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san Sontag수전손택/1933년 1월 16일 (미국) - 2004년 12월 28일

 그 어떤 과장도 없이 이야기 하자면 21세기는 바야하로 '이미지'의 시대다. 문학과 회화예술이 도달하지 못하는 '극 사실적'인 현실을 반영한다는 착각 속에서, 사람들은 이미지의 사실관계를 '이미지 특유의 사실성'에 기대 받아드리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한 고찰의 부재로써, 이미지가 만드는 사회의 왜곡된 선입견과 위선과 한계들을 배제하고라도 하루의 시작부터 마지막 까지, 마주하는 이미지들이 너무 과도하다. 텔레비전을 틀면 나오는 지구 반대편의 폭탄테러 소식과, 사건현장을 피폐한 모습으로 촬영한 자료화면을 내보이는 뉴스앵커들의 목소리는 이미지의 사실성에 기대어 설득력을 보장받는다. 고로 시청자를 확보하고, 광고효과를 얻는다. 기업은 더 상생하며, 대중들에게 조금더 자극적인, 조금 더 사실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런 이미지의 바다 속에서 측면과 사실의 왜곡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다.














수전손택. 미국출신의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 예술평론가, 연극제작자, 사회운동가등 손으로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생존에 다양한 사회적활동을 해왔다. 뉴욕에서 태어나 15세의 나이에 버클리대학교에 입학한 뒤로 하버드 철학박사 학위를 얻기까지 수전손택이라는 인물은 얼마안되 세기의 주목을 받게된다. <해석에 반대한다>와 <캠프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로 손택의 이목은 주목받기 시작한다. 예술을 고정적인 해석의 개념이 아닌, 예술 그 자체의 예술로 받아드려야 한다는 이론으로, 기성 평론가와 예술가 들에게 다른 예술 철학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 이후 베트남전 참전, 아메리칸드림등 일부 미국 보수 진영의 이념에 문제제기를 하며, 사회적인 문제에 까지 직접적으로 참여한다. 셀수도 없이 다양한 단체들에서 위선과 왜곡된 국가의 만행과 외교정책들을 비판하고 실질적인 참여로 세상을 진일보하기위해 노력한다. 철학박사 출신으로써 논문형식의 글을 계속해서 출판하며 문학계에서는 가장 근본의 문제의식을 판단하는 작가로 명성을 높히게 된다. 하지만 결코 전문용어와 미사어구를 남용하며 '그 들'만의 지식에서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전손택의 글은, 누구나 쉽게 하지만 가장 핵심을 집어내는 글쓰기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9.11 사전으로 비롯된 미국의 대테러선언을 비판한 <진정한 전투와, 공허한 은유>로 미국 국민들에게 선과악이라는 이분법을 이용해 마약이나 전쟁처럼 끝이없는 세력유지용 '은유'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자본주의의 개념으로 주변 신생국가들을 아직도 근식민지의 시각에서 소유하려고 하는 미국의 자행과, 그 행위를 정당화 하기위해 대중들을 다른 개념의 은유로 설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의 이미지가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무뎌지게 만들고 가장 근본적인 사태의 본질적인 심각성을 망각시킬 위험이 있듯이 국가가 자신들만의 당위를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위험에 대해여 매우 적확하게 비판한다. 








 그녀의 활동과 집필들이 21세기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확실히 가늠하긴 힘들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세계화의 문제와 그 권력의 남용들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왜곡들을 그대로 흡수하며 받아드리고 있는지. 또한 이미지와 문학에 대한 철학 관점이 결국 범 사회적인 문제의식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는지 고찰해보는 이런 일들이, 결코 그녀가 생전에 투쟁해 왔던 헤아릴수 없는 전쟁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스펙터클한 오락거리로 받아드려지고 있는 이 세대에서 그녀의 기록들은, 그 자체로 가장 숭고하고 존엄한 선언이었다고 생각한다.-ozwonsuv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lbert Camus

