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같이 책 읽기가 필요한 이유

 

블로그 북클럽 '북살림' 2월 선정도서다. 어설픈 지식은 무지보다 위험하다. 이 책을 보는 순간 전에 어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책이 떠올랐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작가인데 글을 통해 아픔을 승화하려고 했단다. 결국 수용소에 대한 악몽을 떨치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결론이 소개됐다. 난 무조건 이 책이 그 작가가 쓴 책이라 확신했다. 어느 날, 다른 회원님을 통해 내가 알고 있던 책은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란 책이란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어졌던 내 오해는 이렇게 일단락됐다. 북클럽이 아니었다면 평생 난 이 책 저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제대로 모른 채 이 책을 거부했을 것이다.
 창피하다. 이 책 저자는 이 책대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천수를 누리고 삶을 마쳤다.

 

 

 

아우슈비츠에 간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은 프로이트와 아들러 심리상담이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정신분석학을 기초로 한다. 정신분석의 기초는 '욕망'이다. 치료는 과거에 있었던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던 경험을 건드려 인식하는 데 초점을 둔다.
 아들러현재와 나 자신이 해결에 있어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본다. 작년에 이어 지금까지 열풍인 '미움받을 용기'란 책도 아들러 심리학을 담고 있다. 내가 겪는 문제는 알고 보면 내 안에 있는 열등감이다. 용기를 갖고 타인과 관계를 통해 치료한다.
 앞선 두 학자 영향을 받은 이 책 저자인 빅터 프랭클은 '목적'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지금 이 상황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인 상태라도 '왜 사는가'에 대한 의지가 있다면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뒤쪽 로고 테라피를 통해 이야기한다.
  앞선 학자들이 과거와 현재를 치료에 대한 실마리로 사용했다. 하지만 로고테라피를 주창한 프랭클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즉 미래를 생각하도록 한다.
  저자가 '로고 테라피'를 주창했고 이 치료가 많은 환자에게 효과가 있었음을 2장과 3장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 치료법을 만든 계기는 이 책 대부분을 차지하는 1장 '수용소 체험기'에 적혀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곳에서 살아나는 법

 

 

죽음이 기다리는 공간에서 사람은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저자 빅터 프랭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자신은 여기서 제외될 수도 있을 거란 망상이 끝나면 사람들은 달라진다. 자포자기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앞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은 감독관이 어떤 말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48시간 내에 가스실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한다. '육신'이 살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노하우로 삶을 연장한다.



 첫째, 카포 되기.


카포란 소위 '나치 앞잡이' 역할을 한다. 일제 강점기 시대로 보자면 친일파들과 같다. 그들은 가학 성향을 갖고 있다.

일단 카포가 되면 그들은 금세 나치 대원이나 감시병들을 닮아갔다.(26)

그러나 카포 중에도 선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저자도 그들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는다.
 
둘째, 겉모습을 멀쩡하게 유지하기.


 저자에게 어떤 사람이 살 수 있는 중요한 정보 하나를 알려준다. 빵을 포기하더라도 항상 청결을 유지하고 혈색 돌게 보여야만 가스실에 들어가지 않는단 사실이다. 그런 모습이 감독관들에게 아직은 일을 시키기에 쓸만한 사람으로 분류하는 기준이 된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단순한 진리가 바로 이곳에서 적용된다. 



셋째, 희망을 갖기.


 언젠가는 나갈 수 있다고, 언젠가 이 끔찍한 전쟁이 끝날 거란 믿음으로 참아낸다. 이 '희망'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어느 정도 한계가 지나면 이 희망은 절망으로 바뀐다. 책에서 어떤 사람이 꿈에 아주 정확한 날짜에 하나님이 종전시키겠다는 꿈을 꿨다며 흥분한다. 결국 이 사람은 그날이 지난 다음날 죽는다. 희망이 엄청난 절망으로 변해 육체를 공격한 것이다.

