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데 어떤 연결고리가 느껴졌다. 2300년의 간극을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존재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나를 비춰보게 된다. _ 아르스토텔레스의 호기심,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생각하면 인간의 발전이 한쪽으로 몹시 기울었다고 여겨진다. 내적인 발전은 없이 외적인 발전만, 존재에 대한 탐구는 잠시 미루고 과학과 기술만 개발해온 것은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와 세계가 엄청난 발전 속에서도 병들어 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휘청거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400년의 과거에서 시작해서 지금의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들에 진중하게 답변해야하지 않을까? _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크라테스-플라톤에 이은 철학자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생물학에도 관심이 많았고 놀라운 관찰의 기록들도 많다. 생각보다 순탄치 않은 삶이었고 생각보다 인간적인 면모도 만날 수 있었다. 거장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큰 즐거움이지만 나는 무엇보다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에 가장 반응하게 된다.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는 것들, 적용할 수 있는 것들. ‘거장’으로 불리우는 이들에게서 나의 일부분을 반견하고 일치점을 찾는 것은 세계와 영역이 확장되고 성장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뒤늦게 읽은 아리스토텔레스 편도 너무 좋아서 최근 발간된 에리히 프롬 편을 읽으신 분들은 아르스토텔레스 편의 중후반부를 다시 한 번 보는 것도 좋겠다. 인간이란 이토록 놀라운, 이토록 익숙한, 이토록 애처로운 존재인가 보다.
종종 욕구가 사라지고 있다고 느낀다. 의지나 의욕, 열정 등이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간절함은 흔적도 없고 설렘도 기쁨도 드물다. 무감각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가. 무기력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가. 혹 무용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가. _ 욕구와 감각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양해지고 있고 다들 무엇을 찾아내고 싶어하며 손에 쥐려 한다. 그 무엇이 획일적이고 단순했던 시기를 지나 다양하고 구체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로 변하는 중이다. 그 변화를 위한 도전들이 계속되고 있고 심지어 유행이 되기도 한다. 거기에 에리히 프롬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야 한다고 덧붙인다(이건 순전이 주관적인 해석임을 밝힌다*_*). 표면적인 것들과 직접적인 것들이 내면적인 것들로 둔갑하기도 하고 오해되기도 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정확한 분석과 구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왜’라는 의문이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인간이라는 종에게 붙어서 결국 한 개인을 겨냥한다. 그것은 몹시 날카로워서 아주 아프지만 표피의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다만 깊이 박혀서 오래 골몰하게 한다. _ 무기력을 핑계 삼아 미루고 방치한 것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무기력의 원인조차 변명과 합리화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비겁한 것이 아닌 내게 긍정하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했다는 것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서 삶을 사랑하지도 욕망하지도 즐기지도 못했고 내 삶을 남에게 의탁해온 것이다. 좀 더 분명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 자체도 합리화였을 수 있겠다. 무기력은 아주 요긴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 무기로 자신만이 아닌 누군가를 상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일견 정신이 번쩍들고 집중하지 못한 것을 반성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적용하고 변화할지 방법도 모르고 의지도 부족하겠지만 일단은 시작해보겠다. 무엇이 되었든, 온전한 내가 즐거운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싶다._ 정신분석학, 심리학, 철학에 대해 하나씩 만나다보니 조금 친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여럿을 만났는데 에리히 프롬이 가장 나를 찌르는 것은 그의 사상과 철학의 탓일수도 다양한 누적일 수도 있겠다. 여하간에 프롬의 책을 더 읽어야겠다.
어떤 이유에서 소송이 벌어졌는지는 끝내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모두 소송을 잡으려 빙빙 돈다. 마치 꼬리잡기를 하는 것처럼 계속 쫓는다. 쫓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 결과도 짐작할 수 없고 의미도 모른채 빙빙빙. 어쩌면 카멜레온일지도 모르겠다. 대상은 변하지 않지만 색이 달라지고 그것이 같은 것인지에 대한 확신 또한 없다. 요제프 카는 어쩌다 소송에 휘말렸는가. 그것이 궁금했는데,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관계한 모든 이에게도 그것은 중요치 않다. 단지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목적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어느 길에도 확신은 없다. 하지만 원인을 모른 채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가. _ 규정된 법과 실제의 적용 사이의 허구를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오리무중이긴 매한가지고 어쩌다 그 함정에 빠졌는지도 모르고 논리나 이성이나 규칙 따윈 없다. 실재의 세계는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제멋대로 굴러간다. 그 속에서 요제프 카가 과연 인간이긴 한가. 일종의 매개체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글에서 주어지는 요제프 카에 대한 무수한 정보들이 이 소송에 관련이 있기는 한가. 그가 옳거나 그른 것이 의미가 있는가. _ 처음 만나는 카프카는 너무 어렵다. 사실 카프카의 삶에 대해 작품에 대해 알고 있는 아주 약간의 정보를 꾸역꾸역 대입해도 쉽게 다가오진 않는다. 알 수 없는 것을 쫓고 있는 요제프 카와 알 수 없는 카프카를 읽고 있는 내가 일견 유사하다. 더 읽어야겠지만 공을 들여야 가능한 일이다. 해석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고 해석을 들여다봐도 정답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카프카의 세계, 카프카의 의도, 카프카의 상상 그 어느 것도 가깝지 않다. 그저 좀 인간이 참 우습고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 참 하찮게 여겨질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이 사람 참 신기하다며 자주 놀랐다. 의례 그러저러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을 가뿐히 즈려밟는다. 세상의 시선에 꽤 사로잡혀 있는가하면 전혀 개의치 않기도 한다. 세속적이고 허세가 있나 싶으면 지극히 성실하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인가 하면 안정을 추구한다. 일견 뻔뻔해 보이기도 하고 다정하기도 하고 알다가도 모르겠고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하며 웃게 된다. 너무 독특하고 너무 인간적인 모네를 생각하고 그의 작품을 보면 이제 까지완 다른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의 작품은 모두에게 익숙하다. 고흐, 클림트와 더불어 무수한 굿즈로 만날 수 있고 그만큼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작가가 아닌가. 익숙하지만 원화는 또 다르다는 것을 안다. 원화에서맘 만날 수 있는 붓질과 그 두께감과 작품의 크기에서 오는 압도를 느끼고 싶다. 마침 한가람 미술관에서 4월 중순까지 ‘모네에서 세잔까지’가 전시중이다. 생각만해도 설레는 전시들이 상반기에 줄줄이 대기중이다. 툴루즈 로트렉전도 무하전도 보고 싶다. 잘 몰라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예술이지만 잘 알수록 더 보이는 것이 예술이기도 하다. 모네를 조금 더 알았으니 전시회가 더 즐겁지 않을까? 모두 모네를 읽고 모네를 보러 가자! 선동이라도 하고픈 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