알베르카뮈/1913년 11월 7일 (알제리) - 1960년 1월 4일 

 20세기에 다양한 예술형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을 꼽으라면 '실존주의철학'이 아닐까 싶다. 알다시피 1차 세계대전이 불러온 사회 구조적 혼란과 범사회적 자괴감으로 비롯되었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행할 수 없는 고난들을 표현하려 했고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영상예술에서는 펠리니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의 사조가 이어졌다. 비참한 현실을 몽타쥬와 다양한 편집기술들을 배제한채 기존 사실주의에서 더 깊은 사실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당대 사람들에게 지나친 현실 반영이 지루하고 이질적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예술과 사회현상은 양극단에서 함께 진보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속 대사가 이미 내포하고 있듯이, 살아서 생존한다는 존재자체의 담론에 의의를 제기하고 있다. 실존주의의 이같은 본질탐구는 생존문제에 밀접하게 기대 생각되어지는 철학으로써 당대 국민들에게는 부적절하고 매우 위험한 담론으로 분류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가들에게는 삶에 비치는 현실탐구라는 이상을 표력하기에 더할나위없는 사상이었던 것이다. 존재는 개인의 주관이 투영된 하나의 피사체에 불과하고, 그 생각의 투영들이 행하는 당위들은 애초에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이 철학 자체가 포괄하는 영역과 담고있는 농도가 너무 방대하고 세밀해서 구체적인 정의를 내린다는 자체가 어쩌면 철학에 대한 모순으로 다가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힐링, 멘토등의 키워드로 세대를 뭉뚱그려 규정짓고 각자의 한계를 범세대적 연민으로 왜곡시키는 서적과 담론들이 횡횡하는 이 시기에 문득 더할나위없이 중요하게 다가왔다.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으로 분류되는 <이방인>은 문학동네 출판사에서는 <이인>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출판계에서 유일하게 다른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기존 같은 곳에서 다른 사상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함축한 <이방인>이라는 제목이 기존 출판 업계에서 당연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타인이 자신을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것에 더해,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되는 소설속 주인공은 자기내부를 타인으로 바라보며 서술하고 다시 개인으로, 다시 타인으로 오고가며 판단하게 되는, 이런 내부의 타자화 이루어 진다. 이는 자신을 타인으로 규정짓고 관찰하는 행위와, 사회 속에서 이해되지 못하고 분열되는 개인의 실존철학을 거울을 보듯 인식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인二人>이라는 제목도 마땅히 적확해 보인다.

 최근 세계고전문학으로 독자들의 이목이 주목되면서 여기저기 다양한 출판사에서 출판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중복된 출판도 계속 이루어 지고있다. 조지오웰과, 허밍웨이와 더불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가장 많은 출판사에서 출판된 세계문학이 아닌가 생각 될 정도이다. 그만큼 이 <이방인>은 시간이 지날 수록 현 사회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심심한 관념에 거름을 뿌려주는 책이라는 것이다. 

















 <페스트>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 한다. 빠져나갈 수 없는 재항 속에서, 죽음과 생존을 이야기 한다.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 저마다 어떻게 재앙에 대처하는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극한의 상황에서의 봉기가 어떤 진리를 불러올 수 있는지, 알베르카뮈의 실존적철학을 좀더 다양한 개체와 공간들에 이입해 실험한 느낌이 드는 수작이다. 









