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22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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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님의 글은 꾸밈이 없다.
박완서 작가님의 유작을 미쳐 다 못 읽었고 이게 두 번째 책이지만..
박완서님의 다큐나 유고전 등 TV매체에서 느낀 전체적인 느낌이 그랬다.

그래서 신경숙님이 억지로 상황을 만들어 짜내는 스토리가 아닌
(물론 `외딴방`같은 경험적 책을 제외하고) 있는 그대로를 내던지듯 쓴 글이 재밌다.
아주 날카로우면서도 시크한 글체가 처음엔 무서운 할머니보듯 섬짓하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그 안에 들어있는 따뜻한 짐심을 알게 된다.

EBS유고전에서 어느 여성 감독님이 몇 번이나 강조했던 책 `그 남자네 집`을 꼭 읽어보겠다고 다짐하고
이제서야 읽은 나의 게으름이란...
지금 이제서야 이 책을 만난게 얼마나 반가운지..
시집와서야 알게된 종로와 종묘 길들..대학로 지리들을 그릴 수 있었고..
또 새댁이었던 박완서님의 그 시대 내면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했던 `플라토닉 러브`는 알고 보면 `임신의 두려움`이라고 얘기한
뭔가 알 수 없는 야한 뉘앙스와 이 나이가 되서야 밝힐 수 있는 본능을 잘 묘사했다.
손도 안 잡은 마음 한 구석에 좋은 감정을 가졌던 `그 남자`에 대해
전혀 위험하지 않은 상황을 아슬아슬한 듯 그리는 작가의 솜씨에 경탄을 금할 수 밖에 없었다.

아련한 어린 사랑의 추억이 참 예쁘고도 매혹적으로 그려진 예쁜 책이었다.
특히..나처럼 결혼 초년차인 분들이 읽으면 아련히 느낄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젖을 통해 꼼짝없이 아기에게 매어 있을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나는 옆에 누워 있는 핏덩이가 하나도 예쁘거나 소중하지 않았다. 낳아놓기만 하면 모성애는 저절로 우러나는 건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저것때문에 아무데도 자유로 갈 수 없고, 정 가고 싶으면 달고 다녀야할 생각 때문에 나는 수렁처럼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헤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우울증이었다. 모성애가 우러나기는커녕 일생일대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배고파 하는 아기에게 등을 돌리고 누워서 서럽게 울었다. 아기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유 때문에 우는 자신을 마녀처럼 느꼈다.
내가 모성애라고 믿는 감정은 내 가슴이 부풀면서 젖이 샘솟기 시작하고 나서도 한참 후였다. 아기가 안 나오는 젖을 악착같이 빤 지 사나흘이 되자 아기 목구멍으로 젖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빈 젖을 빠는 것하고 확연히 달랐다. 비록 몇 모금의 빈 젖 빨기 끝에 간신히 한 모금 넘어가는 소리였지만 그 작은 것의 살려는 의지의 집요함이 섬뜩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 두 이레를 지나자 내 가슴이 짜릿 짜릿하면 젖이 붓는 징조고, 또한 아기가 배고파 하고 있다는 신호라는 것도 알게 됐다. 젖통을 통해 아기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잃은 자유의 부피가 얼마만 하다는 걸 삼신할머니가 보여주려는 것처럼 내 가슴은 무섭게 부풀어 올랐다. 정말로 먹어도 먹어도 넘치게 젖이 샘솟았다. 아기가 한쪽 젖을 빨면 다른 한쪽이 넘쳐흘러 차마말기를 흥건히 적셨다. 나는 부끄러움 없이 양쪽 가슴을 활짝 드러내고 한쪽은 아기에게 물리고 한쪽은 착유기로 한사발씩 뽀얀 젖을 짜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어머니는 이런 나를 이젠 마음 놓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아기가 먹을 복을 많이 타고 났다고 모든 공을 아기에게 돌렸다. 삼칠일이 지나면서 토실토실 살이 오르기 시작한 아기는 백날을 바라보면서 황홀하게 예뻐졌다. 집안에 웃음이 넘쳐흘렀다. 뭐니 뭐니 해도 인화초가 제일이라는 시어머니의 표현도 듣기 좋았다. 여태까지 웃은 건 다 가짜 웃음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기를 보고 웃는 웃음은 어떤 잡생각도 섞이지 않은 희열 그 자체였다. 내가 잃은 자유가 비로소 하찮게 여겨졌다. 더 행복해지길 바라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행복감은 두 식구가 세 식구가 됐다는 안정감 때문이기도 했다. 여태까지 시어머니를 우리 식구가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세 식구는 부부가 가정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정된 숫자인 셋에 해당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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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2 22: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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