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는 ‘아서와 조지’라고 한다. 난 역시 원제가 마음에 든다. 한국어판 제목은 느낌이 너무 가볍고 주제와도 동떨어진 느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기도 친구도 이 책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나처럼 작가별로 뒤지고 찾아보는 사람들에겐 아무 관계없다. 약간 아쉬울 뿐._ 전혀 관계없는 두 소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혀 다른 성격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하나의 점접도 없는 이야기가 외따로 그려진다. 과연 우리가 그들의 성장과정을 알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복잡해진다.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면 필요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의 줄거리 중심의 기승전결이 분명한 이야기를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이야기와 인물을 통해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이번은 진실과 믿음이 주제라고 내멋대로 결론 짓는다. _ 첫 만남부터 줄리언 반스는 똑똑하고 재밌는 할아버지라는 인상이었다. 그의 나이나 글에서 느껴지는 고루함이 아닌 죽음을 이야기하는 에세이를 가장 먼저 만났기 때문이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낄낄거리며 읽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물론 책 제목부터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이었지만 말이다. 이 인상은 작가의 소설을 계속 만나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조금씩 추가될 뿐이다. 아주 기발하고 위트있는 무신론자 할아버지, 엉뚱한 소리로 웃겼다가 한참 후 울게 만드는 이상한 양반 정도의 변주랄 수 있겠다._ 사실과 허구를 어떤 비율로 얼만큼 잘 버무리느냐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그 이야기 속에 뭘 담았는가에 매번 놀란다. 아서 코난 도일과 영국의 상고법원과 파리시 사이의 접점. 거기에 양념 삼아 심령술과 스캔들을 뿌린다.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떤 것이 진짜고 진실인지에 대해서는 늘 열린 태도를 취한다. 관점의 차이, 입장의 차이, 인간이 가진 방어본능과 유약함이 모두 드러난다. 결국 진실은 없다. 아니 진실은 있으되 모두 각자의 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이 부분이 재미나다. 무엇을이 아닌 어떻게다. 저마다 모두 다른 진실을 들고 따지자는 게 아니다. 그 진실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어떤식으로 그 믿음을 다져가고 확신할 것인가. 작가는 자꾸 우리에게 질문한다. 묻고 묻고 또 묻는다. 이 이야기에선 이것을 묻고 저 이야기에선 저것을 물으며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용감한친구들 #줄리언반스 #다산책방
기억으로만 존재할 것 같은 마추픽추 외엔 아는 것도 없는 익숙하고 희미한 나라의 낯선 시인을 만난다. 시인을 만나다보니 그 시인의 나라에서 끔찍한 순간들이 있었을 거라고, 아픈 사람들이 넘쳐났을 거라고 알지도 못하는 역사를 기억해낸다. 더 먼 옛날의 그림도 기록도 찾기 힘든 과거의 나라같던 페루에 사람이 나고 살고 죽고 몸부림쳐온 것을 덥석 집어들고 찬찬히 쳐다본다. 그래서 그렇게 울면서 시를 쓴 건가-하고 이해하는 척 해 본다. ‘한의 정서’를 교과서에서 배운 나는 ‘한’이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먼 타국에도 잔뜩 있구나 하고 주억거린다. 간절한 절망과 참담한 희망을 이리저리 엎었다 뒤집었다 하며 앞,뒤를 고른다. 앞이 나오든 뒤가 나오든 그 반댓면이 사라지진 않지. 거기 바로 찰싹 붙어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자주 깜빡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_ 시인의 나라가 페루냐, 스페인이냐를 묻기전에 정치에도 이념에도 분쟁에도 휘말리지 않고 어떤 갈등도 혼란도 없이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이 있기는 한가 땅 위에 존재하긴 한가 생각한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고 아프지 않은 가족이 없고 아프지 않은 마을이 없고 아프지 않은 나라가 없고 아프지 않은 세상이 없어서 아픈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열심히 혹은 근근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조각의 평안과 안녕을 기도한다. _ 낯선 곳의 발음도 편치 않은 이름이 시인이 낯선 언어로 쓴 시여도 좋았다. 아니 싫었다. 아니 슬펐다. 살아가는 것은 한가지고 사람은 다 한가지지 싶어 고맙고 미안했다. 그래, 시의 이런 면은 참 근사하다. 주제가 무엇인지 알 지 못해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어딘가 알겠는 그 마음. 그런 마음을 주는 시들은 참 근사하다. _ 어젯밤 백석의 시 몇 개를 읽던 김슨생이 말했다. 시를 읽다보면 시인의 눈동자가 떠오르는 게 있다고 시인의 눈동자 시인의 시선, 시인의 앉음새가 떠오르는 시들. 멀고 투명하든 어둡고 탁하든 날서고 아리든 그런 눈으로 무엇을 좇으며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나는 그 눈길을 따라가며 한 마디라도 들을 수 있을까.
