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금 쌍담 - 섹스.폭력.정치.종교
강신주.이상용 지음 / 민음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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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의 그분(?), 강신주

강신주 박사님은 사람을 자극한다. 강연 중에 자신은 물론 어쩜 그렇게 다른 사람을 까는지 듣는 내가 민망할 정도다. 그래도 나는 강신주 박사님이 쓴 책은 일단 보게 된다.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나온다는 그 비유처럼 그 강의를 듣고 있으면 몇 번이고 내가 생각했던 원칙이 깨어지는 경험을 한다. 내 지식과 사유가 이제껏 사회를 통해 교육받아오고 (어쩌면) 세뇌받았던 관념이 없어지고 자유를 얻는다. 온전한 내 경험과 내 신념을 기초로 단단한 의견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사람을 화나게 한다.  어떤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고 분노하며 뒤엎기. 그리고 내가 왜 그 감정을 갖고 있는지 근원에 대해 성찰해 보기. 그가 원하는 강연이 주는 포인트다. 그렇기에 그가 하는 강연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다. 다만 (결코)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고 싶지는 않다. 강연을 통해 내 험담을 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내 귀를 긁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전에 보여 준 이상용 평론가와 강신주 박사가 함께 역사에서 유명한 영화를 보고 이야기해 보는 '씨네 상떼 이어진 강연이다. 영화 역사상 큰 문제와 이슈를 낳은 작품을 보고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의도에 대해 평론가와 철학자적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영화는 네 부분으로 나눈다. 섹스, 폭력, 정치, 종교. 각 영화를 통해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와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설정한다.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일은 전적으로 개인 자유의지에 따라야 한다.
 나는 먼저 강연을 아주 오래전에 들었다. 난 벙커 1 유료 회원이다. 남편이 회식으로 늦어 잠이 안 올 때 야금야금 들었다. 강연과 책이 함께 해서인지 나에게는 둘 다 뜻깊게 다가왔다.

섹스(감각의 제국)
                                 

 

               

옛날 중학생 때 밤늦게 공부하며 들었던 "자정의 영화음악"에서 자주 언급됐던 영화다. 얼마나 놀랍고 징그러운 이야기일까 생각하며 어른이 되면 꼭 봐야겠다는 영화를 이 강의를 들으며 보게 됐다. 심지어 이 영화는 실화에 기초한다.

 

실존 주인공 사다

평범해 보이는 이 여인. 요정 주인의 기둥 서방과 눈이 맞는다. 결국 그 둘이 하는 애정행각은 정도를 넘어선다. 결국 성행위 도중 사다는 남자 목을 졸라 죽인다. 그 후 그 남성 성기를 잘라 갖고 다닌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우리는 보통 성행위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한다. 어쩌면 사랑하는 요소 중 하나인, 아주 사소한 부분일 뿐이다. 육체만 탐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은 결국 죽음이다. 

기한에 맞춰 숙제를 하느라 만사 급급한 사람은, 아무리 졸업을 했더라도 결코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생이 숙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숙제를 하듯 섹스를 하고, 숙제를 하듯 여행을 가고, 숙제를 하듯 독서를 하고, 숙제를 하듯 영화를 보고... 끝도 없다.

본질은 그게 아니다. 육체를 탐하는 자가 겪는 파국을 보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재미도 없는 프로를 억지로 보지는 않는가? 관심도 없는 무엇을 '안정된다'거나 '고연봉'이라며 꾸역꾸역 하고 있지는 않는가?

폭력(시계태엽 오렌지)
                                 

               

이 영화도 열심히 봤다. 강사는 그런 말을 했다. 주인공이 다 큰 어른처럼 보이지만 우유를 먹고 과감한 행동을 벌이는 것은 어린아이 행동과 같다. 맞다. 지금 내 둘째가 딱 저렇다. 때려도 아프지 않고 작은 몸이기에 해봤자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뿐이지 저 주인공과 같다. 말썽꾸러기. 그러다가 사회 제약으로 훈련받는 것은 영화 속 주인공이 감옥 안에서 교화 받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사회가 원하는 행동을 한다.  머릿속으로는 음흉한 생각을 하면서 주인공은 자유를 얻었다며 웃는다. 어쩌면 우리는 어렸을 때 원초적으로 생긴 폭력을 내면화하며 사는 게 아닐까?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관찰해 보면, 이것이 약함을 강한 척으로 보이려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출현한다. 독재자가 시민들에게 공권력을 함부로 행사하는 건, 그가 시민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자인 것처럼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내심 무서운 것이다. 또 아이들을 폭행하는 부모는 자신을 쏘아보는 아이의 눈매가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다. 결국 폭력은 약자나 위축된 사람, 혹은 정당성이 없는 사람이 취하는 부질없는 몸부림이다.
정치(살로, 소돔의 120일)
                                 

               

인분을 먹는 장면으로 문제가 된 작품. 이건 생각만 해도 역겨워서 안 봤다. 네 명의 권력자가 흠 없는 아홉 명씩 남녀를 선출해 자신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이야기다. 결국 그들은 피를 뿌리며 끝난다고 한다. 이 내용은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현실보다는 미화된 측면이 있다. 

