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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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발제했던 ‘로드’를 제치고 이제껏 읽은 책 중 가장 읽기 힘든 책으로 선정 되었다. 코맥 맥카시의 ‘로드’는 지구 종말을 전제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 제목처럼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거쳐야 할 ‘늙고 병들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읽으면서 바로 전해지는 늙는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이 내 신경까지 자극하는 듯했다. 차라리 삶이 끝났다는 게 해피엔딩일 수 있는 이 소설. 이렇게 같이 읽지 않는다면 내 재미를 위해서 절대 선택하지 않을 단 한 권의 책이다.
줄거리
책의 시작은 한 남자의 장례식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이름은 없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역시나 안 보인다. 그 후 그가 살았던 어린 시절, 그리고 세 번이나 이어진 결혼, 계속된 수술과 아픔, 마지막으로 여생을 지낸 은퇴자 마을에서 미술 선생님으로서의 삶, 그리고 죽음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주인공의 삶
그가 느낀 고통은 어릴 때 탈장 수술부터 시작된다. 탈장 수술하기 위해 입원한 첫 날, 같은 방에 있던 다른 아이가 죽는다. 그는 그 전에 바닷가에서 난파선에 있던 시체를 만나기는 했지만 삶과 죽음을 지척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다. 경기 불황에도 수완 좋은 ‘에브리맨’이란 가게 보석상이었던 부모는 아들 둘을 훌륭하게 키운다. 둘째 아들인 주인공은 그런 부모에게 보답하듯 누구나 하는 결혼을 해 독립한다. 첫 번째 결혼은 실패였다.

진정한 반려자 피비를 만나 귀중한 딸 낸시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러던 중 노화에 따른 몸이 얘기하는 징후를 겪는다.
그 일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었다. 이제 한해도 입원 없이 지나가지 않았다. 장수한 부모의 아들이고, 토머스 제퍼슨 고등학교에서 공을 들고 뛰던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건강해 보이는 여섯 살 위의 형을 둔 동생이었지만, 그는 아직 육십 대에 불과한데도 건강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몸은 늘 위협을 당하는 것 같았다. 그는 세 번 결혼을 했고, 애인들과 자식들과 성공을 안겨준 흥미로운 일자리를 가졌지만, 이제 죽음을 피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중심적인 일이 되었고 육체의 쇠퇴가 그의 이야기의 전부가 되었다.(76)

