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은 속삭인다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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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행동, 처한 환경,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무엇으로 인해 규정지어지는 경우가 있다. 아니 너무 많다. 대부분이 그렇다. 책임지고 감당해야만 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불가피하고 억울한 부분 역시 간과해선 안된다. 원칙과 소신과 법과 정의. 그 사이사이의 많은 것들- 결코 작지 않고 무시할 수 없으며 차별이나 혐오, 범죄로 이어지는 것들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체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안정과 형평을 위해 그것을 감수하고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는 말이다. 수 년 사이 나는 이 문제에 골몰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더 깊이, 어느 때 보다 더 절실히, 어느 때보다 실감하며. 다양한 형태로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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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독특한 이력이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성실한 한 소년에게 닥친 사건. 그 속의 무수한 인간과 사연들이 버무려 있다. 결국은 선택한다. 선택해야 하고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누구도 명확히 알 수 없다.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어디까지 책임져야 할까? 선택에서 고려해야할 사항은 무엇일까? 두렵다. 혹 이 선택이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면? 나를 내내 옭아멘다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 모두 망치게 된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감당하고 어떻게 책임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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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결말이 어떻든 좋다. 늘 그렇듯 주인공 곁엔 꽤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을 걱정하고 염려하고 도우려 한다. 마치 제 일처럼 나서주기도 하고 말없이 어깨를 빌려주기도 하고 대신 울어주기도 한다. 그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억울한 일을 잊고 원망하던 사람을 용서한다. 그렇게 살아간다. ‘걔는 주인공이라서 그래’가 아니다. 장르가 다를 뿐, 전개 양상이 다를 뿐 스스로 인정하든 안하든 모두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내 곁에도 분명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물론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더 재미난 부분은 그들 역시 주인공이라 그 들 이야기 속에서 나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작용한다는 점이다. 사는 게 그렇지, 뭐-하면서도 고마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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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여사의 글은 반반이다. 꽤 마음에 들던지, 몹시 안내키던지- 이 글은 꽤 마음에 드는 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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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여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오후세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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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둘러싼 소문. 그것들이 과연 사실일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가 거짓일까?
소문의 여자. 라는 여자라는 점에서 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와 닮았다. 서술방식은 전혀 다르다.
한쪽은 소문에 집중하고 한쪽은 진실에 집중한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

비겁한 것에 대해 질색한다. 과연 나는? 이라고 생각하면 더없이 비겁하다. 이것저것 핑계 삼고, 멋대로 고집부리고 더없이 한심하다.
그닥 타인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살아왔다. 소문에 신경쓰지 않고 멋대로 해왔다.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은 마음도 별반 없고, 좋은 사람이 될 마음도 없고, 큰 욕구나 의지가 없는 그런 매일을 산다.
내심 뭔가 화끈하고 자극적인 일을 꿈꿀지도 모른다. 이런 잔잔하다 못해 지루한 일상에서 사건을 꿈꾼다면 그 방법이란 뻔하다.
일탈-을 넘어선 개의치 않는 뻔뻔함이 필요하다. 주도면밀한 준비와 함께 타인의 삶이든 감정이든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나만 생각하고 저지를 수 있는 대범함.
비난과 동경은 공존한다.
내가 할 수 없으니(어떤 이유든-) 나쁘다고 뻔뻔하다고 수상하다고 비난하고, 내가 할 수 없으니 부럽다고 근사하다고 대리만족하며 동경한다.
비난을 좀 받더라도 근사하게 화려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나쁜가? 그렇다면 도덕과 유희 중 유희를 택하면 나쁜가? 그렇다면 법이나 원칙을 어기는 것은 나쁜가?
별 수 없다. 나는 어쨌든 못한다. 솔직히 동경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소심하게 뭐, 좋기는 하겠네.하며 잊는다. 나와는 전혀 다른, 나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것들에 애써 생각지 않는다. 지레 겁먹고 포기한다.
소문이 진실이든 아니든 나는 법이나 원칙, 최소한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타인이야 어떻든 내가 그럴 수는 없다. 그런면에서 보수적이지만 내 기준이란 좀 흐물흐물한 면도 있으니 어물쩡 넘어갈 수 있다.
소문의 존재도 되고 싶지 않고, 그 소문이 궁금하지도 않다. 다만 좀 잘 살았으면, 활기있고 건강하게 신나게 살았으면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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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인간학 - 약함, 비열함, 선량함과 싸우는 까칠한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 지음, 이지수 옮김, 이진우 감수 / 다산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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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조절장애라도 있나-싶었다.
착한 사람 혹은 약한 사람의 변명과 합리화에 대해 질타를 넘어서 분노하는 글들을 읽으며 생각이 많았다. 번역이 애매한 건지, 글이 정신없는 건지는 몰라도 어떤 집단이나 사람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거의 모든 존재에게 화내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이것도 나쁘고 저것도 나쁘고. 이 전에 읽은 책이 니체를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씌어졌다면 이 책은 니체를 싫어하는 사람이 쓴 것이 분명했다.