 문예출판에서 나온 알베르 카뮈 전집들은 충분히 소장가치 있다고 생각된다. 인간이 살만한 가치가 없는냐에 대한 철학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위치에서 바라보는 <시지프신화>, 풍경과 자연을 시적인문장으로 표현한 수작 <결혼. 여름>. 역사적, 사회적 현상들이 일으키는 '반항'이 어떤 근본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이 제기하는 실존적 의의를 다룬 <반항하는 인간>, 주로 주인공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인간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위선과 탐욕을 끄집어 내는 <전락>까지 어디하나 빼놓고 얘기 할 수 없는 알베르카뮈의 소설들이며, 아마도 현재진행형으로 그가 문학으로 드러낸 철학은 연장선상에서 지금도 끈임없이 화자 될 것이다. -ozwonsuv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홍상수 감독의 2013년 신작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라는 작품의 예고편이 공개되었습니다. 2013년 2월 28일. 아직 한달도 더 남았는데 너무 기대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예고편을 보다가 김의성씨가 극중 해원에게 오른속으론 담배를, 왼손엔 책을 들고서 한적한 길가 어디쯤에서 묻습니다. "저.. 용기를 좀 내보는 건데.. 차나 한잔 하고 가실래요?". 그때 해원은 "뭘 용기까지 내시고..". 정말 뭘 용기까지 내시고. 


 가능하면 주마다 시사주간지를 꼭 사서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아무래도 작은 핸드폰 사이즈로 축약돼고, 그 사안의 밀도 또한 함량되서 표현되는 모바일 뉴스 기사들은 안보게 되더라구요. 손으로 종이를 넘기면서 권으로 된 재화를 읽는다는 것은 마치 해산물 칼국수를 집 앞 지하상가에서 먹냐, 안면도 해안부두 꽃섬 휴양지 앞에서 먹냐의 차이만큼 크게 느껴지더라구요. 여하튼 그 시사주간지에서 혹은 문화 평론지에서 가장 선호하는 평론가가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허지웅 문화평론가 입니다. 다름아니라 사회 이슈에서 단면을 포착하고 그것을 글로 내보이는 방법에 있어서 허지웅평론가의 글을 굉장히 탁월하다고 느꼈습니다. 조미료 없는 구수한 비지찌개같이 입에 촥촥 감기는 문장들은 이어갈 수 록 무의식 속에 쌓여가는 기승전결로 하여금 칼럼 자체의 이해도도 빠르고 유머감각도 훌륭하더군요. 그 분께서 썼다는 에세이가 있길래 구매하려는 찰나, 책값이 무려 만삼천원이더라구요. 중고매장에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다, 올라오자마자 바로 속전 속결 구매. 와다다다. 사는김에 평소 입맛다시고있던 다섯권 더 같이 묶어서 주문했고 전부 중고입니다. 한창 읽으면서 사회 속에서 세상을 눅눅한 통상에서 벗어나 제대로 보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들. 남몰래 침대에 걸터앉아 훔쳐보려고 합니다. '뭘 용기까지 내면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3-01-2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에 와서 처음으로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가 개봉할 예정이란 걸 알게 되네요. 말씀하신 예고편이 무척 보고 싶어서 검색하긴 했으나, 근무중이라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요. 점심 시간때쯤 예고편이라도 먼저 감상하고 싶어요.

뭘 용기까지 내시고, 좋은데요? 흣.

뉴일러스 2013-01-28 11:58   좋아요 0 | URL
늘 홍상수감독님의 영화는 찾아보게 되지요. 덕분에 개봉소식을 알게되셨다니 기쁘네요. 아직은 용기를 좀 내게 되는 것 같네요. 글이라는건 생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것이라고 두려움도 느끼게 되네요. 시간이 지나고 많이 써보면 더 마음을 가볍게 먹을 수 있게 되겠지요? 용기까지 내지 않고도
 



 그래도 아직은 인생을 제대로 바라보기위해 노력하고 싶기에, 오늘도 청춘을 말한다. 감정을 포착하는 인위적인 촉감 대신 아늑하게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기에 우리는 아직 웃을 수 있다. 당신과 나의 관계 속에서 세계는 시작되었고, 그 세계의 끝에서 나는 부쳐지지 않는 누군가의 편지에 작지만 믿음을 걸어 본다. 모든 관계는 그 고독 만큼이나 유효하기에, 우리는 서로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그 어떤 설명보다, 청춘과 인생에서 느끼는 행위의 한계를 이야기 하는 작가 김연수의 단편소설 한부분을 발췌해서 이토록 추운 겨울을 잠시 데워보려 한다. 그 날씨의 따뜻함과 그대의 온기로.

