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각자 선정한 도서를 돌아가며 읽고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각자가 고른 책이 이상하게 주제들이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번 주 시간을 시각화하여 메말라가는 인간성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던 ‘모모’를 읽었다. 이번에 읽은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에 물들어 무너졌던 가정에서 탈출해 새로운 가정으로 도망간 한 가장의 이야기인 이 ‘소금’이 다른 이야기 같지 않았다. 또 어떤 부분에서는 엄마가 가출해서 가정이 흔들리고 그의 존재를 떠올리며 반성한다는 스토리를 가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플롯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 ‘소금’에 대한 인터뷰를 하다가 짧게 그 당시 큰 이슈였던 신경숙 작가의 표절에 관해 이 책을 쓴 작가 박범신 님은 이렇게 얘기했다.
“사실 소설이란 게 현실을 표절한 것 아닙니까. 어쩌면 우리는 인생의 모든 것이 표절에 표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두 책을 심층적으로 읽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같은 작가로서 어느 정도 이해는 합니다.”
라는 말에 많은 공감이 갔다.
물론 비슷하다는 것뿐이지 이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작가의 느낌도, 우리에게 얘기하고자 하는 바도 전혀 닮은 점을 찾을 수 없다.
줄거리
소금은 어떤 염부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 장은 갑자기 모든 배경이 바뀌며 어느 폐교에서 화자인 시인과 어느 당돌한 여자인 시우와의 첫 만남이 그려진다. 시우는 췌장암 의심 소견을 들은, 집 나간 아버지를 찾아 아버지의 고향까지 찾아 온 막내딸이었다. 아버지는 어떤 염부의 가장 공부 잘 하는 아들로 자라 부잣집 여인과 결혼하고 대기업 임원까지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속사정은 딸이 본 것과 달랐다. 아버지 선명우는 과거부터 염부인 아버지가 그를 이용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갈 수단으로 키워진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결혼 또한 사랑하는 세희가 아닌 억지로 만난 당돌한 부잣집 딸 혜란과 원치 않는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기에 가정은 아내 위주로 돌아가고 자신은 늘 주변인일 뿐이다. 막내 딸 생일날이자 자신이 시한부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온 날, 그는 자신과 같은 위험에 쳐했던 사내를 구하지 않는다. 죄책감에 따라간 병원에서 그의 가족과 일행이 되어 방랑길을 떠난다. 결국 시우의 아버지 선명우는 길에서 주어 온 여자 아이 시내와 지애, 그리고 사내인 김영민에게 맞고 살았던 윤영미란 이름을 가진 함열 댁, 그들과 새로운 가정을 꾸려 살기로 결정한다. 선명우 비밀을 알게 된 시인인 화자와 시우는 아이를 갖고 새 가정을 꾸리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주인공 선명우
사실 선명우란 남자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잣집 딸 혜란이를 임신시킨 것. 그리고 계속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묵묵히 이어나간 것. 그리고 말도 없이 가출해 가정을 풍비 박살낸 것. 결국 객관적인 입장에서 주인공 선명우는 책임감 없는 자신의 삶을 정당화한 악인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그에게는 깊은 피해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오로지 자신만 희생하고 자신만 남을 위해 사용된다고 착각하며 산다. 한없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주인공 선명우가 작가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옹호되고 심지어 아름답게 그려진다. 왜 작가는 어떻게 이런 주인공을 이해하는지, 그의 생각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아버지 선기철
선명우의 아버지는 배운 사람이었으나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없는 노동력을 요하는 염부 일을 한다. 그러면서 내면에는 켜켜이 분노가 쌓인다. 그는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꿈을 갖는다. 바로 가장 똑똑한 셋째 아들이 대학까지 나와 집안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애비들이 치사하면 세상이 모두 치사해진다는 아버지의 말은 하나도 그른 데가 없었다. 치사한 아버지들과 치사함을 견뎌내는 아버지들에겐 모두 ‘새끼’들이 딸려 있었고, 아버지들의 소망과 달리, 그 새끼들 역시 치사하게 살아가며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를 대물림받는 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76-77)
선기철이 가진 아들 선명우를 통해 이루려는 욕망은 정도가 심했다. 자신이 다쳤다는 말에 먼 길을 걸어 온 아들을 ‘공부나 하라’며 내쫓는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다시 걸어 돌아가는 길에 쓰러진 자신을 보살펴준 세희란 누나와 사랑을 키워가게 된다. 결국 선명우가 염전 일을 하다 쓰러진 아버지를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 일으켜 세워봤자 혼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때의 아버지 행동은 나중에 자신의 딸들을 무뚝뚝하게 대하는 모습으로 변형된다. 앞서 언급하듯 부모의 모습은 그대로 자식의 미래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내 혜란
선명우가 가출 한 뒤 아내 혜란은 자살한다. 겉모습으로 자신을 지탱하던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자신의 모든게 무너지고 있어도 겉만 멀쩡하다면 자신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돈줄인 남편을 잃자 정신을 놓고 결국 세상을 등진다.
어머니는 사람들 앞에서 품격을 잃는 법이 없었다.
화장기 없는 어머니의 얼굴조차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어려운 일이 생길수록 몸단장, 마음 단장, 놓치면 안 돼!” 어머니는 늘 말했다. 세상은 무너지는 사람을 붙잡아주지 않는다는 게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무너지는 사람을 보면 더 밀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라는 것이었다.(45-46)
가출
이런 겉모습에 집착하는 부인 안에서 선명우는 괴로워한다. 그나마 마음을 나누는 막내딸 시우와 쫄면 데이트를 하며 가수가 되고 싶었다는 꿈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결국 아내에게 둘이 모양 빠지는 일을 했다며 혼난다. 그런 그가 가출을 한다. 그는 정말 행복했다.