담백하고는 거리가 멀다. 대체로 쉽게 욱하고 목청 큰 인상파 고집쟁이로 살고 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으로 살아간다. 담백과 단순을 바라기도 하지만 어쩐지 나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예민하고 까다롭고 문제를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완 요원한 삶이다. 다만 내겐 마법의 문장이 있다. 브레이크는 못되고 클러치 정도랄까? 그 문장은 ‘그럴수도 있지, 뭐’인데 내 경우는 그 뒤에 꼭 ‘왜?’가 따라붙는다. _ 담백하게 사는 방법은 간단한데 실천이 너무 어렵다. 실수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기대치를 낮추고 자신감을 가질 것. 적절한 거리를 두고 순간을 살아갈 것. 너무 간단하지만 지독히 어렵다. 사실 나는 이 방법들에 순서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조목조목 관찰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 서러워서 엉엉 울다가 거울을 들여다보면 점점 진정된다. 아, 얼굴이 심란하네 부터 시작하면 된다. 진짜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정하고 그것에 맞춰 한 발씩 딛으면 된다.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장담할 수 없으니 현재를 응시하며 한 발씩._ 자신에게도 솔직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짐작할 뿐 이해하긴 어렵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방법을 알 리가 없고 그것에 가능한 지 조차 짐작하기 어렵다. 나는 쭉 이래와서 어떻게를 물어도 대답할 수 없는데 흥분하지 않고 조곤조곤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 타인에게 드러내는 과장이나 허세는 어쩔 수 없데도 스스로 그럴 필요는 없을텐데 나로선 설명할 길이 없다. _ 제목처럼 담백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구체적이지만 담백하게 정리되어 있다. 알고 있어도 확인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래, 그렇지 하며 쉽게 읽히는 글을 반성하며 읽었다. 시작해야 할 일들이 생각났고 또 조금쯤 변할 수도 있을 것 같다._ 마지막에 간단한 체크리스트에서 꽤 높은 점수를 받아서 혼자 흡족해하는 중이다. 아, 잠깐 정직하게 체크했던가?
좀 지독하다. 읽는 내내 무엇을 읽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대개 한 번 집어들면 끝까지 단숨에 읽는 편인데, 이 책은 거진 1년이 걸렸다. 이만큼 읽고 덮어두고를 열 댓 번은 반복해야 했다. 결국은 오기가 생겨 이 책을 어떻게든 다 읽고 말겠다는 다짐마저 하게 했다. 어려운 것과는 꽤 다르다. 마치 겨울 읽을 수 있는 다른 언어로 된 글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 시인의 언어란 이런 것인가? 어디에 존재하는 지도 알 수 없는 언어로 타인의 이해따윈 개의치 않고 그저 던져놓는 것일까? 분명 벼르고 별렀을 생각과 마음과 단어들인데 나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활자를 머릿속에 주입해야 했다. 그저 활자를 머릿속에 집어 넣고 소화불량을 견디다가 한계점에 달하면 책을 내려놓았다. 머릿속의 활자들은 부유물처럼 떠돌다가 한 글자가 추가될 때마다 밀도가 높아져갔고 결국은 짜부러지고 바스라지며 기이한 모양새가 되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보겠다고 애쓰다가 그 중 어느 활자인가는 곱씹기도 했다. 곱씹은 몇 활자만 머릿속에 남고 그 잔해들은 추상화도 아니고 매직아이같은 그림자가 되버렸다._ 나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인간이라 복잡하고 어렵고 엉켜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나는 이해하길 좋아하는 인간이라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로는 고개도 잘 돌리지 않는다. 지극히 관념적인 시인지 산문인지 그로테스크한 조형물인지도 알 지 못한 채 책을 덮었다.다 읽었다는 것에 안도하며.그럼에도 불구하고 접혀진 페이지들이 너무 많다.
