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필립 로스. 올해 운명을 달리한 작가. 이 책 <네메시스>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최근 작고했다. 그렇게 가버린 작가 빈자리를 이렇게나마 책 으로 대신해 본다.

 

1900년 초반 폴리오라는 병이 어느 한 사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이야기다. 주인공 버키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청년이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안 되면 되게 하고 싸우고 쟁취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태어날 때 어머니를 잃고 감옥에 아버지를 잃은 소년, 최초의 기억에 부모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소년은 그를 받아준 대리 부모들 운은 더없이 좋아 모든 면에서 강해질 수 있었다. 비록 부모의 부재가 그의 개인사를 결정하기는 했지만, 부재하는 부모 생각 때문에 그가 괴로워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32)

 

그는 건강하고 다부진 몸을 갖고 있다. 많은 젊은이가 국가 승리를 위해 군대에 가지만 그는 나쁜 눈 때문에 군대 입대를 할 수 없다. 대신 그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책임진다. 그 때 발병한 폴리오 때문에 아이들이 죽어나간다. 이유도 없이 단지 간염 됐다는 이유만으로 죽어나가는 사태에 주변 피해도 만만치 않다.

 

여기서 핫도그를 먹고 집에 가서 폴리오에 걸려 죽었다고 이제 모두 무서워서 오지를 않아. 말도 안 돼. 핫도그 때문에 폴리오에 걸리는 게 아니야. 핫도그를 수천 개는 팔았는데 아무도 폴리오에 걸리지 않았어. 그러다가 아이 하나가 폴리오에 걸리니까 모두들 이러는 거야.“(63)

 

아이가 죽었을 때 그건 자신 책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중에 결국 여자 친구를 따라 캠핑장에 가서 자신을 비롯한 주변 아이가 폴리오란 병이 그를 덮치자 그는 결국 망가져 버린다.

 

슬픔에 압도되어 그에게 미친 듯이 욕을 퍼붓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86)

 

우리는 아무런 근거 없이 우리 자신을 가혹하게 심판하기도 해. 하지만 잘못된 책임감은 사람을 쇠약하게 만들 수 있다네.“ (107)

 

버키는 완벽한 조건을 갖고 태어나진 못했다. 그렇지만 사랑받고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으며 잘 컸다. 그렇기에 마샤라는 멋있는 여인을 만나고 그녀와 함께 인생을 같이 살 것을 다짐한다. 그 때 폴리오라는 병이 덮치면서 그가 책임진 부분(놀이터와 캠핑장)들이 무너지는 걸 보며 무력감을 느낀다. 결국 자신 몸까지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때 그는 자신을 구원해 줄 마샤까지 버려버린다.

 

사람의 운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누구의 인생이든 우연이며, 수태부터 시작하여 우연-예기치 않은 것의 압제-이 전부다. 나는 캔터 선생님이 자신이 하느님이라 부르던 존재를 비난했을 때 그가 정말로 비난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243)

 

그가 폴리오에 간염된 건 신이 그를 벌하기 위해서 였을까? 그렇다면 그는 그렇게 홀로 외로이 살아야 하는 게 맞다. 그렇지만 마지막 제자 아널드는 다리가 불구가 된 버키와 같은 상황에서도 평범함을 유지하며 가정을 꾸리고 살아갔다. 그가 그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그가 사랑했던 마샤와 그 가족까지 상처를 줘야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네가 폴리오에 걸렸다고 해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도 되는 권리가 생긴 건 아니야. 너는 하느님이 뭐하는 분인지 알지도 못해! 누구도 모르고 알 수도 없어! 너는 우둔하게 굴고 있지만-사실 너는 우둔하지 않아. 너는 아주 무지한 소리를 하고 있지만-사실 너는 무지하지 않아. 너는 미친 사람처럼 굴고 있지만-사실 너는 미치지 않았어. 너는 한번도 미친 적이 없어. 너는 완벽하게 제정신이야. 제정신이고 건전하고 강하고 똑똑해 하지만 이걸 봐! 너는 지금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걷어차고, 내 가족을 걷어차고 있어. 나는 그런 제정신이 아닌 짓을 거들지 않겠어!“ (261)

 

사람은 과연 완벽해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럼에도 처음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득권이 행하는 모습을 보며 우린 그들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행하는 모습을 보며 도대체 왜 이렇게 비이성적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자신이 그 위치에 있다면 그러지 않을 거라 장담한다. 그러다 결국 버키처럼 좌절한다. 버키는 처음 나쁜 시력 때문에 그 다음은 폴리오로 인해. 우린 보통 경제적 사정과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에 침몰한다.

 

솔로몬은 인생 마지막 전도서를 통해 삶을 이렇게 정의했다고 한다.

삶은 헛되고 헛되니 한없이 헛되도다.“ 라고 적었다.

필립 로스의 마지막 책 네메시스도 이야기를 통해 그렇게 얘기하는 듯하다. 우리는 항상 내 본질에 반해 노력과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항상 굴복한다. 결국 마지막은 다 부질 없는 짓이었음을 내뱉는다.

그나마 저자는 마지막 시점을 주인공 버키 보다 어린 제자로 설정했다. 그는 버키와 같은 절망을 만났지만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했다. 어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버키 보다 좀 더 강한 내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까? 저자는 그 선택을 독자에게 넘기고 있다.

 

에브리맨에서 늙음은 대량학살이라고 외친 저자 글이 또렷이 기억한다. 시간은 누구나에게 공평하다. 그렇기에 신이 있다고 해도, 설령 없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렇지만 작품과 글만은 그 시간을 머금은 채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