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철학 -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사카이 다카시 지음, 김은주 옮김 / 산눈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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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폭력이라~ 누구나 이 말에서 부정적 느낌을 먼저 받을 것 이다. 폭력은 당연히 배제 되어야 할 것이기에, 폭력의 부정 을 말하는 것이 교양인의 자질이라고까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폭력은 배제되어야할 것’이라고, 그렇게 간단하게만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더해 갔다. 일상에서 느끼는 여러 종류의 폭력을 감지하면서,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정적인 것은 지난 2008년 5월부터 시작된 촛불의 경과를 보면서, 물리적 폭력은 부당한가라는 고민이 생겨났다. 촛불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거부만이 아니라, 영어 몰입 교육 논란, 공공영역 민영화 등 MB 정권의 비합리성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의 표출이었다. 평화적으로, 너무나 평화적으로! 거리는 축제로 변했고, 발랄하고 즐거운 행진이 되었다. 많은 비평가들이 새로운 시위문화의 출현을 말했다.

 그런데, 당시 촛불이 최선(最善)으로 여긴 비폭력이, 사실은 <지배권력에 순치된 국민의 질서 이데올로기>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반대로 시위가 폭력적이었다면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아마도 그렇게 많은 시민이(비폭력 이데올로기가 학습된 국민이) 참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권력은 폭력 시위를 부각시켜 시위대를 고립시키고, 강제진압의 명분을 확실히 얻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이러나 저러나 촛불이 얻은 것이 무엇인가? (시민 네트워크니, 기억의 학습이니, 혹은 확인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는 지금 괄호 쳐 내고 이야기 하자. 그리고 나는 의지적 낙관주의자로서, 촛불은 반드시 기억의 정치로 되돌아 올 것임을 믿는다. 그런데 이것만이 촛불의 의미라고하기에는 너무 허전하지 않은가?) 더구나 당시 촛불의 현장에서 시민을 대하던 국가 권력의 모습을 보라. MB정권에게 평화시위라는 것은, 차도에도 내려오지 말아야 하며, 그야말로 ‘모든 정치적 말과 행위', 즉 그 어떤 의미도 거세된 것만을 평화로 여긴 것이다. 어쩌면 87년 6월처럼 최루탄이 없었던 것을, 아니 80년 5월 광주에서처럼 총을 쏘지 않았던 것을, 국가권력의 ‘평화적 대응’으로 고마워해야 하나? 지난 여름 이후, 국가의 명백하고도 노골적인 폭력을 다시 목도하면서, 그리고 그 앞에서 ‘비폭력’만을 외치는 시민들의 순진함(?)을 보면서, 그리고 촛불 후에 엄청난 국가 폭력의 반동을 보면서, 나는 폭력에 대해서 예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 ‘폭력은 안 된다’라는 막연히 ‘올바른’ 도덕이야말로 도리어 폭력을 용인”(12)하는 꼴이 되며, “더구나 종종 ‘폭력을 행사하는자’는 ‘폭력을 행사할지도 모르는 자’로까지 확대되어 현실적으로 폭력이 발생하지 않는 곳에 폭력이 발생할 것 같다는 이유로 폭력이 행사되는 기묘한 사태마저 생겨나고 있다. 그곳에서는 ‘폭력은 안 된다’는 구호를 부르짖는 자들이 행사하는 폭력만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9)

 이처럼 시민의 폭력은 과대 규정되는데 비해, 국가 폭력은 너무나 손쉽게 용인되는 비대칭성에 대해, 나름의 정리가 필요했다. 그런데 국가라는 것이 추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운영 주체가 있다. 다시 말하면, 지난 여름 이후 보여주는 국가의 폭력은 'MB-한나라당-뉴라이트-조중동-자본가'들이 바로 국가 권력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무엇이 정당한 폭력이고 무엇이 부당한 폭력인지를, '그들' 국가가 독점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들 국가>가 하면 연애요, 국민이 하면 불륜인게라~.

