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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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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두 남녀가 주고받은 이메일로만 꽉 채워진 책이다. 원작이 출판된 독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고 연극으로까지 제작이 되었다 하고, 책을 빌려준 친구도 후배가 너무 재미있어서 서점에서 선 채로 다 읽었다 해서 자기도 샀다는 말에, ‘그래?’하고 흥미가 동해서 빌려와 본 책이다. 그만큼 독일에서나 한국에서나, 인터넷 이메일을 통한 인간관계가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공교롭게도 남자 주인공 레오는 이메일을 통해 인간의 언어 심리를 연구하려고 하는 ‘언어심리학자’다.)

 

   첫 번째 책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가 큰 인기를 끌자 작가 다니엘 글라타우어가 내놓은 속편이 「일곱번째 파도」이다. 이제는, 이메일도 진부해진 듯하고 메신저로 instant message를 주고 받는 것이 더 익숙해졌고, 페이스북이나 미니홈피 등을 통한 인간관계 관리가 인터넷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선 많이 보편화된 것도 사실이다. (어떤 영어 원어민이 ‘페이스북을 안 하면 이젠 메일도 안 와’라고 한 걸 들은 적이 있다.) 메신저로 대화를 많이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상대방의 이모티콘, 다음 말이 뜨기까지 걸린 시간, 문장 부호 어떤 것을 얼마나 자주, 많이 쓰는지만 보고도 상대방의 기분이나 성격을 어느 정도, 아니 상당 부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 소설에서 인스턴트 메신저가 아닌 이메일을 매체로 한 것은 아마도, 이메일을 써서 상대방에게 보내고 답장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그 시간이 주는 설레임과 그것이 길어질 때 생기는 불안함, 궁금증 등을 통해 주인공들의 감정의 오르내림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아닌게 아니라 내 친구 후배의 말대로 무척이나 재미있다. 짧은 편지글의 주고 받음 속에 드러나는 감정들의 변화, 그들의 일상과 서서히 드러나는 주변 인물들을 알아가는 것까지도. 특히 1권 마지막에 두 사람이 드디어 만날 것처럼 긴장을 한껏 고조시켰다가 변경된 이메일 주소라는 마지막 메일로 ‘아!’하고 안타까운 한숨을 쉬게 하는 것은 압권이다. 두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을 바라는 사람은 결국 두 사람의 결합을 암시하며 끝나는 속편 「일곱번째 파도」를 보면 안도할 것이다. 하지만 1권으로만 끝냈어도 괜찮았을 텐데.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다면, 레오는 어떤 여자가 봐도 멋있다 느낄 ‘지적이면서도 잘생긴 남자’이고, ‘에미’ 역시 어떤 남자가 봐도 사랑스럽게 여길 ‘예쁜 여자’라는 것. 너무 전형적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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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 영어, 미국화, 세계화 사이의 숨은 그림 찾기 라면 교양 4
문강형준 지음 / 뜨인돌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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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좋아하는 EBS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Power English'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 프로그램의 closing ment는 매일 똑같다. With ___ and ___(show hosts' names), You've got the POWER!

영어를 잘하면 넌  Power,힘, 권력을 갖게 되는 거야!
참으로 지금 우리 시대의 세태에 적절한 말이 아닌지?

이 책 제목을 본 누군가가 물었다. 그래서 결론은 행복해진다야 아니야? 글쎄.. 생각을 한 번 해 보자는 거다. 그 질문은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까?'랑 비슷하다. 한 마디로 '예/아니오'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현실은 '예'에 가까운 것 같은데, 꼭 그렇게 답할 수만도 없다. 워낙 여러 조건과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에. 하지만 저런 질문들은, '예'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전제로 제기된 질문들이다.  돈이 행복의 절대 조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사회는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한 사회이고, 영어가 행복의 조건이 된다면 그 역시 영어 만능주의, English Fetish가 만연한 사회라는 것이다. 이 책은 English Fetish가 공공연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그 현상에 의문을 던지고, 그에 얽힌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여 영어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을 갖자는 취지로 쓰여진 책이다. 

1장에서는 소수언어가 사라지는 원인을 농업혁명, 산업혁명, 제국주의에서 찾으면서 언어와 권력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언어와 언어사이의 권력 관계 뿐 아니라, 권력자들이 어떻게 언어를 이용하여 대중을 선동하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비단 외국어 뿐만이 아닌 언어에 대해 비판적인 감각을 길러야 함을 시사하는 장이기도 하다.

2장은, 그러한 배경(제국주의)으로 등장한 국제어로서의 영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어가 국제어로서 펴지게 된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다루고 있다. 물리적인 제국주의 시대는 끝났지만, 언어를 매개로 한 제국주의는 여전히 남아 있음을 말하고 있다.