이걸 정면으로 보지 못한다면 진짜 세상에 대해선 아예 편히 눈 감아 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가뜩이나 힘든데 이런 잔인한 일을 봐야 해?'하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이죠. 이 세상은 기아, 기근, 재해, 지진.... 수많은 참사가 일어나는 고통의 현장입니다. 이것을 외면해 버리면 더 강한 쾌락만을 추구하는 저 파시스트들과 뭐가 다르겠어요? 그래서 보아야 합니다.
일단 공부를 잘하니까, 어머니는 누구든 오냐오냐했을 거 아니에요? 그 때문인지 '내 생각과 상대의 생각이 다르고, 또 다를 수 있다.'라는 걸 몰라요.(186)
종교(비리디아나)
                                 

               

눈부시게 예쁜 비리디아나. 그녀는 수녀가 되길 기다리는 견습 수녀다. 어느 날 원장 수녀님 명령이 떨어진다. 비리디리아 숙부는 수녀원 큰 손(?)이니 인사하고 오란 것이다. 그곳에 가서 결국 비리디리아는 강제로 숙부와 결혼을 하고 초야를 치른다. 비리디아나는 불쾌해하며 수녀원에 가 버린다. 숙부는 자살을 하고 숙부 재산을 상속하는 비리디아나와 숙부의 사생아 호르헤가 숙부 대저택으로 온다. 비리디리아는 집을 가난한 자를 위해 내어주고 자선을 베푼다. 결국 가난한 자들은 이런 자선을 권리로 알고 행패를 부리고 급기야 비리디아나를 겁탈하려 한다. 혼란에 쌓인 비리디아나는 호르헤를 유혹하려 그 방에 들어간다.
 '착하다'의 개념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결국 우린 '주님'을 위한다면서 '착한 나'에 취해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명품 백이나 다이아몬드로 자신을 꾸미는 것처럼 타인에 대한 자선이 결국 그런 액세서리 중 하나라 치환된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그런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종교를 빌미로, 독실한 신자라는 자기만족을 위해 가정을 무당집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집을 성전으로 만들고 싶다면, 아예 자기 집을 교단에 내줘야 마땅하다. 정녕 비리디아나가 숙부로부터 물려받은 집을 성당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응당 그 저택을 성당에 기부했어야 옳다. 그녀가 성과 속이 애매모호하게 결합한 '자선 공간'을 만들어 낸 이상, 약자들에게 역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책과 강연을 마치며

진정한 사랑이란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다. 스스로를 절대 약자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다. 그런 일을 거부한다면 결국 육체 탐닉, 폭력으로 강한 척, 정치로 사람을 짓누르기, 어설픈 자기만족인 종교로 빠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난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무교인 친구는  내가 독실한지 모른다. 목 놓아 외쳐도 그저 웃을 뿐이다. 사실 난 종교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갖고 있다. 같이 성당을 다녔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꿀꿀아, 너는 정말 신이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미사 드리면서 계속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아."
처음 놀랐다. 나보다 더 열심히 성당에 다니는 친구가 이런 대단한 고백을 내게 하다니!! 그럼에도 나나 이 친구는 주말마다 꼬박꼬박 성당과 교회를 다닌다. 나도 항상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하다가 확신이 들었다. 신은 분명히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이런 물음을 할 자유를 준 것이다. 우린 너무 무식해서 보이는 시각이 너무 편협해서 모르는 게 많은 것일 뿐. 분명 신은 우리에게 그 진리를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단정적이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강신주 박사에게 끊임없이 대들었다. 내가 신이 없을 것 같다는 물음을 생각해 낼 수 있다는 사실로 관대한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강신주 박사가 편협한 생각을 진리인 듯외치는 것도 어쩌면 나름 용기다. 이에 반발하는 수강생을 원하고 그렇게 나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그게 아마 강신주 박사가 강연을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래서 나는 그를 유능한 강연자라고 생각한다.
그를 통해 이상용 평론가라는 좋은 분을 알게 된 것도 영광이다. 그분이 해설해주는 무서운 영화에 관한 평론도 정말 재미있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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