나는 생각해 봤다. 그랬어요. 십 년은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봤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됬다. 다시 수만 년이 흐르면서,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그 나무는 한 연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희선씨에게 내가 말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그렇게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세계의 끝 여자친구, p.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마전 대선이 끝났다. 늘 그렇듯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후보의 양자대결로 후보자 점쳐졌고 그 가운데에는 중도 유권자를 상당 수 점하고 있다고 여겨지던 한 후보도 있었다. 결국은 이래저래 그 명사의 긍정적 측면이 살짝 뒤틀린 단일화가 있었고, 역시나 그렇듯 양자대결로 대선을 이루어 졌다. 그리고 끝났다. 75%가 넘는 투표율에 과반지지를 받은 보수진영의 후보가 당선되었다. 진보정당들은 앞으로 5년간의 정권에서 청와대를 내주었다는데에 깊은 한숨을 내뱉었고, 몇일 뒤 예정된 순리처럼 각종 책임론과 사퇴론이 당내에서 쏟아졌다. 


하지만 유난히 돋보이는 현상이 진보진영에서 드러났다. 이번선거에서 보수적 후보자의 독특한 배경(가족관계, 국가통수권자로서의 역량등)들을 뒷전으로 넘겨두더라도, 결과에 상응하는 일부 진보 유권자 사이에서 윤리와 도덕적 메카니즘이 언급된다는 사실이다. 상대방 진영에 대해 정치적 이념의 차이가 아닌, 한 개인으로써의 도덕적 판단의 잣대가 동원되는 것이다. '나는 정의로운데'라는 자기 확신이 깃든 타인의 이념을 바라보는 '도덕적인 치명적 결함'이 상대 측 정당을 지지하는 세력들에 대한 철저한 이해의 불가능을 촉발하게 만든 것이다. 다양한 의견이 이분법의 형태로 갈라지고, 색채는 자연스레 '흑과 백' 두색깔로 뚜렷하게 나눠졌다. 서로의 이상을 구현하기에 다른 이념들은 윤리적으로 치명적인 오류를 가지게 되고, 자연스럽게 극 소수 진보진영의 목소리는 더 외각으로 편입되었다.


좀 더 내밀한 설명없이 표면적으로 현상의 문제를 드러냈지만, 이 문제는 우리 현 시대에서 각자 가지고 있는 이념들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한계를 얘기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국가 안보통일 차원의 얘기를 말하면서 예전부터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이 많았다. 한쪽에서는 극단적으로 북한체제의 비관적인 확고함이 깃들어져 있었고(대다수 세대들이 교육받는), 그나마 한쪽에서는 평화적 실현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메스미디어를 통해서 일부 불편한 이념이 꿈틀대면 다시금 극단의 색깔이 들춰져 나와 결기의 잣대로 비난이 쏟아지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마치 그 모습은, 누군가 문제시 되는 사상을 입밖으로 꺼내는지 이를갈며 바라보는 듯 하기도 하다. 


 북한 체제의 한계로 곧 붕괴 될거란 흡수논리와 더불어 통일 비용의 문제, 국가적 가치관의 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통일문제가 논제로 올라와 실질적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 하지만 천문학적 비용과 체제의 한계들을 담론하기 전에 우리 내부의 닫힌 자세부터 문제 삼아야 한다. 사회집단과 정치세력간의 이념 차이들을 충분히 조율하고, 소수의 의견들까지 공론의 장에 올려 귀를 기울이는 자세. 서로의 귀를 닫아 놓거나, 실질적으로 정책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이 용납하지 못하고, 이해관계의 한계를 윤리적 당위로 강하게 정해 놓는 실상에서 그 어떤 실질적인 통일문제도 현실성을 드러내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이미 내부에 세워져 삭막하게 사회를 가르고 있는 장벽을 무시한 채, 더 큰 장벽을 평화적으로 혹은 다른 식으로든 해소하려 든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고, 이해되서도 안된다. -ozwonsuv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