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가 그림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매일같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쓴다. 사실 리뷰도 서평도 감상문도 이도 저도 아닌 끄적거림에 불과하지만 그 끄적거림이 끝나야 완전히 책을 읽었다는 기분이 들곤 한다.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러했는데, 한동안 책도 거의 읽지 않았고 끄적거림도 없다가 이렇게 sns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렇게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가는 즐거움도 컸다. 그래도 좀 더 잘 읽고 싶은 마음과 좀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그 땐 두툼한 노트에 썼고 지금은 이렇게 핸드폰으로 쓴다. 그림을 늘 동경했으니 글 말고 그림으로도 표현해보고 싶지만 그 애매하고 두루뭉술한 느낌을 표현할 재간이 없다. 여러모로 부러운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_ 책을 더 읽고 싶다. 아니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다. 이 책을 읽으며 책 속에 씌여지고 그려진 책들을 다 읽고 싶어졌다. 그런면에서 위험하다. 역시 책이 더 많아서 읽고 싶을 때 스윽 꺼내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 그랬다가는 작은 집이 무너질지도 모르겠다._ 어떤 읽기가 정답인가에 대해 늘 생각하지만 결론은 늘 같다. 내 식대로 내 멋대로 읽고 만다. 나중에는 좀 더 잘 읽고 싶어질 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고 감사하다. 그래도 이 정도로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너무 감상에만 치우치지 말고 내 기분과 감정만 앞세우지 말고 더 깊게 찬찬히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라니 반갑고 얼마쯤은 닮은 것도 같아 더 반갑다. 이런 얘기들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하면서도 결국 혼자가 제일 편하고 애써 누굴 찾는 게 어렵기만 하다. 앞으로도 주욱- 이런 책을 내주었으면 싶다. 혼자 몰래 엿보고 맞아, 그렇지 하다가 아, 그랬나 하며 비밀친구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도무지 내 취향은 아닐거라고 단정했을 게 분명하다. 제목도 표지도 추천사도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단정했을 게 뻔하다. 종종 내가 얼마나 뻔한 사람인지 잊고서 세상에 가득한 뻔하고 뻔한 것들을 외면하려 든다. 그렇고 그런 것들, 뻔하고 익숙한 것들이 거의 전부라는 사실을 매 순간 겪으면서도 말이다. _ 그 속에서 한 번 더 들어가는 것 뿐이다. 외면과 내면 사이 어디쯤에 걸쳐있는 생각들이 씌여있다. 20대의 일본인들을 열광케 했다는 글에 나는 20대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라며 툴툴 거렸다가도 별반 다를 것 없는 그래봐야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런거지 뭐,라고 중얼거리게 된다._ 이런 책들은 대체로 한 두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적당히! 좋을대로! 정도면 충분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당히, 좋을대로가 얼마나 어려운 지 나이들수록 실감한다. 어느 만큼이 적당한지 무엇이 좋은지에 대한 생각은 좀체로 끝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책들을 읽게 되나보다. 조금쯤 나보다 먼저 속마음을 알아채주어서!
짧은 여러 이야기들 중 첫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 불쑥 짜증이 났다. 5년 만에 내는 장편소설도 아니고 소설집이면서 거기에 또 전에 쓴 글을 끼워넣는단 말인가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찌질한 이기호 작가가 싫었다. 글에 등장하는 작가가 그의 온전한 모습이 아닐텐데도 마냥 싫었다. 찌질하고 한심했다. 결과론적으로 결혼 후 아내를 힘들게 하는 작가가 싫었다. 나설 때 나서지 못하고 변명하고 숨고 핑계 대는 것이 너무 싫었다. 짐짓 개인적인 감정이 솟구쳐(일면식도 없고 그의 소설을 별로 읽지도 않아놓고-) 찌질한 사람은 결혼하면 안되는 거라고 분기탱천하곤 했다. 그런 마음으로 남은 여러 이야기들을 읽어갔다. _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버린 사람들. 사실 저마다 누구나 얼만큼의 찌질함을 안고 산다. 표출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도 총체적으로 찌질한 인간이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 찌질하게 굴거면 차라리 욕을 좀 얻어 먹더라도 솔직해지자고 그렇게 좀 당당해지자고 외치고 싶어진다. 어쩌다 그렇게 되버린 사람들의 숱한 변명과 핑계를 잘 알고 있다. 나역시 그렇고- 어쩌다 그렇게 되버린 것인지도 알 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서 스스로도 막막하고 불편한 사람들을 잔뜩 봐왔다. 달라질 것도 없이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 그것이 온전히 그들의 탓이기만 할까? 전부 스스로 감당하고 서로 잔뜩 불만을 안은 채 살아가고 신세한탄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게 그들 탓이기만 할까? 내 불편이나 분노가 그들 개인을 향한 원망인지 사회나 제도를 향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졌다. _ 각자에겐 각자의 사연과 사정이 있다. 그것을 다 모른 채 그저 비난 할 수 만은 없다. 그 사연과 사정이 말끔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정상참작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멈출 수 없어서 더 가버린 사람들을 돌이켜 세울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 슬프고 화가 난다. 분명 어딘가 무언가 있을 텐데 싶어진다._작가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엔 내게 자격이 없다.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꾸준히 써대는 작가를 괜히 비난할 이유도 없다. 한 낮, 팔자 좋게 어제 배달시켜 먹고 남은 족발을 뜯으며 맥주를 한 캔 비우고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읽었다. 그래 다들 그렇게 살지. 내가 뭐라고 할 일은 아니지. 그래도 최소한 법은 지켜야지. 네가 했으니 나도 당연하다고 생각진 말아야지. 이런저런 다짐들을 하며 불편한 마음을 접어둔다. 내가 예민하고 날카롭고 짜증이 많다면 그것은 내가 그것들을 견디지 못해서일 뿐이다. 내가 뭐 특별하게 괴롭고 아픈 삶을 산 것도 아니고 그냥 저냥 살아왔을 뿐이다. 견디지 못한다고 비난하면 또 그러려니 하며 너는 날 모른다고 변명해본다. 그러다가 너는 뭐 크게 다르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참 싫지만 내 찌질함을 인정할 수 밖엔 없겠다. 그러니저러니 작가의 찌질함을 나무란 것에 작은 빌라 신발장 만큼의 죄책감을 가져본다. 곧 잊겠지만.
