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옷깃이 스치는 인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옷깃을 스치는 인연으로 좋은 책을 만나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난 그러기에 과감성이 떨어진다. (다시 읽으니 오글거린다.)가끔 마음에 드는 책 제목으로 책을 집었다가 실망한 적도 있고. 그래서 독서 모임을 통해 소개를 받아 책을 읽어 만날 때도 있고 광고에 의해서 혹은 ‘빨간 책방’이라는 팟 캐스트를 통해서 책을 소개받아 읽는 게 더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소개를 통해 내 마음에 꼭 맞는 책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게 딱 맞는 책만을 고르면 독서 편식이 될 수도 있고. 앞서 나는 김영하 작가님을 강연을 통해 만났고 가벼운 에세이집 ‘보다’를 통해 만났다. 언젠가 김영하 작가님의 소설도 만나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와중에 대대적인 동대문 한 책 릴레이를 통해 반짝반짝 새 책으로 ‘검은 꽃’이란 책을 만나는 영광을 갖게 됐다. 작년 이 행사를 통해 ‘호모 쿵푸스’의 고미숙 작가님을 만났다, 내 딸 유치원 옆 학교에서 강연도 있었는데 그 날 강연 대신 곱창을 선택했다지. 다시 책으로 만나겠습니다. 선생님.

이 책에 10챕터정도까지 읽고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에 나온 이 책에 대한 이야기와 낭송을 들었다. 김영하 작가님이 이 책을 통해 진정으로 책을 쓰는 즐거움을 느끼셨다고 한다. 눈을 뜨면 이 책을 쓰고 싶어 바로 책상에 달려가는 자신을 보고 평생 이렇게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단다. 나도 사실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참 좋다. 비록 작가와 대화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글을 남겨놓으면 책과 조금이라도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책이 내게 말을 해왔으니 나는 이 서평을 통해 책에 답을 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작가님의 책을 쓴 그 때 마음을 느끼면서 이 책을 읽으니 점점 더 이 책에 빨려 들어 읽어갈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은 정말 용두사미다. 쓰는 방식이나 등장인물의 입체성을 보자면 10권까지는 아니더라도 3권짜리의 대하서사소설이 될 것 같다. 처음 등장인물들이 조선 말기에 서양 배에 가득 채워져 멕시코에 노예로 팔려가는 이야기와 거기에서 적응하는 이야기가 길게 이어져 있다. 갑자기 4년이 훌쩍 지나 일제강점기가 되어 돌아갈 곳 없는 실향민이 된 그들에 대해 너무 짧게 언급이 되고 끝난다. 갑자기 옛날 내가 어린이일 적에 청룡영화제를 즐겨봤던 때가 기억이 난다. 그 때 애니깽이라는 멕시코 올 로케 영화가 상을 받았던 모습이 기억. 그러다가 정치적 압력 때문인지 상영조차 안 됐다는 그 내용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있네. 그래서 급히 책을 끝낸 걸까? 그 안에 뭐가 더 있었던 걸까? 내 쓸 데 없는 호기심이 거기까지 뻗친다.

이 책의 주요 인물은 ‘김이정’이라는 한 소년이다. 이 소년은 보부상의 아들이었고 배 안에서 요리사인 요시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요시다는 물론 남자다. 이 소년은 요시다의 사랑을 이용해 매일 사과를 얻어먹는다. 박수무당과 과테말라에서 신부 서품을 받은 박광수. 그리고 황족인 이종도와 부인 윤씨 그의 여식 아들 진우, 딸 연수 그리고 연수를 흠모하는 통역관 권용준. 도둑에서 천주교 광신도로 바뀌는 최선길과 이정을 챙겨줬던 정윤. 이 사림들이 이 소설을 이끌고 가는 주요 인물이다. 이정은 연수와 첫눈에 사랑을 느껴 육체적으로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이종도는 끝까지 고고하고 우아한 귀족이라며 자신의 신분을 강조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이에 부인 윤씨와 아들 진우는 우울증에 걸리지만 곧 현실을 깨닫고 윤씨는 후에 마야인과 새 출발을 하고 진우는 통역관 윤씨에게 붙어 통역일을 배운다. 연수는 이정을 사랑하지만 외부의 사정에 의해서 둘은 헤어지고 연수는 아이를 밴 몸으로 용준과 살림을 차린다. 용준 또한 자신이 얼굴반반하고 귀족출신이 부인을 맞고 자신의 신분상승을 자랑하기 위해 조선에 돌아가길 원한다. 배 타기 직전 연수는 용준에게 도망쳐 더 힘든 삶을 살아내게 된다. 최선길과 박수무당, 박광수 바오로 신부는 멕시코의 급진적인 종교적 변화에 의해 각기 다른 죽음을 맞게 된다. 이정 또한 장윤이라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장윤의 꾐에 빠져 게릴라 군에 속하게 됐지만 장윤은 중간에 도망가고 이정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 책은 인물의 인생 하나하나보다는 멕시코의 끊임없는 쿠데타와 종교적 변화 안에서 우리 민족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너무 슬프고 자명하게 그리고 있다.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내 상황이 나아지는 게 결코 아님을. 그리고 나라가 없는 자들의 비극은 어떤지를 인물들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과거의 이 비극적인 일을 통해 왜 나는 슬프게도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이 그려지는지 알 길이 없다.