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갖는 한 인간으로서 세 가지 노력이 끝난 후 그는 결국 '운명'을 논한다. 죽음이 당연한 공간에서 아들러가 주장한 '네가 문제다'라는 말도 소용없다. 또한 그들은 굶주림 때문에 성욕을 잃는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갖는 욕망을 '성'에 결부 시켰던 프로이트 이론도 여기서 적용할 수 없다. 그 당시 가장 이성적인 지식인이자 사람 행동과 심리에 대해 조예가 깊었던 저자가 마치 점쟁이처럼 '운명'을 말한다. 그런데 이 운명에 대한 선택권은 잔인하게도 본인에게 있다. 그 선택 근거가 본인이 갖은 열등감욕망도 아니다.

 

때로는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생과 사를 가르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때도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을 내려 주기를 원했다.(107)

지은이에게 다행히도 운명은 '삶'을 선물했다. 그 과정 또한 긴박했다. 가혹한 노동 때문에 결국 저자도 더 이상 괜찮아 보일 수가 없었다. 요양소에 가기로 결정한 그때, 정이 든 주위 모든 카포와 감시병들이 그를 위해 울었다고 한다. 결국 가스실일 수도 있음이 예상되는 부분이다. 오히려 그가 떠나간 그 수용소에서는 음식이 모자라서 결국 식인을 하는 사람까지 생겨났고 저자는 정말 요양소에 갔다. 


 더 이상 죽음보다 수용소가 더 큰 고통이 되었을 때 비로소 저자는 친구와 탈출을 결심한다. 그때 또 운 좋게 종전을 맞아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풀려나게 된다. 그때 지은이와 친구는 위험인자가 되어 그들만 혼자 수용소에 남게 된다. 결국 안전하단 곳에 옮겨진 사람들은 그곳에서 모두 타 죽고 살아남은 자는 오히려 저자와 친구다. 이 가혹한 운명이 친 장난을 보면서 예전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수용소가 알려준 정신 치료법: 로고테라피

 그는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에 정신과 의사로서 모든 이론을 쓴 원고를 갖고 있었다. 굉장히 무섭고 험악한 분위기에서도 그는 끝까지 원고를 달라고 필사적으로 요청했다. 그만큼 그는 이미 평범한 정신과 의사가 아닌 창의적 치료법을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나름대로 완성된 기존 자신 이론에 수용소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 양상에 대한 데이터가 더해져 경이로운 정신 치료법이 만들어졌다.
 이 로고테라피는 '왜 사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활동을 기본으로 한다. 어떤 사람에게 결론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 채 선택이 강요된다. 이때 우리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저자 또한 살기 위해 카포가 될 수 있었다. 혹은 감독관에게 예전 지위를 이용해 진료 등 혜택을 주고 이를 통해 부정한 거래를 할 수도 있었다. 항상 저자는 최악 상황까지 감당할 책임감을 갖고 신중하게 최선을 선택했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130)

저자가  자살한 프리모 레비와 달리 장수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자신이 사는 이유를 수용소에 있었던 경험을 자신이 연구한 정신 치료에 접목하고 알리는 일로 정했다. 그렇기에 옆에 시체가 뒹굴고 이해할 수 없는 참혹한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 그 상황을 담담하게 책으로 낼 수 있었다.

나에게 로고테라피를 접목해 보기.

 

 

 내가 원해서 아이를 갖고 내가 전적으로 육아를 담당하고 있다. 다른 사람 도움이 없으면 마음대로 영화를 볼 수 없고 친구를 만날 수도 없다. 물론 힘들 때보다는 행복할 때가 더 많다. 아이를 키우며 가장 어려운 일은 아이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고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는 일이다. 왜냐면 난 아직 엄마와 분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나이 만 33세인데 말이다. 객관적으로 친정엄마를 보자면 '왜 사는가'에 대한 목표를 나와 동생이 잘 크는데 두셨다. 가장 두려운 것은 아이만을 양육하는 내가 친정엄마처럼 '왜 사는가'라는 이유를 모두 아이에게 둘 위험성 때문이다. 이것은 나뿐 아니라 내 딸에게도 가혹하다.
 그래서 난 '왜 사는가' 목적을 아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시도를 했다. 바로 이 '글쓰기'다. 이 목표는 남에게 인정받는 게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가 살아있기에 글을 쓴다. 비록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나뿐이라도 내 스스로 읽기에 오늘 글이 어제보다 더 나아졌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글을 쓴다. 매일매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