3장은, 더 범위를 좁혀 우리나라에서 영어 현상을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영어가 들어온 때부터 시작된 영어교육의 역사, 세계화에 힘입어 가속화된 영어 열풍 현상, 영어가 성공의 지름길이 되 버린 지금의 현실과 부모의 경제력이 영어교육을 좌우하는 제1의 요소라는 현실을 꼬집는다.

4장은, 영어 확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세계화 현상을 다룬다. 결국 영어가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지, 영어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며 그 그늘을 직시하자고 한다. 세계화가 야기시키는 불평등을, 영어라는 언어로 인해 빚어지는 불평등이 과연 정당한가? 질문을 던진다. 영어를 배울 기회가 누구에게 공평하게 열려야 함을, 필요하지 않은 분야에까지 영어를 강요하지 않도록, 더 나아가 소수가 차별받는 문화 자체를 비판하고 다양함이 어우러지는 사회를 희망한다.

 나 역시 영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우리나라의 이 왜곡된 영어 광풍 현상과 영어가 출세의 도구가 되는, 한 언어가 권력화되어 버린 이 현상에 대해서는 늘 의문과 불편함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영어를 전공한 저자이기에 더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목소리가 더 일찍, 전문가 집단에서 나왔어야 했다. 나도 이제 구체적으로 내가 선 위치에서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찾아보게 된다. '영어'를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고민하고 방법을 찾는 것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더 멀리 보면,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라 본다. '사유'를 하고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찾아낸다. 표현 하고 싶은 자기 생각이 많아지도록 하면, 아이들은 그것을 전달하고 소통하고 싶어할 것이다. 상대가 외국인이라면 당연히 외국어로 표현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고, 시선을 세계로 넓히도록 도와주고, 표현해 낼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제는 고기잡는 기술을 가르치기보다 바다를 그리워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처럼.

이 책은 읽기 쉽게 쓰여졌다. 중고등학생 이상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 나처럼 이 이상한 영어 광풍에 불편함을 느꼈던 사람이라면 무릎을 치며 공감할 것이고,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사고의 전환을 위해 더더욱 필요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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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이야기 1 - 미술이 태어난 날
조승연.앤드스튜디오 지음 / 세미콜론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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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에 관한 “이야기”이다. 1권의 부제는 “미술이 태어난 날”인데, 이는 서양에서 미술이 “미술”로서 인정받고 미술가들이 석공이나 노동자들이 예술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앞부분 저자의 말에도 나와 있듯이, 이 책은 분명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는 독자들에게 르네상스 시대의 분위기와 인물들을 더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저자는 - 이 책은 역사적 인물과 배경을 중심으로 소설을 쓴 “역사 소설”이 아니다. 사록에서 이미 알려진 사실을 극화시키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빈 공간에만 상상의 붓으로 몇 명 가상 인물의 삶을 그려 넣었을 뿐이다 - 라고 밝히고 있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을 어렴풋이 떠올려 볼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예술가들과 이탈리아의 문예부흥, 독일의 종교개혁 등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이런 거장들이 아니라 브루넬레스키, 알베르티, 도나텔로, 마사초 등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생소한 이름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메디치 가문은 워낙 역사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익숙하지만) 그러나 저자의 이전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저자가 <생각 기술>에서 서양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으로 르네상스 정신을 언급했고,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를 그 예로 들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 책에 대한 구상은 그 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듯하다)

 

  생소한 인물이 많은 만큼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지만, 저자는 독자의 부족한 배경 지식을 채워주기 위한 배려도 잊지 않는데 그 점이 이 책의 형식적인 특징이자 큰 강점이라 할 수 있다. 미술에 관한 책이니만큼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미술 작품과 건축물들의 사진과 그에 따른 해설은 물론이고, 인물과 용어에 대한 즉각적인 설명과 풀이, 지금의 시각으로 얼핏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에 대한 그 시대의 관점과 역사적 배경에 의거한 설명, 중간 중간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해 주는 연대표식 요약 등이 책을 읽으면서 따로 참고서적, 사전을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상세하고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책의 형식을 통해 저자가 평소 책을 읽고 공부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이 책은 또한 영상 매체, 인터넷 매체를 많이 닮아 있다. 여러 가지 관련 지식이 링크되어 있는 잘 짜여진 블로그 같기도 하고, 현재형의 시제와 생생한 묘사 덕분에 이야기 형식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실제로 다큐멘터리 해설 같은 표현도 있다. “지금 우리는 북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밀라노의 폭군인 비스콘티 공작의 군대를 지켜보고 있다.”)