그는 집회를 진압하는 기마경찰의 자신 없는 태도에서, 군중들의 비아냥거림에서, 신념에 찬 집회 참가자들의 모습에서 멕시코의 앞날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이놈의 나라도 어쩌면 오래가지 못하겠군. 그는 벤치로 돌아와 가죽가방 속에서 이종도가 며칠 동안 끙끙 앓으며 써내려간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찬찬히 읽어보았다. 불민한 자가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혀 죄송하다는 등의 의례적인 인사말 뒤에 예의 멕시코에서의 고생담이 줄줄 적혀있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책임은 기꺼이 지겠다. 그러나 무지한 백성들의 고초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다. 부디 어여삐 여기시어 그들을 구해주십사는 내용이었다. 권용준은 흥, 코웃음을 쳤다. 조선이 망한 이유는 바로 이런 양반 놈들 때문이다. 제 손으로는 마체테 한 번 잡아본 적 없으면서 입만 열면 청산유수지 자기가 고생을 알면 얼마나 안다는 거야? 허구한 날 집구석에 들어박혀 공자 왈 맹자 왈 이나 하는 주제에!(222-223)

연수는 이정 사이에 아이를 낳았다. 그러면서도 살기 위해 자신을 흠모하는 권용준과 살림을 차렸다. 연수 이전에 권용준은 마야 여자와도 살림을 차려 엄밀히 말하면 양반 딸 연수는 중인의 첩이 된 것이다. 이 세 인물이 조화롭게 사는 이야기 또한 매우 흥미롭게 읽혔다. 마야 여인 마리아는 연수의 아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잠시 맡기고 권용준과 한국으로 떠나는 듯 연기를 하고는 권용준에게 도망을 치고 연수는 결국 다시 아들을 뺏어온다. 돈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연수는 결국 돈만 아는 수전노의 인생을 살다 죽었다고 한다. 에필로그를 보면 그래도 양반집 아이들 연수와 진우가 제일 괜찮은 삶을 살다 죽었다. 이 또한 팔자는 어쩔 수 없다는 비극을 작가는 알리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두 여자를 다 데리고 잔다는군. 사람들은 뒤에서 쑥덕거렸다. 세노테에서 만난 여자들은 사대부가의 외동따님에서 통역의 첩으로 전락한 그녀에게 노골적인 경멸을 표했다. 이고 가던 광주리에서 옷이 떨어져 그녀가 집어주기라도 하면 그들은 그 옷을 다시 빨았다. 그녀와 이정의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초산이어서 젖이 잘 나오지 않는 그녀가 젖동냥을 하려 다녀도 고개를 돌렸다. 오직 함께 사는 마야 여자 마리아만이 자기의 젖꼬지를 내주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 사이에는 기묘한 우정이 깃들었다. 마리아의 유선은 연수가 출산하는 날부터 부풀어 올랐다. 연수의 초유가 채 나오기 전부터 마리아는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선명한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행복해했다. 일찍 죽어버린 자신의 두 아이를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그들 역시 엉덩이에 몽고반점을 지니고 태어나 먼 옛날 얼어붙은 베링 해협을 건너온 몽골리안의 후예임을 증명하였다. 마리아는 마치 일본원숭이의 대장 암컷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젖을 먹이다가도 연수가 원하면 언제든지 아이를 넘겨주었다. 만일 연수가 아이를 서툴게 다루기라도 하면 완력을 써서라도 빼앗아 자기가 돌보았다.(248)

이정이 일제 강점기가 된 시기에 요시다를 만난다. 같은 국민으로. 이들의 대화가 정말 짧고 굵으면서 인상 깊었다.

그러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예를 들어 여권이 필요하다든지, 억울한 일을 당했다든지 하면, 일본 대사관으로 찾아오라고.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게 공관의 임무니까.
그건 몰랐군요. 그렇지만 나는 일본인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정의 말에 요시다가 웃었다.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 거야. 요시다는 이정의 어깨를 툭 치고는 대통령궁으로 걸어 들어갔다. (298)

연수가 돈으로 자신의 아들을 찾아올 때 뜬금없이 나오는 엄마에 대한 원망에 내 스스로도 찔끔 찔리는게 있었다. 사실 어쩌면 인생은 각자 따로 사는 건데 언제까지나 나는 엄마의 자궁을 그리워하면서 엄마를 방패로 삼으며 엄마에게 짐을 지어준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긴 게 통역관 첩으로 들어갔다는 딸을 경멸했던 엄마가 자신은 뻔히 살아있는 양반 남편을 버리고 마야인과 새살림을 차렸다는 것도 이 소설의 아이러니다.

마리아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잘못한 것은 마리아가 아니라 자신이었지만 그녀는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서러움의 불똥은 마야인과 결혼하여 농장을 떠난 어머니에게로 튀어 분노가 되었다.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야. 어머니가 맡아주기만 했어도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 일은 없었을 것을!(323)

내 사랑하는 조국.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난리 통인 멕시코 안에서의 우리나라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게 정말 화가 나고 또 화가 났다. 슬프고 또 슬펐다. 이 소설을 통해 국가가 없는 자의 서러움을, 그리고 약한 국가의 하염없이 무시당하는 현실에 대해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그렇기 위해서 ‘강한 국가를 만들자.’라는 결론을 도출해야 할 것 같지만 그 이전에 국민 하나하나를 이해하고 보듬는 인간적인 국가가 되길 바라는 것은 나의 너무나도 큰 욕심인건가?

물론 거기에도 당신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혁명군들이 물었다. 그들은 누구와 싸우지? 일본의 군대와 싸웁니다. 왜 싸우지? 그들이 모든 것을 빼앗아가니까요. 얼마 전에는 아예 나라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일본이 아예 합병해버렸거든요. 멕시코의 혁명군들은 뉴멕시코와 텍사스 등 멕시코 북부를 삼켜버린 미국을 생각하며 함께 분개해주었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동양의 먼 나라, 그나마도 지금은 사라진 나라 얘기엔 흥미를 잃었다.(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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