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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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니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던 때, 식구들의 귀가 시간에 맞추느라 외출했다가도 허둥지둥 돌아오기에 바빴을 때, 시간에 맞춰서 밥을 짓고 빵을 굽느라 알람을 서너 개씩 맞춰 놓던 그때가 오히려 내게는 웜홀에서의 시간이었다. 완벽하게 홀로 있을 수 있었으므로 "날 좀 그냥 내버려 둬!"란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쌓인 설거지와 세탁종료를 알리는 알람 소리 정도는 무시할 수 있었다. 온갖 것들을, 책과 바느질감과 식재료들을 그대로 늘어놓고 바느질을 하고 책을 읽고 풀을 뽑았다.
104
나만의 방을 갖고 싶었다. 가능하면 텅 빈 느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 무엇을 하든 처음의 느낌이 날 테니까. 책상을 들요놓고 스탠드에 불을 켠 날, 드디어 내 방이 생겼다. 처음에는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중략) 낮에 억눌리며 숨어있던 감정들은 어두운 밤 홀로 있는 시간이면 방구석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와 나를 괴롭혔다. 호젓하게 즐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시간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당장 하고 싶은 것이 뭔지도 몰랐다. 밤마다 내 안의 온갖 감정들과 씨름을 했다. (중략) 애써 마련한 공간과 그 안에서의 시간을 형체도 없는 무언가와의 싸움으로 보내 버리는 게 억울했다. (중략) 나는 왜 내내 내 생각만 하고 있을까. 내 방이 '나'로 가득 차서 나 아닌 무엇을, 혹은 누구를 위한 자리를 만들 수 없었다. 방이 점점 비좁게 느껴졌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고 뒤뚱거리다가 온 밤을 보내 버리는 꼴이었다. 나를 줄이고 줄여서 작게 만들어야 방이 점점 넓어질 터였다.
131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 시기가 꼭 지금의 우리를 닮은 것 같다고 친구는 잠시도 말을 쉬지 않았다. 젊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직 늙지 않았고 서둘지 않고 느긋할 수 있고 그래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해야만 하는 일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지금이 바로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때 아니겠느냐는 말을 들으면서, 요즘 주방에서 일할 때마다 틀어 놓는 영화 <다가오는 것들> 중 나탈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런 생각을 해.
애들은 품을 떠났고, 남편은 가고 엄마는 죽고
나는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진정한 자유.
놀라운 일이야."
133
친구는 오래도록 좋아하며 즐길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따. 설혹 그것이 대단한 쓸모가 없더라도 다른 누구 혹은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닌, 오직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정작 그게 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해하며 조바심을 드러냈다. 뭘 좋아하는지, 뭘 하면 즐거울지 고민하는 중이라는 말 속에는 설렘의 흔적이 보였다.
137
언젠가부터 나이를 생각하며 하고 싶은 일들을 미리 포기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긴 나이뿐일까? 여자라서, 아이가 있어서, 시골에 살아서, 본질과는 무관한 상황들이 끊임없이 나를 멈춰 서게 하고 돌아서게 한다. 친구와 얘기를 나누면서 어쩌면 그것들 모두가 핑계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57
집안에서 마당으로 나갈 때마다 버릇처럼 심호흡을 한다. 갇혀 있던 것도 아닌데 나가면 숨통이 트인다. 마당 식물들을 눈에 담으며 몇 걸음만 걸으면 물처럼 고여있던 생각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읽을 것, 공부할 것, 정리할 것, 쓸 것, 연락할 사람, 버려야 할 물건들, 기억해야 할 약속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나면 거기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보고 싶은 사람, 내가 가고 싶은 곳이 보인다. 드러난 것 뒤에 항상 더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 그림책 [리디아의 정원]도 그렇다. 들여다볼수록, 책장을 천천히 넘길수록 더 잘 보인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아직 빛이 남아있는 마당에서 낮 동안 숨어있는 꽃들을 발견할 때 나는 내가 리디아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178
해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우리들은 안도하고 또 자란다. 삶의 어느 부분은 좀 모자란 듯 놔두어도 괜찮다. 안 되는 것, 겁나는 것, 피하고 싶은 것들을 인정하고 나면 삶이 그만큼 편해진다. 안 보이던 게 보인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너그러워 진다. 좋아하는 것들에 한층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운이 좋다면 여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와는 인연이 없다고 밀쳐 두었던 뭔가를 잘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숨어있는 재능을 찾아낼 지도, 잊었던 기쁨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삶은 매 순간 모습을 바꾼다.
186
엄마가 되면서 이름을 잃어 버린 것도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삶이 헛헛하다. 엄마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가 아니고 하고 싶은 만큼 엄마 노릇을 할 수 없어서 엄마는 운다. ....
215
너른 공원에 있는 한 사람을 주목해서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보는 일, 이 섬세하고 정교한 그림책을 발견한 이후 책을 펼 때마다 내가 되풀이하는 놀이다. 누구의 이야기도 다른 이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 바로 우리들의 하루하루가 거기 있었다.
한사람의 뒤를 쫓으며 그가 가졌을 이야기를 상상한다. 비록 보이는 것은 몇몇 순간에 불과하지만,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모퉁이를 돌 때마다 슬라이드가 넘어가듯 장면이 바뀌어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해주지 않아도, 어느새 그 속에서 숨겨진 저간의 사정을 알 것 같은 혹은 지나간 언젠가의 나였을 수도 있겠다는 누군가를 발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