 

  미술가와 작품들에 대한 참고서 몇 줄의 박제된 지식이 아니라, 철저한 자료 조사에 근거한 생생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상황(상당히 폭력적이었던)과 생활사, 커져 가던 예술가들의 영향력과 그에 따른 사회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는 점 또한 이 책을 읽는 큰 즐거움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등장하는 인물의 수가 많아 그 인물들에 대한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는 점인데, 이는 천재들이 한꺼번에 등장했던 이 시대의 특징을 소설 형식 속에 녹여내고, 여기에 가상 인물들까지 등장시키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야기의 진행이 가끔 매끄럽지 않다는 인상도 받곤 했다. 앞으로 3권의 분량이 더 남아 있다고 하니 백과사전적인 이 책의 장점은 그대로 살리면서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도 좀 더 높아지기를, 또 더 많은 미술 작품들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시대에 대한 아쉬움이라면, 그렇게 문화적으로 부흥하고 융성했던 르네상스 시대이지만, 여성들의 참여는 여전히 봉쇄라 할 만큼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도 귀족이나 사업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지식과 교양이 있던 ‘코르테자노(궁정인)’가 나오는데, ‘코르테자노’가 19~20세기에 여성들에게 나타난 것이 ‘코르티잔’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런 코르티잔들이 없었는지, 여성들의 예술에의 참여는 어떤 형태로든 없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술자, 노동자라 불리던 사람들이 막 예술가,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때였으므로, 자신의 직업을 갖지 못했던 그 당시 여성들로서는 기술, 예술에의 참여 기회가 거의 없었을 거라는 추측은 해 볼 수 있지만.

 

  그리고, 사소한 부분일 수 있지만, 오타가 여러 군데 눈에 띈다. 철자법이 틀린 경우(p. 214. 마사초의 작품을 을->'을'이 두 번 나옴, p. 253. 나았는데->낳았는데, p. 272. 설치면->설치면서)나, '안나'를 '카테리나'로 잘못 쓴 부분(p. 132, 150)도 있다. 다음 쇄에서는 이러한 사소한 부분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 책을 읽다가 어느 인물이나 용어에 대한 부분을 다시 찾으려면 책을 여러 번 뒤적여야 했다. 책 뒤에 색인 목록이 있으면 책의 활용도가 더 높아지지 않을까 한다.

 

  책에 대한 소감과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저자와 같은 세대의 독자로서, 자신이 좋아하고 공부하는 분야를 끊임없이 형상물로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와 노력에 늘 자극을 받는다. 앞으로도 계속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그리고 이‘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시리즈를 끝까지 완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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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맹수의 눈을 갖게 되었다
조승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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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맹수의 눈을 갖게 되었다. 다소 어색하게도 보이는 이 제목은, 본문에서도 나오지만 니체의 글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한 듯 보인다.

...................
찰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의 첫 대목이 머릿속에 맴돈다. "나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 말할 것이다." 어차피 이야기를 한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있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 속에 비수처럼 꽂혀 있는 것을 꺼내서 세상에 보여 주는 과정일 뿐이다.
....................
이 책의 끝자락에 있는 부분이다. 이 말대로 저자는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해 본인의 기억 속에 꽂혀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뉴욕에 관한 책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곤 한다. 전부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대개 목차를 보면, 뉴욕에 대한 기행기, 관광 안내서 같은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이 책은 그런 사실적인 기술보다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역사, 도시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 등을 통해 느끼고 알게 된 뉴욕에 대해 다루고 있어 다른 책들과는 차별성을 가진다.

  영혼이 있는 도시. 도시와 인간의 관계.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새삼스레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를 둘러싸고 공간이 나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치는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전에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젊은이들의 절망의 한 원인이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는 저자의 말은 내겐 좀 충격적이었다. 그렇다. 공간과 나는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내가 이미 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공기에게 그런 것처럼 무관심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의 어떤 일치감, 정서를 느껴본 적이 없다.