홍차와 장미라니, 반만 맞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는 너무 좋지만 장미는 어쩐지 어려운 꽃이라 갸우뚱하다가 예전에 꽃대가 실하고 봉오리가 탐스런 잘 다물어진 큼직한 장미를 좋아했던 것이 생각났다. 흰색, 노란색 장미가 좋지만 꽃잎이 시드는 것이 너무 눈에 보여서 속상해진다. 진한 빨간색은 언제 말랐는지 모르게 단단한 색으로 변해있어서 속상할 틈이 없는 면만은 좋다._ 살면서 타협을 배우며 나이가 들수록 쫑쫑해진다. 아는 게 많아졌다고 이것저것 핑계도 늘고 가르치려 든다. 별 생각없이 나이를 먹다보면 자칫 그꼴이다. 대부분 그런데 이 할머니는 어쩐지 나이를 안 먹는다. 아기 아가씨로 살았다해도 인생 중반부 부타는 꽤 고생하고 힘겨웠을 텐데도 언제까지고 그저 좋을대로 지낸다.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분위기의 사람들을 만나면 어릴적엔 몹시 얄미웠는데 이젠 어쩐지 귀엽고 예뻐보이기도 한다. 온실 속의 화초나 새장 속의 귀여운 새가 뭐가 나쁘단 말인가. 기왕이면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받는 삶이 좋은 게 아닐까 싶어진다. 갈등과 고난과 역경을 통해 훌륭해지고 성장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은 그런 어두운 부분따위 존재도 모르고 사는 편이 행복하지 않겠나 싶어진다. 아마 이 작가는 그저 모르는 척.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편이 견디기 쉬워서였을거라고.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하고. 그럴것이 자신에 대해 꽤 냉정하게 분석한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자주 드러난다. 아마 자주적이고 긍정적인 성격도 한 몫 했으리라. 그런 면들이 귀엽다. 귀여울만큼 솔직하다. _ 아마도 작가의 소설은 전혀 다른 분위기지 않을까? 귀엽고 사랑스럽고 엉뚱한 소녀같은 분위기의 소설이 아닌 그 뒷면의 분위기가 아닐까? 소설을 읽어보고 싶은데 관능미와 미시마 유키오에서 멈칫 하고 말았다. 언제고 만나면 될테지하며 나의 노년을 상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리 마리처럼 식도락을 즐길(위도 그닥 튼튼하진 않고-) 것 같진 않고 매일 차마시고 책읽고 뜨개질하고 꼼지락거리는 것 외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나이를 무기로 삼지 않는 것만은 모리 마리에게 배우고 싶다.
이제껏 만난 줄리언 반스와는 살짝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만난 줄리언 반스는 노년에 접어든 후 였다. 이 글은 무려 30대에 쓴 글이니 좀 생경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플로베르에 대해서는 ‘보바리 부인’이 전부인(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의 작가로 불리길 싫어했다는데?) 나로선 더욱 그랬다. 하지만 상관없다. 플로베르에 대해 몰라도 앵무새에 관심 없어도 무관하다. 명백히 플로베르를 변호하는 글이지만 교묘히 비난하는 것도 같은 작가 특유의 글 임엔 분명하다._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우리가 굳이 작가의 사생활이나 내면세계에 대해 알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면 복잡해진다. 허나 대부분의 작가는 글에서 자신이 드러난다. 파헤쳐진 사생활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면 글을 읽다보면 어쩐지 작가와 친해진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어쩌다 마주한 작가의 사생활에 작가의 글이 궁금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직접 마주하고 한참 수다떨 수 없다면 누군가의 시선을 거쳐서 듣는 사생활이 전부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슬쩍 엿보는 정도야 호기심 문제로 남겨두자._ 추적하듯 따라간다. 여러 소문에 대해, 부당한 평가에 대해, 남겨진 작가의 글에 상상력을 더해 다가간다. 좋아하면 관심이 가게 마련이고 관심이 가면 아는 것이 많아진다. 어느 순간 난 누구누구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단언하고 적을 무찔러 나간다. 적은 굳이 싸울 마음이 없었더라도 크고 작은 승리에 목청이 높아진다. 결국 마주하는 것은 전부 진짜는 아닐 수도 있다고 어차피 알 바 아니라는 결론 뿐이다. 결론이 뭐가 중요한가 그 과정이 신났으면 된 일이다. _ 줄리언 반스 덕분에 플로베르가 살짝 궁금해졌다. 늘 그렇듯이 책은 다른 책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