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작년 세상을 달리했던 신해철님이 가장 재밌었다고 했었던 책이다. 내가 읽기에도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은 전혀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작가가 만든 세상의 배경은 작가가 글을 지을 때도, 몇 년 전에 내가 읽었을 때도, 지금 읽을 때조차도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것을 보면 세상 시간이 끊임없이 지나가도 변치 않는 가치가 있는 건 아닐까?

두 번째로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처음 읽었던 때보다 시간은 배로 걸렸다. 마치 이 책에 등장하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가 된 듯 느릿느릿 읽었다. 세상의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가는데 책을 읽고 있는 순간의 나는 참 많이 느렸다. 아마도 내 마음은 언제부터인가 회색신사처럼 조급해했던 것 같다. 그런 내 모습을 변신하고 이 책에 녹아들기 위해 그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모는 유적지인 원형극장에서 노숙을 하는 고아 소녀다. 그녀에겐 원형극장을 소개하는 가이드인 기기와 천천히 신중하게 청소를 하는 베포라는 가장 친한 친구들이 있다. 아이들은 원형극장에 모여 모모와 자신이 가진 상상력을 동원해 놀이를 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회색신사가 이 동네에 왔다. 이발사 푸지씨는 회색 신사의꼬드김에 넘어가 시간을 아끼며 돈을 버는 데 집중한다.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나누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도 점점 회색 신사의 농간에 휘말려 영혼없이 일만 하는 기계가 된다.
이 때 모모는 아이들과 함께 시위를 하며 회색 신사를 무찌른다. 이후 모모는 카시오페이아(목적지)라는 거북이를 만나 호라 박사에게 간다. 호라 박사는 시간이다. 그는 모모에게 회색신사를 일망타진할 방법을 알려준다. 그 사이 기기는 자신의 달변을 이용해 유명한 작가가 되었지만 속은 텅 비어 언제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가 탄로 날까 불안에 떤다. 베포는 회색 신사의협박에 정신없이 청소만을 하는 삶을 살아간다. 모모는 세상에 나와 호라 박사에게 받은 시간의 꽃을 무기로 회색 신사와 싸운다. 결국 회색 신사들은 천천히 가지만 30분 후를 아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와 모모의 넉넉한 마음을 무기로 무찌른다. 회색 신사들은 사람들이 받은 시간의 꽃을 말려 담배로 말아 피우면서 생명을 연장시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모만이 갖고 있었던 시간 꽃을 얻기 위해 달려가다 모두 존재가 없어져 버리고 만다. 결국 회색 신사가 없어지면서 각성된 마음사람들은 다시 원형극장에 모여들며 끝이 난다.

이 책은 시간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시각화했다. 이는 요즘 나온 영화 ‘인타임’이나 블랙홀 안은 변형된 시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는 ‘인터스텔라’보다 앞서 나온 참신한 생각이다. 언듯 보면 쉽지만 이 시간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회색 신사와 모모의 행동을 분석해보면 참 복잡해진다. 회색신사들은 돈을 모으는 은행처럼 시간을 모으는 사람들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 아낀 시간들을 회색신사에게 맡기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시간과 돈이란 개념이 참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시간을 아낀답시고 사람과의 소통을 차단하는 행동을 흡사 자신의 빚을 갚겠다고 사랑하는 부모나 친구를 죽이거나 배신하는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선물을 주는 게 전혀 아깝지 않듯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쓰는 시간 또한 아까운 것이 아니다. 이를 토론에서 승희 언니는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주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는 행위”라고 표현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노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23)
톨스토이의 단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생각이 났다. 인간이 된 천사가 하나님에게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지 알아오는 벌을 받는다. 결국 천사가 얻은 답은 ‘사람은 서로 사랑하기 위해 산다.’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알고 보면 호라 박사가 우리에게 시간을 선물한 이유는 서로에게 시간을 주면서(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친구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사랑하며 지내는 삶이었다. 그 사이에 회색신사의 농간은 사람이 사는 목적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잉여 재산에 대한 탐욕이 타인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이렇듯 회색신사가 주장하는 시간을 아끼는 행동은 타인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으려는 탐욕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인생을 철컥거리는 가위질 소리와 쓸데없는 잡담과 비누 거품으로 허비하고 있어요. 당신이 죽고 나면, 당신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예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바라시는 대로, 제대로 된 인생을 사는 데 필요한 시간이 충분하다면 아주 다른 사람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필요한 건 바로 시간이에요.(81)
회색 인간이 주장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결말이 가능할까? 그 결말은 소설에서 기기의 상황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기기는 모모와 같이 얘기하고 상상했던 이야기보따리를 이용해 유명한 작가가 된다. 유명세를 얻은 뒤 계속 팬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원한다. 하지만 기기에게는 이미 이야기가 없다. 이미 기기가 유능한 작가라는 고정관념을 이용해 겨우 자신의 유명세를 이어나간다.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지만..
이 기기의 불안을 보면서 요즘 모든 프로에서 하차한 정형돈의 불안에 대한 증세가 생각났다. 나 같은 시청자가 보기에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정형돈은 분명 기기가 느낀 그런 불안을 마음에 안고 지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이야기들처럼 이 이야기도 단숨에 꿀꺽 삼켜졌고, 금방 다시 잊혀졌다. 사람들은 기기에게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엄청난 속도에 얼이 빠진 기기는 모모에게만 들려 준 이야기를 정신없이 차례차례 털어 놓았다. 드디어 마지막 하나 남은 이야기마저 털어 놓자, 그는 불현 듯 자기가 고갈되고 텅 비어 버려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꾸며 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234)
결국 회색신사들은 모모가 가진 시간을 얻으려고 서로 탐욕으로 싸우다 전멸해버린다. 그리고 모모의 동네는 예전으로 돌아온다. 어쩌면 소설에서는 행복한 결말로 끝난 것이었다. 전에 봤던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와 같은 결말인 것이다. 같이 지냈던 사람들이 평등하게 같은 곳에 오순도순 모여 사는 모습. 분명 난 그런 모습을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썼음에도 어떤 분이 결말이 비극이라는 얘기를 하셨다. 아마도 그 분은 주인공을 로펌 대표 한정호에 이입을 한 게 아니었을까? 여기서 한정호는 회색 신사였다. 어쩌면 요즘 세상은 모모 생각이 지배하는 세상이 이상향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회색신사가 활개하는 세상이 정상이라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이 책에서 분명 행복하게 끝나는 것인데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나는 이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난 일인 듯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앞으로 일어날 일인 듯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내게는 그래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364)
책을 읽기 어려웠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회색 신사처럼 살았던 게 아니었나 싶다. 모모 편에 서서 책을 보는 것이 참 불편했단 생각이 든다. 마치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을 뒤집어 봐야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나는 남보다 많이 있는 것에 만족을 했지,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서로의 감정을 나누는 일로 만족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을까? 물론 이론적으로는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읊조렸음에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물질이나 지식의 양으로 내 행복의 척도를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진 않았나 생각해 본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노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23)

나는 이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난 일인 듯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앞으로 일어날 일인 듯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내게는 그래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364)

다른 모든 이야기들처럼 이 이야기도 단숨에 꿀꺽 삼켜졌고, 금방 다시 잊혀졌다. 사람들은 기기에게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엄청난 속도에 얼이 빠진 기기는 모모에게만 들려 준 이야기를 정신없이 차례차례 털어 놓았다. 드디어 마지막 하나 남은 이야기마저 털어 놓자, 그는 불현 듯 자기가 고갈되고 텅 비어 버려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꾸며 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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