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욕구는 자신을 벌주고 싶은 마음과 떠난 사람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남겨진 사람은 납득되지 않는 이별 앞에서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나르시즘으로 미화된 이미지를 쏟아붓고, 그 반대의 부족하고 못난 측면은 자신이 떠안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일부였던 대상이 사라졌으므로 내면의 일부분은 이미 죽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하여 자책과 죄의식 속에서 내면의 일부처럼 죽을 것인가, 혼자 남아 고통 속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실제로 자기 자신에게 벌주고자 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상습적으로 싸움을 걸어 자기를 다치게 하거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놀이를 하면서 자신을 위험으로 몰아넣는다. 자해 행위는 1960년대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일본에서 자해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는데 `자해자들의 저택`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도 활성화되어 있다. 그들이 자주 행하는 자해 행동은 `손목 긋기`이다. 긴장이나 불안이 극한에 다다랐을 때 손목을 그으면 그 순간 긴장이 완화되면서 불안감이 가라앉는다. 그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자신에게 되풀이하는 강박 반복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죽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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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에게는 타인을 판단하거나 평가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타인을 용서할 자격도 없을지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회개하는 일뿐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는 용서의 어려움 때문에 등장한 전제 조건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문에서 첫 구절과 두 번째 구절은 서로 인과적 진술일 수도 있다.
불교에서도 우리 인간은 세세생생 지은 업보의 인연으로 이 세상에 왔단다. 지금 우리가 받는 고통은 예전에 우리가 누군가에게 준 고통의 결과라는 설명이다. 기독교의 회개, 불교의 참회 등은 기도와 수행의 첫 발자국이라고도 한다.
˝아마 오로지 신만이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신만이 용서할 수 있는 죄악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조차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할 것을 아버지에게 간구해야만 했다.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소서.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모르나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을 기리기 위한 마지막 날
새벽 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금식
그 와중에 구역예배를 하면서 꾸역꾸역 읽은 책..
나는 첫사랑을 결혼으로 골인했다며 자만에 자만을 하면서 ˝이별˝이라는 단어를 멀리 해 왔다.
그러나 결혼으로 인한 수많은 것을의 포기와 또 다른 상실감이 겹쳐지면서 무언가와 ˝이별˝이 필요하단 것을 인지하고
책을 펼쳤다.
역시 내 선택은 옳았다.
남녀간의 헤어짐 보다는 죽음으로의 헤어진 서로의 교류의 단절에 대한 상처..
또 사회적으로 인정 받지 못한 상실감 들에 대한 애도작업에 대한 글이었다.
여러 나쁜 애도 방식들을 읽으면서 또 의도치 않게 숨어버린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떨어지기 위한 시험인 고시의 폐해다.
승자가 있으면 무너지는 패자도 있기 마련...
갑자기 2차의 고배를 마시고 1차 시험을 본 후 숨이 쉬어지지 않는 다는 대학 단짝 C생각이 났다.
어쩌면 상실이라는 것은 나만 갖는 특별한 아픔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감기처럼 걸리기 쉬운 상황임을 인식하고
지혜롭게 내 스스로를 다독거려주어야 겠단 생각을 했다.
역시 말은 쉽지만 이별과 상처는 쉽게 떨쳐지지 않는 걸 어찌하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