그런데 당시 나는 촛불의 그 평화가 오히려 좀 기이하기까지 했다. 시민의 넘치는 분노가 저렇게 아름답게만(?) 표출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효한가 혹은 옳바른가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광화문 MB 산성 앞에서 산성을 넘을 것이냐, 마느냐를 두고 현장에서 열 띤 토론이 있었다는데, 시위가 비폭력이어야한다는 것이 주류였단다.  

“그(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직접행동 자체가 ‘평화’적인 것이라는 이미지는 완전한 오해이다. (…) 요컨대 비폭력 시위라면 진압 경찰과도 평화적으로(아주 사이 좋게) 대치해야 한다는 식으로 긴장을 기피하는 것이 마치 비폭력 운동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킹과도, 간디와도 완전히 무관하다. 킹은 비폭력 직접행동을 결코 단순한 ‘평화’적인 수단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평화에 관한 시각의 근본적인 차이마저 숨어 있다고 말해도 좋겠다. 평화란 단순히 ‘파란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인가, 아니면 역동적인 항쟁 속에서 끊임없는 행동에 의해 유지되고 확대되고 심화되어 가는 어떤 힘으로 충만한 상태인가?” (41) 

 간디나 킹의 비폭력 운동이, 진압 경찰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으로 오해받곤 했다. 이 사회에서 누가 가장 비폭력을 힘주어 말하는지 보라. 우습게도 제도 교육권에서 가장 열심히 주입하는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폭력은 나쁘다. 간디를 봐라, 비폭력으로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느냐, 어떤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역시 학교답다. 그런데 간디는 <비폭력>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을 주창했다. 즉 간디의 비폭력 저항의 효용성 유무와는 별개로, 그것이 ‘저항’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것임에도, 대부분 ‘비폭력’에 방점을 찍는다. 예전의 어떤 자료에서 본 간디의 말을 옮겨본다  

“ 비겁과 폭력 사이에 선택해야만 한다면 나는 폭력을 택하겠다. (…) 세계는 논리만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삶은 어떠한 종류이든지 폭력을 수반하지만 그 사이에서 가장 비폭력적인 길을 찾아야 한다.”

 즉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비폭력이라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난 당신에 반대한다”는 저항을 행동으로 실천하는데, 저항의 방법이 폭력이 아닌 비폭력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간디의 비폭력 저항이 효용성에서는 의문을 제기 받는다.) 우리는 간디의 비폭력을 마치 ‘힘을 거세한 움직임’으로 세뇌시키는 지배 담론에, 일정 부분 속아 넘어간 것이라 본다. 비폭력의 전술이 유효하려면, 엄청난 지속성과 대항적 에너지가 필요한데도, 우리는 그러지를 못했다. 그런 비폭력 운동은 지속적 응집력을 가져야 하는데, 정말 쉽게 가능하지도, 또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기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비폭력 직접행동의 목적은 대화를 끊임없이 거부해 온 사회에 어떻게든 우리가 제시한 쟁점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위기감과 긴장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 비폭력 저항자들의 임무 중 하나” (42)   

 비폭력이 유용한 전술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지만, 비폭력의 요체는 ‘폭력은 무조건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긴장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적대성(antagonism) 과 폭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당신의 결정에 동조할 수 없다!’라는 <적대성의 표출>이, 비폭력 저항의 핵심이다.

 “킹은 자신에게 과격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백인 목사나 ‘자유주의자’들에게, 원래 예수도 사도바울도 루터도 링컨도 제퍼슨도 그 시대에는 ‘과격주의자’가 아니었느냐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문제는 우리가 과격주의자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과격주의자가 되는가이다.’ 그러니까 적대성이나 대립을 격화시키는 것 자체는 의심할 여지도 없는 대전제이며 어떠한 적대성을 어떻게 격화시킬 것인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킹에 의하면 폭력을 절제한다는 말은 곧 적대성을 최대한 끌어올린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핵심이다. 적대성과 폭력을 구분하지 않으면 결국 폭력에 직면하더라도 성인(聖人)처럼 행동하라는 단순한 도덕이나 종교론으로 귀착해 버릴 위험이 크다.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대중의 힘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또한 더욱 급진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 폭력을 절제하는 것이다. 이는 부당하고 거대한 폭력의 힘을 분산시키거나 혹은 반대로 더욱 확정시키면서 자신의 힘을 적절하게 또는 최대한으로 발휘해 대항하는 전술이다.” (46)   