  뉴욕하면 패션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만큼 뉴욕은 패션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유명 브랜드들도 뉴욕 출신들이 많다. 저자는 이 브랜드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내가 스스로 해낸 것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라고 말하는 뉴요커들의 철저한 땀, 노동의 정신을 이야기한다. 자연스레 뉴욕이 세워진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뉴욕의 역사를 들려준다. 우리는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래전부터 '뉴욕'은 미국과 별개의 지역이었다.  동인도 회사 노무자, 독일과 폴란드에서 종교 전쟁에 지쳐 먹을 것을 찾아 온 농민들, 하이티의 사탕수수밭에서 자유를 얻어 찾아온 노예들, 해적 선원들이 뉴욕 이민 1세대다. 교과서에서 공식적으로 메사추세츠와 버지니아의 '필그림'을 미국 역사의 시작으로 보는 미국인들은 오히려 뉴욕을 경멸했다. 링컨 시절 남북전쟁 때 징집령에 반대해 뉴욕시민들이 반대해 폭동을 일으키자 링컨은 메사추세츠와 뉴저지의 군대를 동원해 뉴욕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제 막 자유를 찾아 뉴욕에 와 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던 뉴요커들은 어떤 대의 명분으로도 자신의 자유와 생명을 타인의 결정에 맡기지 않으려 했다. 미국 사람들은 조국을 위한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뉴요커들을 비웃었지만 저자는 과연 그들 중 누가 법과 국가와 제도라는 정치인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 스스로 살 길을 정할 수 있는 권리를 찾으려고 손에 쇠파이프를 쥐고 군인들이 퍼붓는 총탄 속으로 뛰어들었을 것인가? 라고 묻는다. 그리고 뉴욕의 탄생 배경과 더불어 지금은 겉보기에 뉴욕과 흡사한 모습이지만 탄생 배경에서는 왕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주로 '위로부터의 역사'를 가진 서울과 비교하는 내용도 흥미롭다.

  뉴욕의 패션에 대해 이야기하며 저자는 뉴욕을 이루는 한 축인 뉴욕의 장사꾼들에 관한 이야기로 한국에 퍼져 있는 명품족 or 명품 신드롬을 꼬집는다.

  예술의 도시 뉴욕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뉴욕 속의 뉴욕이었던 소호와 그 소호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 그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유로 트레쉬에 관해 들려준다. 저자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졌던 이들과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간혹 뉴욕이 나오는 영화에 보면 슬럼가가 많이 등장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디카프리오가 주연했던 '바스켓볼 다이어리'같은) 뉴욕이 슬럼화된 것은 1980년대로, 뉴욕 시장이었던 모세스의 아파트와 고속도로 건설 중심의 대도시 재개발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던 곳을 허물고 도로를 건설하고 아파트를 세우면서 도시는 급격히 슬럼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를 뒤늦게 깨달은 뉴요커들의 저지로 이 정책은 중단되었고 아직 파괴되지 않은 소호 같은 곳에서 뉴욕이 다시 일어서는 힘이 나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도시의 문화와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도시 개발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델리 이야기. 뉴욕이 도시 개발의 상처에서 회복될 무렵. 그 노력의 중심지에는 한국 이민자들이 세운 편의점 델리가 있었다.

  저자의 어린 시절 청계천 시장에서 용돈을 모아 샀던 오래된 지도 이야기. 이 이야기도 나에겐 감동과 어떤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가 날마다 형과 함께 청계천 장한평 시장 고물상에서 오래된 물건을 구경하다 마침내 용돈을 모아 물건을 사러 갔을 때. 이만큼의 돈으로 무얼 살 수 있느냐는 질문에 가게 아저씨는 비행 지도를 건네 주신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지도 안에 돈은 그대로 들어 있었다. 중학교 시절 배웠던 국어 교과서에 실린, 선물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의 어떤 이야기와 비슷한, 부러운 추억이다.


  이 책에 대해서, 혹은 이 저자의 다른 책에 대한 리뷰에서도, 오만함으로 비춰지기도 하는 , 아직은 나이가 젊은 저자의 당당함에 대한 비난이 눈에 많이 띈다. 사실 우리 나라에 나오는 여러 책이나 글들에서 이런 투로 글을 쓰는 사람이 드문 것은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이 저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스스로의 길을 일구는 뉴요커의 정신을 대단히 존중하며, 저자 스스로도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이다.  나는 그 당당함이 자신의 성취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 당당함이 그저 철모르는 '잘난척'으로 보이지 않는다.
또 뉴요커들의 상술에 휘말리는 명품족들을 비판하고, 폐허가 되다시피 한 뉴욕에서 치열하게 델리를 살아남게 한 한국 이민자들을 존중할 줄 아는 저자가 철없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피의 허리케인' 이나 '유로트레쉬' 친구들과의 이야기, '피의 권리'를 존중하는 유럽 귀족들의 이야기에서 어떤 이질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저자의 친구 알렉스도 귀족 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든다고 하니) 그러나 저자도 말했듯이 이 책은 사실적인 정보 전달을 위한 책이 아니라 개인의 기억 속에 있는 한 도시와 그에 얽힌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도시와 공간에 관한 성찰, 뉴욕이라는 도시의 역사적 배경, 정신에 대해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아주 괜찮은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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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일만자 2008-03-05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굉장히 멋지게 쓰시네여...글 읽고 정말 감탄했습니다...마치 잔잔하게 말하면서도 할 말 다하는 침착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리뷰 정말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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