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오랫동안 그 물건들을 버릴 수 없었다는건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임을 이 책을 읽으며 느꼈다.


아니, 그건 아니다. 선물이란 인사를 건네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물건에 만족하고 즐거워할 것을 생각하면 내 기분이 저절로 좋아지는, 그러니까 그냥 좋아하는 마음인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정확하게 생각하려고애쓰는 조금 전 내 소설 주인공의 말을 다시 인용해보자면 나는 "가볍게 살고 싶다. 아무렇게라는 건 아니다". - P44

수첩에 비하면 펜은 한층 더 잃어버리기 좋은 조건을 갖고있다. 상습 분실사범인 내가 그 이점을 간과할 리가 없다. 펜을 쥘 줄 알게 된 이래로 얼마나 많은 펜을 잃어버렸던가.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아끼는 펜은 밖으로 갖고 나가지 않아야마땅하다. 특히 선물로 받은 몽블랑 볼펜 같은 물건은 적당한무게감을 가졌으면서 볼이 부드럽게 미끄러지고 글씨가 선명하고 또 내 손에 맞게 길들여진 나의 사진이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기어코 지니고 나가 있다. 가령가인터뷰나 강연을 할 때인데, 이미지 메이한 소품이 필요해서는 결코 아니다(취향을 과시할 나이도 아니고 중후한 분위기는 이미 충분하다). 그 펜을 손에 쥐고 있으면 이상하게도마음이 든든해지기 때문이다. 마치 오랜 친구가 따라와준 기분이 들고, 긴장도 덜 하게 된다.
또 한 가지는 내 책에 사인을 해야 하는 경우이다. 어떻게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책을 원하는 독자에게 내가 아끼는 펜으로 이름을 적어주고 싶다. 자기 책에 사인을 하 - P70

죽은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내가 쓴 소설에도 그런 장면들이 있다. 머리를 빗다가 문득 브러시에서 죽은 남편의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그것을 빼내 손가락에 말아보는 아내. 외 - P86

나의 물건이지만 모든 사물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다 똑같지는 않다. 실수로 물건을 떨어뜨렸을 때에 아끼는 물건일수록 자기도 모르게 소리가 더 크게 터져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있다. 그런 마음을 일일이 의식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대하는것뿐, 머리와 가슴속에는 사물 각자의 캐릭터가 입력되어 있어 사물에 따라 미세하게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역시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복잡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는 한 누구나 섬세함이라는 상식을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복잡한존재이므로 나의 틀 안에서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단 하나의 물건을 만드는 예술가는 못 되지만 문학이우리에게 주려는 것, 인간이 가진 단 하나의 고유성을 지켜주도록 돕는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 P96

저 소년은 어쩌다 악의 선수를 흠모하게 되었을까. 그것은악이 아니라 패배를 흠모하는 걸 수도 있는데, 언제나 악이 패배하는 세계라니, 분명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어쩌면 프로슬링이란 현실에서 실패한 선한 약자들이 악을 물리치는 극본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는 시뮬레이션의 세계가 아닐까.
하지만 그 세계를 움직이는 돈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순진한 잡념일 것이다. 오히려 강한 것이 선이 되어버리는도착된 이데올로기의 전시장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 P104


아직 아니다.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가다보면 내가 태어나기 전의 물건까지 줄줄이 등장한다. 오래전 엄마의 문갑에서발견해 가져온 부모님의 청첩장, 두 분이 청춘 시절 주고받은빛바랜 펜글씨 편지들, 그리고 일제강점기 소학교 학생이었던엄마의 성적표까지. 기념 삼아 갖는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결국 그것들을 소설에 죄다 써먹었다(집안에 소설가가 한명 나오면 삼대가 털린다더니…………).
이쯤 나열해놓으면 짐작이 갈 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저물건들 모두를 아직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나의 추 - P150

지금 갑자기 생각이 났다. 대학원에 다닐 무렵 한때 나는 12간지의 궤를 외워서 사람의 운명에 대해 그럴 듯한 말 지어내기를 좋아했다. 동아리 방에 자리를 깔고 선무당 사주를 봐주었던 것도 인기를 좀 얻어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심하게 사주가 평탄하지 않은 사람(전문용어를 쓰자면 ‘파‘
가 세 개나 되었다)을 만나 그에게 궁색하나마 덕담을 해준답시고 ‘당신은 평생 남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왜냐하면 자신의 팔자는 탐탁치 않으므로)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이 ‘그렇다면당신이 도와주면 어떻겠냐‘고 느닷없는 반전을 시도하는 바람에 그만 그후로 오랫동안 그 사람을 돕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열심히 도왔냐 하면, 사주단자를 보낼 때 그 사람의생일을 하루 앞당겨 쓰게 했다. 그렇게 하면 사주가 완전히 달라지니까. 즉 사주를 신봉하는 나의 엄마를 속이기 위해. (결 - P177

내가 잘 알지 못하는 타자를 내 기준에 맞춰 판단하는 편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령, 강아지와 고양이가 간은 언어를 쓸까 인간이 동물계를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로분류해서, 인간 이외의 동물들끼리는 모두 말이 통한 거라고디즈니의 세계처럼 생각하는 건, 수많은 동물 중 하나인 주제에 오만한 이분법이 아닌가 하는 잡념 같은 것들......
그런 잡념들을 소설에 쓰기도 했다. 한 장편소설에 등장하는 고양이 두 마리의 이름은 도토와 토리. 둘을 한꺼번에 ‘도토리들‘이라고 부르는 싱글 맘 신민아씨는 자신이 그 고양이들을 알뜰하게 보살피지 않는 데 대해 긴 변명을 늘어놓는다.
"처음 도토리들 데려올 때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어. 애지중지 진짜 애틋하게 귀여워했거든. 근데 익숙해지고 나니까 좀식어버리데? 가끔은 한 공간에 같이 있다는 존재감 자체가 신경이 쓰이기 수리 특별히 보살펴줄 것도 없잖아. 근데도 괜히 성가신 거이 부담스러우니까. 그러다보니또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서 미안해지고 그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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