 60년대 흑인들의 앉아있기 운동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 같다. 레스토랑이나, 버스에서 흑인들이 받은 차별에 대해, 그들은 ‘행동’했던 것이다. 백인들의 조롱과 위협, 그리고 신체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그냥 앉아 버티는 것이다. 백인들의 폭력에 대해서 비록 대항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지만, 버티고 앉아 있음으로해서 백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해 엄청난 적대감을 표출했던 것이다. 그것은 적극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닌,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킹과는 달리 맬컴은 폭력에 좀 더 가까이 가 있었다. 우리가 맬컴 X 하면 바로 폭력성이 떠오른 것은, 킹에 비해 상대적으로 폭력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것과 함께, 미국 백인들이 만든 왜곡된 이미지 탓이기도 하다.  

 “수단과 목적이라는 도식으로 정리한다면 확실히 킹 목사의 논리는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역시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간디도 비슷하다. (…)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맬컴이 킹의 비폭력주의를 비판하고 폭력을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상호적인 원리’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흑인들에게 일상적으로 행사되고 있는 백인 사회의 폭력에 대해, ‘계속 그렇게 한다면 언제까지 잠자코 있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었다. 맬컴이 먼저 공세적 혹은 공격적인 폭력을 권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52)  

 즉 맬컴에게서 폭력은 단지 수단과 목적이라는 도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미국 사회가 흑인들에게 행사하는 구조적 폭력에 대해, 흑인들이 침묵하거나 혹은 그 폭력을 자신에게로 내향시켜 왔다. 그래서 흑인들은 자존감을 침해 당해 왔다. 이에 맬컴은 백인의 폭력을 우리 흑인이 품고 있지 말고, 흑인의 자존감을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흑인 내부에 쌓인 자기 증오를 버리고, 백인에게 무릎 꿇는 예속을 버리고, 그런 백인들에게 적대감을 가지는 것은, 곧 자기증오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무조건적 폭력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60년대 흑인들이 수시로 린치를 당하고 일상적 폭력에 노출된 상황에서, 백인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이 흑인들의 자존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먼저 폭력을 행사하는 백인에게는 참지 말고 폭력으로 대응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나름 정리해 보자.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으로는 다음 3가지 방법이 있다.
1. 비폭력 : 폭력에 대해 폭력적 행동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대신에 적대성을 표출하는 비폭력 행동을 취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그 유용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의 경우다.  

2. 대항 폭력(counter-violence) : 칼에는 칼이라는 식의 폭력을 말한다. 즉 어떤 폭력에 대해 동일한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이의 근거는, 국가나 체제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채택되는 폭력은, 국가나 체제의 폭력과는 동일한 수준의 폭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더 큰 폭력의 순환을 가져오며, 파괴적 양상으로 치달을 수 있다. 맬컴의 경우다.

3. 반폭력(anti-violence) : 현재의 부당한 지배관계를 부인하는 것으로, 폭력에 대해 그 폭력을 무력화하고 해체하는 것에 중점을 두며, 자신이 폭력에 머무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가장 고차원적인 설정인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설명이 좀 애매하다. 또 대항 폭력과 현실적으로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가 모호하다.  

 그런데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은, 이처럼 대항폭력이니 반폭력이니 하는 개념이 나오는 것은, 그런 대응수단의 효용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비폭력 운동이 줄곧 시도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효용성이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새로운 저항의 탐색인 것이다.

 그런데 비폭력이든 대항 폭력이든 반폭력이든, 여기에는 또 다른 '사회적 힘'이 결합되어야만 한다. 킹은 미국 인종 차별을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적대성을, 계급간의 갈등에서 찾아내어 이른바 <계급투쟁> 쪽으로 방향을 틀어갔고, 맬컴은 <분노>에 대해 말했다.

