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만난 줄리언 반스와는 살짝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만난 줄리언 반스는 노년에 접어든 후 였다. 이 글은 무려 30대에 쓴 글이니 좀 생경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플로베르에 대해서는 ‘보바리 부인’이 전부인(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의 작가로 불리길 싫어했다는데?) 나로선 더욱 그랬다. 하지만 상관없다. 플로베르에 대해 몰라도 앵무새에 관심 없어도 무관하다. 명백히 플로베르를 변호하는 글이지만 교묘히 비난하는 것도 같은 작가 특유의 글 임엔 분명하다._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우리가 굳이 작가의 사생활이나 내면세계에 대해 알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면 복잡해진다. 허나 대부분의 작가는 글에서 자신이 드러난다. 파헤쳐진 사생활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면 글을 읽다보면 어쩐지 작가와 친해진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어쩌다 마주한 작가의 사생활에 작가의 글이 궁금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직접 마주하고 한참 수다떨 수 없다면 누군가의 시선을 거쳐서 듣는 사생활이 전부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슬쩍 엿보는 정도야 호기심 문제로 남겨두자._ 추적하듯 따라간다. 여러 소문에 대해, 부당한 평가에 대해, 남겨진 작가의 글에 상상력을 더해 다가간다. 좋아하면 관심이 가게 마련이고 관심이 가면 아는 것이 많아진다. 어느 순간 난 누구누구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단언하고 적을 무찔러 나간다. 적은 굳이 싸울 마음이 없었더라도 크고 작은 승리에 목청이 높아진다. 결국 마주하는 것은 전부 진짜는 아닐 수도 있다고 어차피 알 바 아니라는 결론 뿐이다. 결론이 뭐가 중요한가 그 과정이 신났으면 된 일이다. _ 줄리언 반스 덕분에 플로베르가 살짝 궁금해졌다. 늘 그렇듯이 책은 다른 책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