이렇게 아파오자 그는 건강한 형 하위를 진심으로 질투한다. 이렇게 올라오는 질투는 정말 속수무책이다. 임신을 간절히 원할 때, 왜 우리에겐 아이만 주시냐고 그랬더니 상도 주셨다며 농담이랍시고 얘기하는 네 명의 자녀를 둔 여자 개그맨의 발언을 듣고 잠이 오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나를 배려해 말을 가려서 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올라오는 질투란 게 참 추하고 이기적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렇게 불가피하게 올라오는 못난 감정. 그걸 작가는 잘 설명해 주었다.
노인이 되어서야 그는 질투하는 사람에게서 평온, 나아가서 심지어 현실적인 태도까지 빼앗아가는 감정 상태를 발견했다-하위가 생물로서 부여받은 것이 자기 것이기도 했어야 한다는 이유로 하위를 미워했으니까.(105-106)
그는 죽어가는 자신의 육신 때문인지 일탈을 감행한다. 젊고 야한 여자와 놀아난다. 그 정도는 심해져서 정숙한 부인 피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른다. 피비는 떠난다. 요즘 읽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그런다. 보통 싸움이란 이기는 사람이 있다면 지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만 ‘이혼’만은 둘 다 지는 게임이라고. 그래서인지 피비는 헤어진 이후 충격때문인지 병에 걸려 팔 한 쪽이 마비된다.
이제는 내 생각을 감추지도 않을 거고, 입을 다물지도 않을 거야. 당신 앞에 성숙하고 똑똑한 여자가 나타났어. 상호관계라는 게 뭔지 이해하는 짝이 나타난 거야. 이 여자는 당신한테서 세실리아를 없애주고, 훌륭한 딸을 낳아주고, 당신 인생을 완전히 바꿔줬어. 그런데 당신은 그 여자를 위해 뭘 해야 좋을지 몰랐어. 덴마크 년하고 그 짓을 하는 것 말고는 말이야. 나는 손목시계를 볼 때마다 파리는 몇 시인지, 둘이서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하곤 했어. 그런 일이 주말 내내 계속됐다고. 모든 일의 기초는 신뢰야. 안 그래?(126)
광고 일을 했던 주인공. 그는 은퇴를 하지만 예전 직장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들은 한 명 한 명 늙어 죽는다. 이런 일들을 목격하며 한 마디로 정리한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162)
이렇게 우울하게 책을 읽고 있다가 긴장 풀라는 듯 웃긴 대목이 있었다. 주인공이 큰 수술을 앞두고 자신이 죽으면 묻힐 공동묘지에 가게 된다. 거기서 너무나도 슬프게 울고 있는 여인을 보며 대화를 나눈 대목이다.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일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정말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삶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해봤지요. 내심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아니, 댁이 틀렸소.” 남자는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저 여자는 늘 저랬소. 오십 년 동안이나 저랬단 말이오.” 그는 절대 용서 못 할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저 여자는 자기가 이제 열여덟 삶이 아니기 때문에 저러는 거요.”
그리고 그는 수술 중에 심장마비로 죽는다.
왜 이 이야기가 그토록 무서운 것일까? 갑자기 죽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죽는다. 친엄마라면 모두 아이를 낳는 것처럼. 그런데 글을 읽고 있자니 정말 잔혹하단 생각이 든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고 우리에게 ‘죽는’ 형벌을 내리셨다고 한다. 그게 과연 왜 형벌인건지 항상 궁금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니 명확히 알겠다. 늙어 죽는 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생각들
나이 많은 분들이 만나면 항상 하는 얘기가 있다. 병원 얘기와 아픈 얘기. 젊은 사람들이 싸고 질 좋은 옷과 가방 얘기를 한다면 노인들은 친절하고 저렴한 병원 얘기를 한다. 앞 집 할머니와 대화는 이렇다. 여든 가까운 할머니는 이제 ‘죽는’ 얘기를 하신다. “몇 동 몇 호 할머니가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몇 동 몇 호 할머니는 아직도 병원에서 돈만 쓰고 죽질 않는다.” 듣고 있으면 나도 곧 죽을 사람인 냥 진이 다 빠진다.
내가 사는 곳은 70년대에 지어진 당시 고급 아파트였다. 많은 분들이 이사 가지 않고 아파트와 함께 늙어가셨다. 이곳에 온 나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주위에는 모두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 뿐, 나랑 동갑인 사람은 하숙생과 다르지 않은 딸과 손자들밖에 없었다. 여기 사는 8년 동안 나는 죽음 수용의 5단계를 모두 거쳤다. 당장 이사 가야지.(부정) 왜 하필 이런 아파트야?(분노) 그래, 조금만 견디면 재건축하겠지.(타협) 도대체 재건축은 언제 되는 거야?(우울) 현재는 수용단계다. 그냥 주위 노인들에 대한 타협.
그러면서 내 시각도 달라졌다. 옛날에는 남에게 약점 잡힐 일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따라서 이런 SNS같은 곳에 내 자국을 남기는 것 또한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현재가 언제 숨기고 싶은 과거가 될지 모른다고. 항상 죽음을 염두 해 두니 이 또한 나에 대한 역사고 내 딸을 위한 기록이 된다. 내 생각의 파노라마가 된다.
마치며
책 시작부터 이 책을 읽지 말길 권했다. 내 생각이 달라졌다. 언제든 죽는 게 예정되어 있는 사람이면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삶이 감사하고 감사할지도 모른다.

죽음을 염두 해 둔 사람은 후회란 게 없다. 아마도 주인공이 젊은 여자를 보며 저지른 이탈도 어쩌면 자신이 죽지 않을 거란 오만함이 원인인 것을 아닐까. 죽기 전날에서야 주인공은 옳은 일을 행한다.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186)
이 책은 비록 얇은 소설이지만 결코 얕게 생각할 수 없는 묵직함이 있다.

결혼은 그의 감옥이 되었다. 그래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잠을 자야 할 시간에도 그를 사로잡는 수많은 괴로운 생각 끝에 발작적으로, 고민하면서, 밖으로 나갈 터널을 뚫기 시작했다.(39)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 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83)

우리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186)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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