언젠가 저자의 강의를 TV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아들과 저런 대화가 가능하다니- 저런 부분도 저렇게 교육할 수 있다니- 사춘기 아들을 둔 나는 조급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아들 성교육 하는 법’을 구입하지 않은 이유엔 포기하는 마음이 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이 책을 읽고 구입해두었고 그에 대한 얘기도 넌즈시 아들에게 건네두었다. 같이 읽자. _ 성교육은 단순한 성관계 교육이 아닌 성역할과 자기결정권과 상호 존중의 문제여야 한다. 그릇된 성인식과 성지식을 바로잡고 성별을 떠나 주체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개인의 교육이 가장 먼저겠고 사회도 변화해야 한다. 주체적,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 대등하고 주체적인 성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닌 두 성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많은 부분에 공감했다. _ 나는 성교육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난자와 정자가 나오는 비디오를 중학교 때 한 두번 본 것 같다. 성의 역할이 임신이 전부인 것처럼 임신 위주의 성교육이었다. 모든 여성은 어머니로서만 존재가치가 있는 것 마냥 2차 성징도 임신을 위한 변화, 사랑도 임신을 위한 매개인 것처럼 여성은 임신이라는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존재라는 전제하의 성교육 이었다. 알아야되는 것 만큼 모르는 것, 잘못아는 것이 넘쳐났다. 과거의 성교육에 의하면 여성에게 성이란 숭고한 목적이 깃든 것이라서 그 외는 수치와 터부와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제껏 주욱 얼마나 많은 여자아이들이 성의 부정적인 면을 만나고 피해입으며 스스로의 머릿속에 괴물을 집어넣고 두려워하거나 신성시 되는 모성에 집착하며 살았을까. 제대로된 교육과 이해없이 모든 것이 낭설과 추측과 음지의 루트로 그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해졌는지를 떠올리면 안타깝고 화가 난다. 이젠 분명 다른 교육이 되어야 한다._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지금에야 배우게 된 것이 안타깝다. 성에도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지금에야 말할 수 있다니 화가 난다. 여성은 종속적인 성이 아니고 성별의 차이는 차별로 이어져선 안된다. 이 말은 차이는 인정하고 존중하되 같은 것을 교육해야한다는 의미다. 여성은 여성과 남성에 대해 알아야 하고 남성 역시 남성과 여성에 대해 알아야한다. 두 성의 차이 이전에 두 성 모두 인간이다. 대등한 인간. 인간을 기준으로 한 교육이면 되는 것이다. 성에 대해서도 간단하다. 타인이 강요해선 안되고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이니 타인이 위해를 가할 수 없고 온전하고 독립적인 결정권이 있다. 나와 타인에서 기준은 내야 되어야 하고, 그것은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한다. 이 얼마나 간단명료한가. _ 하지만 너무도 왜곡된 성의식과 성교육을 바로잡기 위해선 좀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아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40년을 여성으로 살면서도 알지 못했던 것들이 있어 배워간다. 잘못된 성의식으로 괴로웠던 부분을 다독여준다. 이렇게 교육받으면 되겠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 모든 것을 얘기하고 상담하고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으면 좋겠다. 단짝과도 부모와도 얘기할 수 없어 혼자 골몰하다 오해했던 과거와 달리 궁금해하고 질문하고 고민도 하고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길 바란다. 이성을 배척하고 혐오할 이유도 신성시하고 종속될 이유도 없다. 그저 다른 것일 뿐, 달라서 더 알아야하고 조심스러울 뿐 성별 이전에 우리는 모두 대등한 인간이다. _ 주변의 딸가진 부모들에게 추천해야겠다. 저자의 말처럼 지금은 교육해야하는 우리가 먼저 교육받아야할 순간이다. 같이 배워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