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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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앞서 읽었던 책보다 100페이지가 적고 크기도 2/3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책.
이 작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만큼 커진 듯했다.
그래서 시간이 더 걸렸다.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책을 덮은 적이 없었다.

전에 처음 읽었던 책은 이 작가 처녀작이자 각종 상을 휩쓸었던 책이다.
˝축복 받은 집 ˝ 9편이 같이 있는 단편집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이 작가가 표현한 느낌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 다른 번역자 책을 읽고,
결국엔 원서를 찾아 읽었다.
그렇게 나는 이 작가에게 빠져버렸다. 퐁당 퐁당 러브(-_-아 죄송해요.)
만약 내가 영문학을 전공한다면 이 작가 때문일 테고 내가 박사가 된다면 이 작가를 연구할 거다.
그런 그녀가 쓴 이 책.
이 책은 영어책이 아니다.
이탈리아어로 쓴 책이다. 번역자에 따르면 투박하고 화려하지 않다고 한다. 이 작가 영문학 원서도 그렇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문장들이 모여 화려한 작품이 된다.
난 영어를 사랑했었다. 그리고 영어 작가가 됐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유명해졌다.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데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아서 실수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명예로운 일이었지만 상을 받은 게 영 믿기지 않았다. 내 인생을 바꿔놓은 그런 찬사가 말이다. 상을 받은 이후 난 유명 작가로 인정받았다. 그 때문에 스스로도 이젠 무명에 가까운 알려지지 않은 견습 작가로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다. 날 숨길 수 있는 접근할 수 없는 곳에서 내 모든 창작이 나왔다. 그런데 첫 책이 출간된 지 일 년 후 난 내 익명성을 잃어버렸다.(132-133)
이 작가는 초심을 중요시했다. 아무도 모르지만 그저 쓰고 싶어서 쓰는 삶. 돈이나 명예를 따지지 않고 그저 `나`이기 위해 쓰는 삶. 진짜 놀랐다. 영어로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가 띄엄띄엄 쓰는 이탈리아어로 책을 썼다. 영어로 글을 써도 유능한 이탈리아 번역가가 잘 번역해 줄 텐데도 굳이 이 작가는 직접 글을 쓰는 일을 택했다. 이게 득될 일보다는 욕먹을 일이 더 큰일이다. 위험해 보였지만 이런 일을 한 저자가 가진 패기가 부러웠다.
언젠가 강신주 박사가 `시`에 대한 강연을 했을 때, 들었었다. 시인들은 모든 사물을 `낯설게` 본다고 한다. 낯설게 봤을 때 새롭게 보이는 그 순간을 포착한다고 한다. 아마도 저자는 자신이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영어`를 떠나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쓰면서 그런 `낯설게` 보는 도박을 한 것은 아닌가 한다.
그들은 내 실수를 참아줬다. 잘못된 데를 고쳐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내가 모르는 단어들을 알려줬다. 인내심을 가지고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말을 가르쳐줄 때처럼. 난 이런 방법으로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29)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저자를 보며 전에 읽었던 만화가 생각났다. 마스다 미리의 `미치코 씨, 영어를 다시 시작하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너무 쉬운 영어에 대해 천천히 뜯어보는 모습이 조금 답답했지만 미치코 씨가 낯선 언어를 보고 생각했던 점과 이 책 저자가 생각한 부분이 많이 겹쳐있는 듯했다.
책, 메모장, 사전 몇 권, 펜이 널브러진 소파에 앉는다. 긴장감을 풀어주는 이 열정적인 작업은 시간이 꽤 걸린다. 나는 책 빈 공간에 단어의 뜻을 적지 않고 메모장에 목록을 만든다. 예전에는 단어의 뜻을 영어로 적었다. 이젠 이탈리아어로 적는다. 그렇게 나만의 개인적인 사전, 독서의 과정이 담겨 있는 나만의 어휘집을 만든다. 때때로 메모장을 넘기며 단어들을 복습한다.(41)
내가 평생을 공부하는, 그러나 700점대 성적에 머무르는 영어를 공부하는 모습이 같이 오버랩된 부분이다. 이렇게 이탈리아어로 된 책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저자 노력이 이 짧고 별것 없는 부분에서 보인다.
창피하지만 나는 계속한다. 다음 수업을 위해 난 다른 글을 준비한다. 실수, 모난 데를 모두 묻어두고 나면 귀중한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거칠지만 생생한 새로운 목소리는 더욱 향상되고 깊어질 것이다.(57)
평생 나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살았다. 그렇지만 난 아직도 저런 활동을 계속한다. 저자는 이제 영어에 있어서는 마스터 수준이다. 그녀가 쓴 글에 대해 ˝엉망이다.˝라고 말을 한다면 그녀 글이 엉망이라는 생각보다 말하는 사람 인성에 의문을 품을 확률이 높다. 서툰 이탈리아 글쓰기는 그녀 스스로를 학대하는 행위다.
굳이 왜 이런 일을 자행하는가? 이것에 대해 계속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보통 우린 글에 자신을 치장한다. 얼굴 위에 샤넬 복숭아 메이크업 베이스와 랑콤 파우더로 가리고 랩에서 나오는 코롱으로 체취를 가리듯, 글 위에 내 마음을 가린다. 화려한 수식으로 혹은 모호한 미사여구로 지식을 뽐내고 진실을 숨긴다. 이런 글 반대편에 선 작가가 바로 이 사람. 줌파 라히리다. 자신이 와벽 않은 자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 뱅갈어를 선택하고 살아남기 위해 영어를 익혔다. 이탈리아어는 스스로 선택한 언어다. 라틴어. 알파벳의 기원. 그러기에 그녀는 이탈리아어로 자신을 표현한다. 소박하고 간결하면서 솔직하게. 남에게 구속받지 않는 모습.
다시 한 번 난 이 작가에게 빠졌다. 아주 단단히.
나는 왜 글을 쓸까? 존재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서다. 나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서다. 내 밖에 있는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다.
나를 자극한 것, 날 혼란에 빠뜨리고 불안하게 하는 것, 간단히 말해 나를 반응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을 때 그걸 말로 표현해야 한다. 글쓰기는 삶을 흡수하고 정리하는 내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못하면 난 당황하고 혼란에 빠진다.
말로 표현되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것, 글쓰기의 용광로에서 변형되지 못한 채 다시 말해 순화되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것은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계속 지속되는 말들만이 실제인 듯하다. 실제 하는 말들은 우리보다 높은 가치, 힘이 있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것은 더 심오하고 자극적인 형식으로 언어를 익히고자 하는 내 방법일 뿐이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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