분기탱천의 마음으로 쓴 글이라는 생각에 일정부분 반성할 수 밖엔 없었다. 내가 쓰는 것들도 태반이 그렇지 않나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문하고 의혹을 가지고 다시 살펴보고 틀렸다고 아니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엔 변함없다. 그 탓에 까다롭다, 예민하다, 성격 나쁘다, 4가지 없다 등등의 평가가 내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을 작정이다. 다만 말이든 글이든 좀 더 정확해지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작가의 ‘트집’에 불편하면서도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런 사람인가 아닌가, 나는 어떤가를 돌아보면서도 최소한 그럴려고 노력중이라는 변명을 해본다.
저자는 니체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나처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니체의 삶을 말하는 부분에선 어조가 달라진다. 그의 사상이나 철학이 관계와 사람들 속에서 완성되었다면 어땠을까? 니체로선 불가피했다지만 좀 달라지지 않을까?
우리는 자주 유리한 쪽으로 생각한다.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옳고 그름 이전에 타산을 따진다. 누구든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상주의자로 원칙주의자로 살고 싶다. 그 전에 이 과한 오지랖을 해결해야 겠지만-;;
저자가 비난하는 착한사람에 속할까? 아닌가? 못해도 49~51% 정도는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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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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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준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다. 혐오와 페미니즘이 한데 묶여 내게 다가왔고 온전한 내 기준을 갖기 위해 공부해야 했다. 어느정도 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어쩐지 불편하고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서 개운하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되는 중이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을 갖기 위해 무엇이 어떻게 옳은지에 대해 이 쪽 저 쪽에서 생각하는 중이다. 이 책 역시 그 일환이다.
혐오표현을 떠나 바른언어에 대해 몹시 까다로운 편이다. 욕설을 비롯한 비속어를 사용하지 말 것, 바른 표현과 바른 표기를 위해 조심할 것 등. 꽤나 까다롭게 군다. 일례로 며칠전 ‘간지’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아들이 놀라며 ‘엄마도 그런 단어를 사용하다니,신기하다’고 했다.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혐오표현에 대해 발작적인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더욱 알아야했다. 정확히 무엇이 혐오표현이고 그것이 생겨난 이유와 그것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 가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불편하던 부분이 일정 해소되었다.
편견이 없지 않다. 아니 꽤 많은 편이다. 단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스스로 편견임을 인식하고 바꾸려 노력한다. 편견-혐오표현-차별행위-증오범죄로 이어지는 흐름에 대해 씌여있다. 얼마나 쉽고 편하게 기준을 바꾸고 적용하는지 그것리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다시금 확인한다.
나는 예민하고 까다롭고 불만많은 사람임에 틀림없고, 윤리적으로 훌륭한 인간도 못된다.
다만 옳은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그것을 행하려 함께 노력한다. 그것이 과연 바른지 거듭 확인하고 내 기준이나 고집에 맞지 않아도 일단 다름을 존중하고자 애쓴다. 나는 완성형이 아니고 그것은 죽기까지 변하지 않겠지만 십원반푼어치라도 나아지기 위해 애쓰며 살고 싶다. 대단한 정의와 원칙은 아니라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당당할 수 있길 원한다. 내가 목표하는 것은 성공과 성취를 이뤄낸 인간도 아니요, 남부러울 만큼의 행복을 누리는 인간도 아니다. 늘 전전긍긍하며 갈등하고 넘어지고 못나고 부족해도 당당하고 싶다. 나는 이만큼이고 그것을 원망하고 억울해하지 않으며 타당한 기준을 가지고 바르고 행복하려 애쓰며 살고 싶다. 모든 인간의 목표는 저마다 다르고 기준 역시 저마다 다르지만 그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할 수 있는 세상에서 미미한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부족해서, 갈등할 수 있어서, 조금씩 자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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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 알프스에서 만난 차라투스트라 클래식 클라우드 2
이진우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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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니체의 글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중2가 된 아이가 니체의 몇몇 문장들을 읽고선 중2병이라며 니체를 통해 자기를 더 이해할 수 있을거라 말했다. 아마, 그 표현이 가장 정확하리라. 중2병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자신을 찾는 과정에의 혼란일 것이다. 니체는 끝없이 자신을 통해 모든 것을 비추고 찾고 발견한 것일 아닐까?
지독한 고집쟁이인 탓에 어떤 글이든 내식대로 해석한다. 니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니체의 사상과 철학을 이해했다기 보단 공감하고 반문하며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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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고독을 선택했다. 사유하기 위해, 삶의 당위성과 목적과 이상을 위해. 하지만 그 고독이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생각을 나누고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니체의 언어는 문장으로만 존재했다. 왜곡되고 오해받았다. 언어는 문장으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뱉어내는 사람의 일상과 삶 석에서 해석된다. 타인이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은 활자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다.
날카롭고 기민한 사유를 위해 최대한 고독하려 했기에 이해받을 수 없었다. 그 갈등을 선택했지만 그를 외롭고 쓸쓸하고 병들게 했을 것이다.
삶과 자신에 대한 강한 집착이 죽음에의 공포와 병으로 인한 고통에서 비롯되었다면 간절히 원했던 삶 대신 공포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은 것이다.
안쓰러웠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그의 삶이,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는 그의 세계에서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스스로에게 침잠하는 것만이 유일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신은 죽었다.고 신의 타살을 외친 그에게서 신을 향한 절절한 기도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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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도깨비나 외계인 같다.
전혀 다른 세계에 똑 떨어진 자의 끝간데 없는 슬픔과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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