놀랍기는커녕 사흘 전까지의 모든 기억이 다른 세상에서의 일처럼 아득하고 또 잔잔하게 떠올랐다. 완전히 다른 별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꼽이 떨어지는 것처럼, 모든 게 깔끔하게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심지어 통쾌하기까지 했다.(149)
그가 꿈꾸는 가정이란
작가는 선명우가 과거에 가졌던 가정과 이후에 새로 만든 가정을 이어 보여준다. 과거의 가정은 자본주의로 찌들었던 겉만 번지르르하기만 했다 . 이에 반해 비록 핏줄이 아닌 인연으로 이어졌지만 내면은 행복으로 가득 찬 단단한 현재 가정을 그린다.
작가 본인의 이야기일지도 모를 현대 중년 가장의 대표 격인 선명우의 묘사는 이렇다.
가족은 차츰 그 자신을 다만 ‘통장’같이 취급했다.
아내는 물론이고 어린 딸들과도 따뜻이 지내던 시절의 짧은 추억들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잉여 재산이 불어나면서 그는 차츰 그 모든 사랑의 관계를 잃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그는 자식들을 괴물로 만들었을 뿐이었고, 아내와의 사랑 역시 서로 ‘빨대’를 꽂아 빠는 기능적 관계로 변모됐다. (248)
주인공을 통해 자본주의의 한계를 설명하는 작가의 어조는 점점 강해진다. 이른바 ‘빨대론’을 통해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욕망에 대해 설명한다.
가출 전의 그는 빨대 하나 들고 세상의 구조에 충직하게 복무했다. 만족은 오지 않았다. 불가사리 같은 자본 중심의 체제에 기생해 그 역시 빨대를 꽂고 죽어라 빨았으나, 넷이나 되는 처자식이 그의 몸뚱이에 빨대를 또한 꽂고 있었으므로 그가 빨아올리는 꿀은 늘 턱없이 모자랐다. 모자라면 더욱 몸이 달았다. 그 체제는 그에게 약간의 꿀을 제공하는 대신, 그를 계속 노예 상태로 두고 부려먹기 위해 그의 후방에 있는 처자식을 끊임없이 부추겨 그가 빨아 오는 꿀을 더 재빨리 소모시키도록 획책했다.(330)
결국 선명우 위에 있는 조직은 ‘깔때기’를 물고 있는 거대 자본주의 세력으로 묘사한다. 이런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새로 만든 가정을 통해 보여준다.
“나의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울 거야!”
자본의 저 거대한 ‘깔때기’와 무분별한 ‘빨대’가 사랑하는 그 애들을 제 입맛에 맞는 노예로 만드는 걸 다시 또 방치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무엇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 애들은 아주 건강히 크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그 애들 아버지가 된 게 참으로 좋았다.(337)
그는 스스로 생산성의 사슬을 끊었다. 외부에서 ‘이 정도는 살아야지.’, ‘이 정도 살아야 중산층이지.’라는 기준을 걷어찼다. 그럼으로 선명우는 행복을 되찾았고 딸은 멀리서나마 아버지에게 찾아온 행복을 목격한다. 그러면서 시인의 아이를 임신해 새 가정을 만들 용기를 얻는다.
남자가 만든 소설
몇 권의 소설책을 읽어보니 여성 작가와 남성 작가의 근본적 생각이 참으로 많이 다르다. 이 작품에서도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르는 남자의 심리가 잘 나타난다. 바로 시인의 전처 우희나 세희, 마지막으로 시우의 거짓말에 대한 부분이다. 보통 남자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특히 주인공 선명우는 그 부분에 있어서 심각한 수준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내쫓았다고 아버지에 대한 정까지 끊어버린다. 결국 선우는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는 용기 뿐 아니라 타인의 말 속에 담긴 다른 속뜻을 이해하는 데도 참 긴 시간이 걸린다. 시우가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냉소어린 말이 거짓말일 것이라는 힌트를 시인에게 들려줄 정도의 여유가 이제야 생긴 것이다.
앞서 말한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와 이 소설 또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엄마를 떠올리고 그 분의 상황을 뒤돌아 본다. 그러면서 가족들은 어머니의 아픔을 공감하고 추모하며 답을 찾는다. 이에 반해 이 소설 ‘소금’은 주인공 선명우와 이어지지 않은 인연 ‘세희’의 마지막 보낸 장소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아버지 이름인 ‘선기철’ 이름을 따서 소금을 만든다. 한마디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식으로 그들을 나름대로 추모하며 끝을 맺는다. 그 뿐 아니라 가정의 문제를 가정 내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부패한 자본주의가 들어와서` 라는 의견까지도 집어넣는다. 신경숙 작가가 어머니의 희생을 개인적 감성에 의존한 부분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마치며
어쩌면 이 소설은 어느 아버지의 성장 소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자녀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남과 같이 살려고 하지 말고 너만의 길을 가라고.
네 생각을 제대로 말하고 살라고.
세상이 흔들려도 너는 너의 길을 가라.
아니면 선명우처럼 긴 방황을 하고 평생 잘못된 길로 빠져들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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