는 현실 때문에 전통 방식대로 가르칠 수 밖에 없다고 변명합니다. 교사들은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 위험을 최소화하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업 내용을 제시하고 그것이 주관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점,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 그 원칙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 포용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런 생각(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 생각)을 반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학생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83)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말해오곤 했다. “무엇을 말한다는 것은 또 무엇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은 또 무엇은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학교 현장 구석구석에서, 학생들의 고통과 함께 하려는 훌륭한 교사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권력에 유린당하는 것을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 진실을 가르친다는 것이, 말로만 되는 것도 아니고, 안온하지도 않음을, 지금의 권력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지금 유린당한 교사들이 부디 견디고, 다시 부활할 것임을 믿는다. 내 어린 딸도 그런 아름다운 교사의 학생이 되는 행운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