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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연의 논리엔 크게 두가지 오류가 있다. 자잘한 것들 관점의 차이는 일단 놔두자. 세연의 관점에서 세연의 논리를 반박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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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은 지금 세대를 들어 ‘표백’된 상태라고 한다. 개성의 말살, 다름을 존중되지 않는 사회의 다른 표현이랄 수 있겠다. 자, 그럼- 지금만 그런가?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언제든 그랬다. 언제든 이미 완성된 것처럼 여겨지는 기존의 틀과 젊은 세대는 싸워야 했다. 그들의 싸움은 늘 험난했고 과거의 틀을 따르는 것이 순리로 여겨졌다. 별 사소한 것까지도 그렇다. 시키는대로, 어른들 말씀처럼, 남들 하는대로, 원래 그렇다고 정해진 것들이 얼마나 숭고하고 오래되고 중요한 가치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설명하지 않고 그저 그렇다고 그러니 그대로 따르라는 말은 시대를 막론한다. 지금이 좀 더 그런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내 자신이 속한 세대이기 때문이지, 거시적 관점에서 세계 전체를 조망한 것은 아니다. 세계가 완성되었고 우리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는 것은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다들 그 와중에도 움직였고 덕분에 여기에 이른 것이다. 도달해야 할 것들은 널렸고 갈 길이 멀다. 사회와 세계를 보지 못한 것은 세연,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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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세연은 영웅을 오해하고 있다. 슈퍼 히어로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이들에 대한 절대적 오해가 있다. 우리가 그들을 영웅이라 천재라 칭하는 것은 그들의 결과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을 무시해선 안된다. 세연은 무시가 아니라 거의 부정하고 있다. 그들이 지리하고 지난한 과정을 견뎌냈고, 거창한 것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비난과 조롱과 가난과 좌절과 실패의 결과였음을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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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서 어떻게 시작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가.를 잊으면 그럴 수 있다. 역사 속 대부분의 영웅이나 사건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앞 뒤, 양 옆 많은 것들과 싸운 결과이다. 그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내용이 조금 변하고 성격이 조금 달라질 뿐. 끝나지 않고 완성, 종결은 없다. 세연이 정말 고민하고 갈등해야했던 것은 ‘무엇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였다. ‘싸울 것이 없으니 나는 할 것이 없다’니 너무도 오만하다. 지나치게 자신만 들여다 본 탓이리라. 지금 세대도 거창하고 대단하고 멋진 것을 할 수 있고 하고 있다. 분명 어렵고 힘든 일이다. 역사 속에 어떤 자취로 남을지 지금 판단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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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가정하고 움직인 이들의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 자리, 그 역할이 사소하다 여기지 말자. 작고 하찮다고 스스로 가능성을 짓밟아놓고 변명하지 말자.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첫번째 지적처럼 원래 기성세대는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고 비판하고 조롱한다. 그것은 그들이 용기가 없어서다. 그들이 용기가 없다고 세상의 모든 용기가 사라졌다고 할 순 없다. 내몰려도 꿋꿋이 간다. 가다가 잘못되면 다시 또 간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 재시작의 기회가 늘었다. 안된다는 말이 진실이라고 누가 말했는가. 지나치게 성급했다. 그래도 우리는 변할 수 있고 변하고 싶다. 영웅도 되고 천재도 되고 역사에 흔적도 남기자. 모두 할 수 있다. 싸울 마음만 있다면 가능하다. 설마 겁나서 포기한 건 아니겠지?
#표백 #장강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