“맬컴은 흑인들의 자기 혹은 타자에게로 향하는 증오를 분노로 바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58)

“증오를 치유하는 것은 우선 이 증오를 끝없이 재생산하는 제도의 해체로 향하는 분노이다”(61)

“증오의 제도화 혹은 착취라고 하는 상황 속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짓은 사랑을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 실질적인 내용을 사랑으로 제거해 버리는 행위이다. 바로 여기에 맬컴의 킹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 있다.” (60)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 말이 단순히 비폭력을 말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순종과 굴종을 말한 것은 아니다. 예수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 뺨까지 내밀어라’라는 것을 단순히 비폭력 인내로만 여기는 것은, 내가 취하는 해석이 아니다. 두 사람이 마주본 상태에서 상대의 오른 뺨을 치려면 가해자는 왼손을 사용해야한다. 왼손의 사용은 상대를 가해하기 위한 상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서 왼손의 사용은 모욕의 의미가 강했다. 즉 ‘야, 이 자샤! 까불래?’라며 모욕을 가하는 행위였다. 이에 대해 왼뺨까지 내밀고 또 때리라는 것은, 상대방이 오른손으로 진짜 힘을 주어 가격하라는 것이다. 왜? 그래야 때린 그놈을 법정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상대를 가격하여 상해를 입히는 것은 당시 로마법에서는 분명 죄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 에피소드는 ‘비폭력 인내’라는 해석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어? 제국주의 네 놈이 날 모욕해? 이 짜샤! 한 번 해 볼래? 진짜 네 놈이 옳다면 때려봐! 때려봐!”라며 저항, 즉 적대성의 강한 표출인 것이다. 결코 고분고분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해석에 대한 자료는 주로 <예수 세미나> 회원들의 저작들에서 나타나는데, 『예수에게 솔직히』- 로버트 펑크의 해석을 따랐다.)  

 또한 폭력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프란츠 파농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의 투사이자, 정신과 의사. 참으로 멋진 조합이다. 그는 폭력 저항을 적극 실천한다. 파농은 식민주의는 근본적으로 폭력적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이해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에, 시민사회의 매개나 변증법적 통합의 노력조차 부재하게 된다. 그래서 군대나 경찰의 일상적 폭력이 노골화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식민주의 사회의 폭력은 근본적 양상을 띠는데, 파농이 말하는 폭력의 본질은, ①식민주의 속에 폭력이 편재하다가 ②그것이 동포나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다가 ③ 드디어 내향을 멈추고 식민주의 자체로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즉 지배자에게로 향하는 폭력으로 ‘부메랑의 요소’라한다. 다분히 정신분석 의사다운 해석이기도 하다. 폭력을 치유의 과정으로 여기는 것이다. (64)

파농은 폭력은 “원주민의 열등 콤플렉스나 방관 내지 절망적인 태도를 없애 준다. 폭력은 그들을 대담하게 만들며 자기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회복시킨다.”(66)

“투쟁은 폭력적이어야 한다” 즉 비록 독립을 달성했다하더라도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은 그렇지 않은 독립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피 흘리는 투쟁을 통한 독립은 식민지 모델로부터 보다 근본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식민지 괴뢰정부 밑에서 안주하던 엘리트의 연속성이 유지되어 결국 사회는 본질적으로 전혀 변하지 않을 것(68)

 일제로부터 무장 투쟁 독립을 거치지 않은 우리로서는 ‘식민지 모델로부터 근본적으로 결별’하지 못했다. 그래서 ‘괴뢰정부의 엘리트의 연속성이’ 어떻게 후대의 삶을 왜곡 시키는지, 우리나라 만큼 좋은 예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폭력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분명히 선을 긋고 비판적이다. 그녀는 권력과 폭력을 구분하는데, “아렌트의 말을 빌리면 이론적으로 권력은 목적 그 자체이며 폭력은 어디까지나 도구에 불과하다.” (86)

 아렌트는 말하길, 권력은 개인의 것이 아닌 집단의 것이며, 어떤 집단이 유지되는 한 권력은 계속 존재하게 되며, 이는 사회 생활의 필연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단지 폭력은 권력을 파괴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미셀 푸코의 권력론과도 통한다. “푸코는 권력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았다. 오히려 권력이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91) 이는 존재와 힘(권력)을 동의어로 전제하는 니체(Nietzsche)적 세계관과 닿아 있는 것이다. 특히 푸코는 권력의 기능을 자본주의적 생산과 연관시켜 살핀다.

“생산의 장에서는 그 힘을 최대한으로 사용하도록 강요당한다. 한편 정치의 장에서는 반란 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그 힘을 최소화하도록 조종당하며 이를 통해 더욱 사육에 길들여진다. (…) 이처럼 정치적 힘이라는 측면에서는 최소화되고 생산이라는 측면에서는 힘을 최대화하도록 강요당하는 행위자는 근대에는 ‘노동자’라고 하는 가면(=주체)를 부여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97) 

 참으로 간단하면서도, 날카로운, 자본주의 권력 통찰이다.

 1992년 LA 폭동은 5일간 55명의 사망자를 낸 최대 규모였다. 로드니 킹이 무방비로 폭행을 당했는데, 이처럼 사회적 다수자와 강자들이 약자와 소수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심리에는 “상상적인 전도(imaginary inversion)”(119)가 작용한다고 한다. 강자나 다수쪽이 오히려 약자를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는, 즉 심리적 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오히려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숙자들이 일반인들의 위협에 훨신 더 많이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일반인들은 노숙자들이 자신을 위협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들을 경계하고 과도한 폭력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디스 버틀러의 지적처럼, 흑인의 페니스가 엄청나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백인들이, 흑인 남성으로부터 백인여성을 보호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흑인 남성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수 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이 사실은 ‘전도된 공포’를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가에 의한 폭력이 항상 ‘예방을 위한 대항 폭력’으로 정당화되는 것도 이와 동일한 메카니즘인 것 같다. 모든 침략 전쟁도 ‘자위’의 구실을 달고 있는 것처럼!  

 “미국의 정치학자 셸든 월린은 현재의 아메리카를 역(逆)전체주의 혹은 반전된(inverted) 전체주의로 분석하고 있다. 지금의 아메리카는 무제한의 권력에 대한 욕구와 공격적인 팽창이라는 점에서 나치즘과 똑같지만 수단과 행동이라는 점에서는 역전하고 있다.(…)나치가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체제를 떠받치도록 요구한데 반해 역전체주의(미국)는 정치적인 동원 해제와 투표의 기권을 요구하고 있다.”(130~131)

 미국민은 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가? 미국은 통치 형태로서의 공포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 뉴스가, 에이즈, 홍수, 살인 등 온갖 뉴스로 공포를 안겨주며 공포를 생산해 내고 있다. 총기 소유자로만 본다면 캐나다가 훨씬 많은데, 미국에서 총기살인 사건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미국이라는 사회가 늘 공포를 조장하고 이웃에 대한 불신을 선동하고 있기 때문으로 본다. 또한 이것은 경제 사회 보장의 열악함과 결부되어 있다. 일본의 경우 젊은 층의 살인 비율이 아주 낮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는 젊은층의 흉악함을 강조하는 것은, 전후 교육을 비판하려는 정치적 조작에 의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래저래 <전도된 공포>가 폭력 통치의 구실을 마련해 주는 것이며, 더 큰 폭력과 공포를 외부로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 ‘반폭력’이란 말은 모든 국가적 폭력의 근절이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다면, 또는 모든 폭력을 구조화하고 있는 제도를 해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폭력은 그것이 지니는 많은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옹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반폭력’을, 정당화되지 않는 대항적 폭력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현재로선 잘 모르겠다.”(218)

 즉 모든 폭력을 해체하는 반폭력의 정당성은 옹호하지만, 이것이 대항적 폭력과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이는 이론적 구분일 뿐, 현실에서는 아무런 효용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 아닌가? 정당한 정치적 저항마저도 불법의 딱지를 붙여버리는 이 시대에, 우리의 저항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속 시원한 답은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저항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으로든 저항해야 하는 것>이리라.

폭력에 대해 나름 정리가 잘 된 책이다. 군데군데 약간 모호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많은 미덕이 이를 상쇄시켜 준다. 이 만한 책을 찾기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출판사가 ‘산눈’이라고 낯선 곳인데 혹시 일찍 절판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함께 읽은 『폭력』 (책세상 刊 공진성 著)은, 빈약하고 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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